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인간은 도덕적인가

tlsdkssk 2015. 7. 9. 16:21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지음


니버가 이 책에서 보이고자 한 주요 논지는 대략 네 가지이다. 첫째, 인간이 과연 도덕적인 존재인가, 그리고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와 집단은 과연 도덕적일 수 있는가 질문한 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을지언정, 인간 사회와 집단은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신학적, 정치학적으로 분석한다. 둘째,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논지를 전개한다.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많은 문제를 해결한 것은 사실이나, 이성에 기대어 인간 본성의 문제, 인간집단의 비도덕성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계급적 관점에서 현대 미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분석한 뒤, 계급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불평등과 부정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동시에 프롤레타리아계급에만 기대 문제를 해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방법 역시 궁극적 해결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의 비도덕성으로 귀결되며, 이는 정치세계의 문제와 직결된다. 니버는 계급적 문제 해결이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인간 집단 간의 정치적 갈등을 해결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폭력을 포함한 강제력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강제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의 처절한 현실이며, 이 과정에서 정의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희망이자 한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하나씩 살펴보자. 니버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집단이 만들어가는 사회의 본질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개개의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타인의 이해관계도 고려하며, 때때로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더 고려하기도 한다고 본다. 그만큼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력에 의해 타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공감력을 가질 수 있고, 이성적 능력을 통해 정의에 대한 관념을 습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이해관계가 포함되었더라도 사회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버는 이러한 인간의 개인적 가능성과 별도로 인간으로 구성된 집단의 도덕성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이익의 충돌이 발생할 경우, 집단의 요구와 필요성을 검토해서 협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힘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례라고 생각한다. 이는 인간의 정신과 상상력이 많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동료의 이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만, 집단 간의 경우 정신과 상상력은 한계를 가질 뿐 아니라, 집단 고유의 응집력 때문에 충성심은 오직 자신의 집단으로만 향하게 된다. 니버는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큰 사회집단, 즉 공동체, 계급, 인종, 민족 등은 강력한 충성심을 요구하며, 개인의 이타심과 희생은 자신의 집단으로만 향할 뿐 이를 넘어서기는 어렵다고 본다. 또 집단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은 전체 인류에서 스스로를 더욱 이기적으로 만드는데, 그 속에서 개인은 집단의 의지를 반성하거나 바로잡기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니버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집단의 비도덕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민족국가라고 본다. 민족이란 영토를 바탕으로 한 집단이기 때문에 민족감정과 국가권위에 원천을 둔다. 니버는 민족의 이기성을 여러 사례를 들어 강조한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영국의 에드워드 디시 교수 등 가장 개명된 국가의 인사를 인용하여 모든 국가는 전쟁을 치르고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관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를 예시한다. 니버는 민족과 국가의 이기심이 일반대중의 맹목적인 애국심과 정서, 국가를 지배하는 경제적 지배 계급의 이기심과 합쳐져 더욱 강화된다고 본다. 즉 지배계급은 정부를 장악하고 자신의 이해를 최대한 관철하기 위해 국민의 행동과 정신을 통일시키고, 합리적 지성보다는 감정을 자극하여 집단의 이기심을 키워간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비이기성이 국가의 이기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이는 니버가 지적하는 윤리적 역설로서 애국심을 통해 개인의 희생적인 이타심이 국가의 이기심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이타심, 혹은 사회적 동정심이 점차 확대되면 인류 전체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가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기심을 키워 전체적으로는 평화와 정의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된다. 민족의 발전을 위한 개인의 희망이 전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위한 노력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이러한 역설은 니버가 지적하는 인간의 편향성이자 모순이다.


국가는 국제사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고 선전하지만 니버는 그 핵심이 여전히 국가이익이라고 본다. 니버는 국제관계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위선적 행동에 대한 많은 사례를 드는데 그중 하나가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이다. 니버는 미국의 반제국주의가 사실 위선적인 국가이익 추구였다고 비판하면서 이는 국제관계의 고유한 법칙이라고 논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판적 지식인들이 국가의 권력에의 의지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지적한다.


니버가 두 번째로 주장하는 바는 이러한 인간 집단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성의 힘이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점이다. 니버는 세속적 합리주의 혹은 종교적 자유주의를 모두 비판하는데, 이들은 이성의 힘을 믿는 윤리적 이상주의자로서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림으로써 사회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공통점이 있다. 니버는 이러한 점에서 동시대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가 이끄는 학파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들은 사회생활에서도 과학적 시각과 실험적 방법이 유용하다고 보는데, 사회적 갈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교육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사회의 문제를 자연과학과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회에 대한 탐구가 사회과학으로, 더 나아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들 합리주의자, 사회과학자, 그리고 교육가는 모든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처럼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는데, 역사의 문제가 이성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사회를 갈등과 부정으로 빠트리는 문제의 본질적 이유가 이기심이 아니라 무지라고 보는 것이다. 지식인의 힘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한다.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모순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지식인이지만, 이들의 의견이 실제 사회과정에 반영되리라는 기대는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특히 정치사회는 이익 간의 균형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지식인들의 합리적 담론이 실제 사회를 움직이는 데 어떠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니버가 이성의 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이성이 인간에게 소중한 정신 능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성이 사회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특히 이성은 두 가지 면에서 기여하는데, 첫째, 이성이 사회적 조화를 위해 개인의 욕망에 내적 제한을 가한다는 점, 둘째, 이성이 전체 공동체의 지성적 전망에서 개인의 요구와 주장을 심판하는 점이다. 또한 이성은 불의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명확히 하고 이들을 설득해 권리를 더욱 강력히 주장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의 기능에도 불구하고 니버는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다고 본다. 이성과 충동을 비교해볼 때, 충동은 이성에 근본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고, 집단 간 공동의 지성과 목적은 항상 불완전하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집단은 공동의 충동에 훨씬 강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니버는 충동의 가장 큰 힘이 경제적 계급기반에서 온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디트로이트의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대공황 이후 심화되는 미국 산업사회의 계급적 갈등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다. 니버는 계급분열의 물질적 기초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무시하면서 제3의 힘, 즉 이성과 양심의 힘을 믿는 것은 매우 이상주의적인 사고라고 비판한다.


도덕적 이상주의는 얼핏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그 핵심은 결국 계급적 이익에 봉사하며, 특히 특권적 지배계급의 도덕주의는 전반적인 자기기만과 위선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본다. 니버는 다른 많은 논문을 통해 자동차 산업의 대부 격인 포드의 사회복지정책의 위선성을 줄기차게 비판한다.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많은 돈을 쓰는 것 같지만, 그 핵심은 보다 효과적이고 무리 없는 노동력 착취의 극대화 추구라는 것이다. 그의 합리주의 및 이상주의 비판은 종교에까지 확대된다.


흔히 이성적 윤리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데 반해 종교적 윤리는 사랑을 이상으로 한다. 이성이 평등성과 상호성에 기반을 둔 목표를 추구한다면 종교는 희생에 의한 사랑을 강조한다. 종교는 이와 같이 사랑을 절대화하고 이를 도덕생활의 규범과 이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웃에 대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공감력과 동정심을 강화하고 이에 따라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니버는 이러한 종교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정의로운 사회로의 진화에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은 이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신앙의 전망이 직접적인 공동체를 넘어서 실현되기는 매우 힘들다고 경고한다. 종교적 공동체에서 개인적인 이상은 성취 가능하지만 사회를 넘어 실현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니버는 이성의 힘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힘도 인간의 본성을 넘어 집단 간 관계에 적용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정치적 관계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니버는 합리주의와 사회과학에 고무되어 타협과 조정을 사회정의의 중요한 자원이라 간주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경고한다. 이들은 인간집단 행동의 이기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주의적 사고에 빠지기 때문이다. 니버가 비판하는 이상주의는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니버가 현실주의자로 자리 잡는 데 많은 역할을 한 중요한 사상이다.


이 책의 특징은 이러한 현실주의의 바탕에 계급적 시각이 강하게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세 번째 논지로서 사회문제는 계급문제를 정확히 분석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니버는 현대 산업시대가 과거와는 달리 경제력이 점차 집중되면서 사회 전체가 경제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점에 주목한다. 경제력의 발전은 정치력이나 군사력에 비해 현대사회의 가장 강력한 통제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경제력은 때때로 국가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국가의 제도를 자신의 목적에 복종시킨다. 정치권력은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으나 경제력은 오히려 이전에 비해 무책임해졌다. 정치력은 경제력보다 많은 책임을 지게 되는데, 이는 경제적 지배계급의 주요 이익이 정치과정에 계속 반영되기 때문이다. 니버는 경제적 지배계급이 국가의 경찰과 군대와 같은 정치권력까지 자유롭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익은 국내 정책을 넘어 외교정책에까지 확대된다.


그는 원료와 시장에 대한 산업자본가들의 필요성, 그리고 지구의 후진지역과 미개발 지역의 통치권을 둘러싼 경쟁이 현대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간주한다. 결국 한 사회의 특권계급이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국가 간 분쟁이 야기된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국민들을 희생의 대가로 특권을 공고화한다. 결과는 계급갈등과 국제분쟁의 동시적 발생이다. 니버는 계급적 특권이 근본적 문제이며 현대 사회전체가 국제적 무질서와 국내적 혼란으로 완전히 빠져들기 전에 이러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특권계급은 현실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이를 합리화할 수 있는 사상적, 정치적 기제를 만드는 데에도 만전을 기한다. 니버는 사회의 불평등 상태가 합리적 변호에 의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을 만큼 심화되어 있기 때문에, 특권계급은 온갖 지혜를 짜내어 자신의 특권계급의 이익을 보편적 가치로 보이게끔 교묘한 증거와 논증을 찾아낸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례로 특권계급은 경제력과 정치적 특권을 통해 다양하고 풍부한 교육기회를 얻고 갖가지 능력을 개발하는데, 이러한 결과가 특권계급의 후천적 노력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라는 이념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피억압계급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차단하고 이들 계급의 결함과 무능력이 치유 불가능한 것인 양 주장한다는 것이다. 도덕철학의 왜곡도 마찬가지다. 특권계급은 자신의 도덕성을 과장하여 선전함으로써 사회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지배계급은 19세기 정치경제에서 개인주의, 청교도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근면성 등을 광고하면서 노동계급의 빈곤은 이들의 게으름과 저축심 결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긴다. 니버는 이러한 위선을 파괴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본다. 지배계급은 항상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중시하고 이를 호소하는데, 대부분의 인간은 폭력과 무질서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유지적 철학에 쉽게 속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가장 순수한 평화주의자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이러한 특권계급의 집단적 이기주의는 당파적 경험과 세계관의 산물임을 니버는 지적하고 있다.


니버가 계급갈등을 중요한 분석의 차원으로 논하면서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잠재성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논지와 통하는 것으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모든 역사의 모순을 담지한 보편적 계급으로서 자신의 해방이 곧 역사의 해방인 계급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니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배계급의 위선과 자기정당화, 모순을 가장 예리하게 인식하는 계급이며, 잠재적으로 사회구원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고 본다. 이들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가지는데, 도덕적 냉소주의, 평등적 이상주의, 반항적 영웅주의, 반민족주의, 국제주의 등 혼란을 겪고 있다. 니버는 이러한 다양한 이데올로기 중에서 진정으로 희망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가는 데 우선적 문제가 도덕적 냉소주의라고 본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부르주아적 문화와 정치를 가리는 도덕적 가식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도덕적 냉소주의를 갖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발전을 위한 노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계급이기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들 역시 계급 이기주의와 복수심에 가득 차 있으며, 좌절된 자아에 대한 보상심리를 가질 수 있다. 계급 이기주의는 자신의 계급만을 신비화하여 무산계급의 전략적 중요성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냉소주의를 비판하고 계급이기주의를 넘어 진정한 이상을 추구할 때만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정치적으로 편중된 기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국가 없는 평등사회를 실현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애국심 역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니버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운동 속에서도 문제점을 본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통찰 때문이다. 니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개혁, 혹은 보다 급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기존의 지배계급처럼 자신의 이익을 사회전체의 이익과 동일시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함정에 필연적으로 빠질 것이라고 본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모순이 해결되면 권력을 향한 정치적 갈등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는 계급모순 해결 이후에도 인간의 집단적 이기성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공산사회가 도래하더라도 사회 각 계급 간의 정치적 갈등은 온존할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버가 당시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 핵심세력이라고 보았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정의로운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 고려한 가장 빠르고 급진적인 대안은 혁명이었다. 볼세비키 혁명은 이미 성공했으며 경제공황으로 서구사회에서도 사회주의 대안에 대한 많은 논의가 진전되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에서 혁명세력이 급부상하는 한편,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치즘 세력도 성장일로에 있었다. 정의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혁명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니버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보인다.


폭력이 정의로운 사회 체계를 이루고 이를 보전할 수 있다면 폭력과 혁명을 배제해야 할 윤리적 근거는 없다. 정치가 윤리의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을 고려하여 강제력을 사회단합의 불가피한 수단으로 받아들인다면 비폭력적 강제와 폭력적 강제 간의 구분, 정부의 강제와 혁명세력의 강제를 절대적 기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분을 한다면 그 기준은 결과에 근거해야 한다. 따라서 핵심질문은 폭력을 통해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이다.(Niebuhr, 1932, pp. 179-180)


이러한 기준에 따라 니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한다면 가능한가, 성공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혁명의 성공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성공하더라도 정의사회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니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에서도 분열이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숙련, 비숙련 노동계층의 분열이 두드러진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도덕적 인식을 유지하기 어렵다. 셋째, 자본가 계층이 맹렬하게 반발하며 혁명을 무산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넷째, 사회의 복잡성이 날로 증가하는 데 비해 공산주의가 제시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비전은 이미 너무 단순하다. 다섯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국제주의를 주창하고 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목도한 바와 같이 상당수 프롤레타리아는 애국심의 호소에 넘어갔고, 여전히 민족주의에 취약하다. 즉, 애국주의 등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강고성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니버는 소련과 같은 농업사회나 제3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서구사회에서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니버는 향후의 일을 예측하면서 앞으로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서구 문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여건을 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며, 혁명의 위기가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다만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1차 세계대전과 같이 자본가 계층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자본주의 국가 간 전쟁이 발발하여 무질서가 증가한 가운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환경이 조성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그다지 높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사회정의와 평등을 유지할 가능성에 대해 니버는 더욱 비관적이다. 공산주의 사회도 모든 인간 사회가 가지는 정치적 본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인간 집단은 자신의 사익을 추구할 것이 당연하다. 공산주의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내부 기제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니버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혁명의 발발 가능성에 대해 매우 현실주의적으로 분석했던 레닌조차 혁명 이후 공산주의 사회의 운용방식에 대해서는 낭만적이었다는 것이 니버의 생각이다. 그는 소련의 현실에서 국가가 사라지기는커녕, 관료집단의 정치권력이 강화되는 것은 잠정적 이행상태의 특질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모든 정치사회의 특질이며 이를 공산주의 이론이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지속된 문제의식이 이 책의 네 번째 주제인 정치와 강제력 문제로 이어진다. 니버는 정치사회는 필연적으로 강제력을 통해 지속되며, 강제력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본다. 그리고 강제력은 폭력과 비폭력을 모두 포함하며, 무조건적으로 폭력을 회피하는 것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니버는 정치과정에서 강제력과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 회피경향, 그리고 강제력을 회피하면 선한 정치적 입장이라는 시각을 강하게 비판한다. 흔히 폭력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이며, 악한 의지의 표현이고, 비폭력은 선의의 표현이라 간주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인간 집단 내부는 물론, 특히 인간 집단 간 관계에서 조화와 정의를 정착시키려면 일정 수준의 강제력은 불가피하다. 그는 강제력이 폭력적 강제력인가 혹은 비폭력적 강제력인가, 어떤 것이 더 도덕적인가를 판단하는 것도 각 사안을 경험적으로 판단할 문제이지 선험적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니버는 영국 면화 불매운동을 벌인 간디의 저항운동으로 인해 영국 맨체스터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1차 대전 중 연합국의 봉쇄로 독일 어린이들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인명과 재산을 해치지 않고, 무죄인 사람과 유죄인 사람을 함께 묶어 위험에 빠트리지 않으면서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비폭력적 강제가 간접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직접적이고 가시적이며 무엇보다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니버는 선한 동기는 선한 수단을 사용하며 악한 동기는 악한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그릇된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개인 간 관계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지탱될 수 있어도 인간 집단 간 정치적 관계에서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결국 집단 간 관계에서 정치적 선택은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이라기보다는 다수의 옳은 가치 간의 선택일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과정에서 선험적인 선악을 결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상대적 가치 속에서의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결국 니버는 평화가 항상 힘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본다. 국내정치건 국제정치건 본질상 마찬가지이다. 힘을 가진 계급이 한 나라를 조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건 평화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평화는 강대국 중심으로 이들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하여 형성된다.


사회는 영구적 전쟁상태이고, 역사란 사회통합과 정의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기보다는 부질없는 노력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의 원인은 대체로 강제성의 요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거나 혹은 강제성의 요인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의 문제는 강제력을 축소시키는 문제와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강제력을 파괴하는 문제, 그리고 사회적 통제하에 완전히 둘 수 없는 유형의 강제력을 도덕적으로 자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문제 등이다. 니버는 앞으로의 과제는 강제 없이 완전히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강제력이 가능한 비폭력적인 모습으로 귀결되는 것이라 본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사회내의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타인의 이익을 배려할 수 있지만, 사회는 종종 민족적-계급적-인종적 충동이나 집단적 이기심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미국경제가 공황에 빠지고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려는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자유주의적 사회과학자나 종교가들은 미국사회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버는 이들이 사회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자선의 문제와 경제적 집단사이의 역학관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집단 간의 관계는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적 관계이며 따라서 사회집단 사이에 작용하는 운동의 강제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도덕과 사회-정치적 정의가 양립하는 방향에서 그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니버는 많은 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도움을 준 5권의 책 중 하나로 선정한 바 있다. 또한 아더 슐레진저 2세, 조지 케넌, 맥조지 번디 등 50-60년대 미국정책을 이끌었던 브레인들은 니버를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사망한 NYT기자 제임스 레스턴도 '미국사회가 가진 아이러니를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니버에게 존경심을 표한 바 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예일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디트로이트에서 13년간 목사로 활동했다. 그 후 1928년 유니온신학교의 교수로 초빙된 그는 기독교 윤리학과 실천신학 강의로 명성을 얻었으며 옥스퍼드, 글래스고, 콜럼비아,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국내외 유수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1939년에는 에든버러대학의 기포드 강연에 미국인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초청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주요 저서에 〈인간의 본성과 운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