詩가 흐르는 상자

성미정의 시

tlsdkssk 2016. 1. 4. 09:41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 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서부터 시작했나요.

비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아직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 당신도 언젠가 저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거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거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기를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하고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남편은 내가 끌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해서 결혼했고

나는 남편이 내가 지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을

받아주는구나 착각해서 결혼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좀 더

커다란 가방만을 원했고

남편은 내가 온갖 잡동사니 쑤셔 넣고 다닐까

더 커다란 가방을 못 사게 하고

툭하면 좀 더 커다란 가방 때문에 다투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더 커다란 가방이 왜

필요한지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남편은 내가 자기랑 헤어지고 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닐 꼴을 못 봐서 헤어지지 못하고

오나가나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만난 우리는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하고

 

그런데 이 시를 읽고 계시는 극소수의 독자 여러분

(크지 않은 가방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부부가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정말

커다란 가방 때문일까요

 

 

 

 

시인의 폐허*                                            

어느 날 책을 정리하여 갑자기

시를 쓰고 싶은 마음과 시에 대한 열정에게

트렁크 가득 주고 나니

남은 것은 수경야채 입문과 베란다 가든

그의 도자기 책과 차 관련 서적

이걸로 무슨 시를 재배하고 우려낼 수 있으랴

이제 그는 아끼는 책들의 제목을

나직이 불러주지도 않고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느낌에 대부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어쩌면 이제 시인은 시인의 시인과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시인 또한 하나의 환영

속에서 사실 다른 시인이 시인을 꿈꾸고 있을지도

그 꿈 또한 어지럽고 지리멸렬한

서로 만들어진 낡은 트렁크

하나를 두고 한 말일 뿐일지라도


        * 시인의 폐허 :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에서 제목과 모티브를 빌려옴.

 

 

 

스누피란 놈                                             

 

스누피란 놈은 찰리 브라운이 점찍어 둔 예쁜 소녀를

늘 자신이 차지한다 차지한다고 해야 고작 그 애의 집에

서 쿠키를 나눠 먹는 것뿐이지만 그게 스누피에겐 중요한

거다 찰리 브라운은 한이 맺혀서 나간다 난 걔를 진짜 사

랑해 넌 쿠키나 얻어먹으려고 찾아간 것뿐이잖아 진짜 사

랑을 원하는 사람에게 진짜 사랑은 주는 건 쿠키를 나눠

먹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그래서 소녀들은 쿠키를 먹으러

오는 스누피가 부담 없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진짜 사랑

보다는 쿠키를 나누며 싹트는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다

스누피는 그걸 아는 놈이다 그래서 개집에 사는 게 아니

라 개집 지붕 꼭대기에 누워서 빈둥거리는 거다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곰국을 끓이다 보면 더 이상 우려낼 게 없을 때

맑은 물이 우러나온다 그걸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뽀얀 국물 다 우려내야 나오는

마시면 속이 개운해지는 저 눈물이

진짜 진주라는 생각이 든다

뼈에 숭숭 뚫린 구멍은

진주가 박혀 있던 자리라는 생각도

짠맛도 단맛도 나지 않고

시고 떫지도 않은 물 같은 저 눈물을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

뭔가 시원하게 울어내지 않았다는 생각

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 

유일한 재미라야 가끔 맥주를 마시는 것과

재미라곤 약에 쓸려고 해도 없는 남편을

골려주는 재미로 사는 35살의 가정주부 성모 씨가

어느날 띠포리라는 멸치 비슷한 말린 생선을

만난 후 다양한 재미에 빠져드는데

띠포리에서 깨끗한 국물을 뽑기 위해선

대가리와 내장을 발라내는 게 필수

그런데 이 띠포리란 놈은 멸치와 달리 납작하고

뼈가 센 것이 특징이라 잘 벗겨지지 않는

재미와 손가락을 찔리는 재미

게다가 금방 손질을 끝낼 수 없는 재미까지 있는데

35살의 주부 성모 씨는 띠포리를 손질하는 게 재미있을수록

띠포리가 줄어드는 만큼 불안 또한 커져가는데

급기야 띠포리를 다 손질하지 않고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아껴 손질할 생각까지 하게 되고

어느 적막한 밤 성모 씨가 남편에게 묻기를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

남편 배모 씨는 너무나 비장한 아내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혹시 띠포리가 떨어지면

아내가 자살할까 봐 내심 걱정이 되길래

띠포리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사서 채워놓으리라

성모 씨에게 다짐을 하고

그날 이후 35살의 주부 성모 씨의 인생엔

근심 걱정이 없다는데 세상이 아무리 지루해도

띠포리가 있고 띠포리를 사 주겠다는

남편이 있으니 더 이상의 행복은 욕심이라며

자신을 타일러가며 띠포리를 손질한다는데

 

 

 

모자를 쓴 너                                           

 

 그녀는 머리를 뚜껑이라고 부르는 늙은 의사를 만났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뚜껑은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야 합니다 한치의 실수라도 생기면 뚜껑을 닫기가 어렵습니다 틈새가 벌어지면 수술을 하기 전보다 더 엉망이 됩니다 자 이제 뚜껑을 열겠습니다 뚜껑이 열리자 취한 새들이 비틀거리며 날아간다 껍질 벗은 뱀들이 기어코 기어 나온다 지느러미 떨어진 물고기들이 퍼덕거린다 난감해진 늙은 의사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괜히 뚜껑만 열어 봤군요 아무 이상이 없어요 뚜껑 속에는 희고 먹음직스런 뇌수가 가득 있어요 늙은 의사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꿰맨다 마무리로 질긴 탯줄을 한번 더 묶어준다 수술이 끝난 후 그녀는 뚜껑 속으로 스미는 시린 바람 때문에 잠을 설친다 들이치는 빗방울로 인해 출렁거린다 그녀는 깨닫는다 수술은 모든 수술은 후유증을 남긴다 결국 그녀는 뚜껑 위에 또 하나의 단단한 뚜껑을 눌러쓰고 뚜껑이 열린 세월 속을 걸어다닌다 

 

 

 

 

야구처녀의 행복한 죽음                              

 모든 야구는 거대한 야구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야구성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야구모자를 써야 했다. 야구모자는 비쌌고 넌 가난한 야구처녀에 불과했다. 사실 가난한 야구처녀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난하면 야구모자를 쓸 수 없다. 누구도 널 야구처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넌 너만의 야구처녀였을 뿐이다. 너는 늘 야구성 밖을 서성였다.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야구를 상상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어느 날 한 개의 공이 너를 찾아왔다. 넌 그렇게 믿고 있다. 한 번의 타격으로 벽을 넘은 공은 흔치 않았고 가격은 벽 만큼이나 높았다 넌 그런 공을 주어다 팔기 시작했다. 느리긴 했지만 돈이 모여갔다. 야구성을 향한 너의 열망도 서서히 성문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날 너는 마지막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은 그날 따라 너의 두 손을 외면하고 머리로 향했다. 경기가 끝나고 야구모자를 쓴 삶들이 몰려나왔다. 야구아이들이 소리쳤다. 검붉은 피로 엉킨 야구공이다. 처음 보는 야구다. 야구어른들은 야구아이들에게 충고했다. 야구는 몹시 위험한 경기란다. 야구모자를 쓰고 견고한 야구성 안에서 오래된 규칙에 따라 해야 한단다 야구 어른들은 야구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이들의 눈으로부터 너의 미소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비록 야구성 밖이었으나 그토록 사랑하던 야구에게 살해당한 너는 행복했다. 부서진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너는 이제 야구모자 따위는 필요치 않은 너만의 야구성으로 떠났다. 그건 야구성 안에서 경기를 바라만 보던 사람들은 결코 날릴 수 없는 역전의 홈런이었다. 

 

 

 

야구처녀의 고독은 둥글다                                

 

 처음에 너는 고독은 날카로운 그 어떤 거라고 짐작했다 고독 때문에 자주 명치끝이 아팠던 너로선 그럴 만도 했다 나이와 더불어 너는 통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통증을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친구들과 있을 때 넌 너무 말을 많이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 고독이 드러나는 게 싫었던 거다 친구들은 그런 너를 떠났다 가족들은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탄식했다 고독은 자주 너의 귀를 막았다

 고독에 잠긴 널 불편해하지 않는 건 TV뿐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TV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느날 방망이에 맞고 혼자 날아가는 공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채 공기 속을 회전하는 공에서 넌 터질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두터운 장갑 안으로 숨어드는 공에선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을 만났다 그런 게 야구라고 불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넌 왠지 고독이라 부르고 싶었다 야구는 고독이라 불리는 편이 어울린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 너는 야구 중계를 보는 가족들을 보았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야구광인 듯했다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공통관심사를 발견한 넌 몹시 기뻤다 가족들 틈에 슬쩍 끼여들어 야구 얘기를 했다 네가 가장 아끼는 고독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간 공이라고 고백했다 그 공이 그렇게 사라진 건 그만큼 고독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가족들은 사라진 공의 행방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눈앞의 공만 바라보았다 가족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넌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구에 대해 말했다 친구들의 태도는 가족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떤 친구는 숫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그건 야구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본 야구에 대해 떠들었다 너는 그들이 말하는 야구를 본 적이 없었다 넌 친구들을 떠났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야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야구에 잠겨 있을 뿐이라는 것도 이제 너는 고독이 둥글다고 생각한다 이후 고독은 너에게 더이상 통증을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둥근 공처럼 지루할 것이다

 

 

 

 

대머리와의 사랑 2                                    
 

그의 머리카락이 뇌 속으로 자라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그를 보면 대머리라고

낄낄대느라고 바쁠 뿐이다 그는 뇌 속으로 머리카락이

엉켜 폭발 직전인데 빗질조차 할 방법이 없다

어떤 참빗 같은 손이 그의 뇌 속까지 들어올 수 있을까

그는 일단 늙고 노련한 이발사를 찾아간다

늙고 노련한 이발사도 뇌 속까지는 속수무책이다

괜시리 애꿎은 턱수염만 시퍼렇게 밀어버린다

이발소에서 돌아온 밤 그는 머리카락이 가득 찬

뇌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한다 그 밤 그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청했는데 폭발이 일어난다

머리카락을 더 이상 누를 수 없었던 뇌가 그를

배반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엾은 그의 조각난 머리 주변에

몰려들어 그가 대머리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심는다                                                  

 

 꽃씨를 사러 종묘상에 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꽃씨를 주며 속삭였다

이건 매우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입니다 꽃씨를 심기 위해서는 육체 속에 햇

빛이 잘 드는 창문을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너의 육체에 창문을 내기

위해 너의 육체를 살펴보았다 육체의 손상이 적으면서 창문을 내기 쉬운 곳

은 찾기 힘들었다 창문을 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손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너의 온몸을 샅샅이 헤맸다 그 다음날에는 너의 모든 구

멍을 살펴보았다 창문이 되기에는 너무 그늘진 구멍을 읽고 난 후 나는 꽃

씨 심는 것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에게 찾아가 이

매우 아름답고도 향기로운 꽃을 피울 만한 창문을 내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새로운 꽃씨를 부탁했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상점 안의 모든 씨앗을 둘

러본 후 내게 줄 것은 이제 없다고 했다 그 밤 나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므

로 행복한 나를 너의 육체 모든 구멍 속에 심었다 얼마 후 나는 너를 데리고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을 찾아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가 키운 육체

의 깊고 어두운 창문에 대해서 몹시 감탄하는 눈치였다 창문과 종묘상의 모

든 씨앗을 교환하자고 했다 나는 창문과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을 교환하기

를 원했다 거래가 이루어진 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 육체 속에 심어

졌다 도망칠 수 없는 어린 씨앗이 되었다
        

 

 

 

 


 

성미정                                                                                                

 

1967년 강원 정선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 (세계사, 1997)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민음사,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