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만물은 서로 돕는다

tlsdkssk 2015. 5. 11. 12:19

아나키즘을 위한 생물학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 목차 ‖

1. “약육강식의 세계”

2. “만물은 서로 돕는다.”

3. 고대부터 근대까지 : 상호부조의 계보

4. 아나키즘을 위한 역사학

5. 끝나지 않을 연대를 위하여

1. “약육강식의 세계”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비유는

인간의 사회를 설명할 때 종종 사용되는,

특히 이 시대에선 너무도 당연하고 보편적이기에

지루함마저 유발하는 진부한 비유가 된 수사어입니다.

 

사실 이런 문장을 적고 있노라면,

저 역시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뭔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제가 누구나 경쟁을 하고,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 시대에 비(非)인간화 현상이 난립하고,

과도한 경쟁으로 사람들이 도덕을 경외시하는 풍조가 만연한다는 식의 문구들은,

 

이 문구들이 읽히는 사회 자체의 압도적인 위압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경각심들이 무마되기에,

아이들에게 딱히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사회라는 큰 틀로 나아갈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교육 자체부터가

이미 입시라고 하는 적자생존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사회를 두고

경쟁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풍조는

필연적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엮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유명하기에,

여기서 진화론에 대한 긴 설명은 필요치 않으리라고 봅니다.]

 

학문 각 계층의 다윈의 후계자들은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 같은 종(種)내에서

생존수단을 놓고 벌이는 투쟁이 거세게 벌어진다는 논리를,

인간세계에도 똑같이 적용하려 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스펜서(H. Spencer)같은 학자들이

일명 ‘사회진화론’을 역설하면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결과라는 설명을 내놓았죠.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을 정당화시켰고,

 

또한 제국주의에 대한

사상적 맥락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에서

이 시대의 주류인 신자유주의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이

최적의 효율을 뽑아낸다는 식의 신자유주의의 설명은

 

자연스럽게 가장 강력하고 우수한 종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의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또한 ‘자연법칙’이라는 진화론은

그 자체로서 당위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사회의 경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거세해버리기도 합니다.

 

사실 이외에도

생각해볼수록 엮을 점은 많습니다.

 

진화론의 논리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한 과제인데,

 

개체를 국가라고 봤을 때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적의 효율을 뽑아내는 강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이 논리가 신자유주의라고 했을 때,

한 국가의 국민들은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야만 한다는 식의 결론이 성립됩니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국가의 GDP의 증가를 열렬히 선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GDP가

각 국민들에게 어떤 비율로 분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지요.

 

연간 GDP는 자꾸 오르는데,

가난한 사람들 식탁엔 자꾸 라면만 올라가는 아이러닉한 현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부수기 위해서는,

이 현실이 구성되는 요소들이 여러 가지인 만큼

다양한 접근을 요구로 합니다.

 

그 중에서 위에서 살펴본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왜곡된 이해도 큰 축을 담당하는 만큼,

이 시간엔 이 축을 무너뜨리는데 치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진화론의 논리가 진리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논리는 어디까지나 자연계에서 통용되는 논리이지,

 

인위적 질서에 따라 구성되는

인간계에까지 적용되어야할 하등의 논리적 이유는 존재치 않습니다.

 

따라서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은

존재와 당위의 영역에 대한 구분이 벌어지지 않은

논리적 오류라고도 볼 수 있죠.

 

간단히 예를 들어서,

제가 봤을 때 자연계에선 살인과 강간이 참 빈번하고,

여기에 대한 사법절차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이걸 인간계에서도 그대로 적용합니까?

 

자연계에서 보이는 현상에서 도출된 법칙에, 인간은 종속됩니까?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적어도 칸트적 의미에선—인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종의 기원』에서

다윈 본인도 자신의 진화론적 원리를 가지고

 

홉스식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

인간사회를 몰고 가는 결론에 도달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의 유래』라는 저작에서는

아예 “가장 협력을 잘하는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잘 번창하고

가장 많은 수의 자손을 부앙한다.”라고

직접적으로 명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다윈의 후예들은 다윈을 왜곡했습니다.

 

아마도 다윈이 오래 살았다면,

마르크스가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듯,

다윈도 나는 다윈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싶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거나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과연 인간이 자연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선,

항상 회의주의적 시각이 만연해왔기에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 쪽으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이 논리들에게는 비록 거짓일지언정,

직관적 납득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었죠.

 

이런 맥락 속에서 1888년에

토마스 H. 헉슬리라는 사람이 적자생존론에 입각해

 

경쟁논리를 극도로 강조한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2. “만물은 서로 돕는다.”

 동시대, 여기에 반대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련의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이 바로 그 주인공이죠.

 

크로포트킨의 반대는 정말 단순하게 시작합니다.

 

그는 그가 아나키스트로 완전히 전향하기 전

군장교로 시베리아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자신이 관찰한 어떠한 자연적 관찰에서도

적자생존론에 대한 타당한 근거라고 불릴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의아함과 함께 크로프트킨은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학장이자

러시아 내의 저명한 동물학자였던 케슬러(Kessler) 교수의

“상호부조의 법칙에 관하여”라는 강연을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적자생존론에 대한 비판정신에 불이 붙게 됩니다.

매우 다행히도 경쟁은

동물에서도 인간에서도 철칙이 될 수 없다.

 

동물들 사이에서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 제한되고,

자연선택은 그 원리가 발현되기에 더 좋은 분야를 찾게 된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창출된다.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서 가능한 최대한도로 생의 충만함과

 

강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1

 크로포트킨이 근무했던 시베리아는

그 명성만큼이나 혹독한 기후를 자랑하는 지역으로,

이 지역의 동물들은 극단적인 기후와 끊임없이 싸워나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는 이런 기후에서 동물들의 인구수가 일정비율로 유지되는 것은

자연적 경쟁이 아닌

이러한 혹독한 기후 탓이라고 분석하면서,

여기서 동물들 사이에서의 경쟁은 곧 자멸로 이어진다고 봤습니다.

 

동족과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투쟁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익은

서로 협력했을 때 얻게 되는 이익보다 작았고,

 

또한 이러한 경쟁 끝에 얻게 된 이익보다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한 에너지양이 더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경쟁은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입니다.

 물론 크로포트킨은

이러한 이타주의의 기원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이게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의 최대 맹점이죠.

 

[하지만, 여기에 대한 이유는

현대 동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설득력 있게 내놓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맹점이

 크로포트킨의 논의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동물계에서 상호부조가 있는 것은

관찰로 증명된 엄연한 사실이었고,

 

또한 종래 다윈주의에 빠져서

제대로 규명해내지 못했던 동물계의 이타주의적 현상들을 끄집어내어

체계적 서술 안에서 재구성해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크로포트킨의 작업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지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윈주의자들이며, 그대들이 신봉하는 학설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 무수한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크로포트킨이 제시하는 관찰 자료들은

늑대, 소, 말, 조류 그리고 곤충들까지, 그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자연계에서

광범위하게 상호부조의 본능이 이어지고 있음을 주장하지요.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개미들은

진딧물과 공생관계를 맺어서 일종의 가축을 기름으로서 경쟁을 피하고,

 

새들은

철새의 이동이라는 긴 여행을 통해 경쟁을 피합니다.

 

그는 이러한 자료에 힘입어서 아예

“‘동종의 개체와 변종 사이의 가장 극심한 생존경쟁’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단을 살펴보면

다윈이 썼던 다른 모든 저작에서 보이는 풍부한 증거와 사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2

라고 말하면서 다윈이 틀렸다는 과감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오히려 자연은

경쟁을 장려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해나갔다고 주장하지요.3

 이런 의미에서 아래의 두 인용문은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사회생활은

그에 걸맞은 사회적 감정이 발전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특히 집단적인 정의감이

하나의 습성으로 발전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만일 모든 개체들이 지속적으로 개인적인 강점을 남용하는 경우

이 잘못된 행동을 다른 개체들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사회생활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많건 적건 간에

모든 군집성 동물들에게서 정의감이 발달한다.4

현장 동물학자들은

동물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에게 보이는 동정심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동정심이란 사회생활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이다.

 

또한 동정심은

일반적으로 지능이나 감수성이 상당히 진보하고 있다는 뜻이며,

더 높은 수준의 도덕 감정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 첫 걸음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정심이야말로

진화가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강력한 요인이 된다.5

 크로포트킨의 논리를 따라가면

생물들은 좀 더 쾌적한 삶을 위해서 군집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이 군집생활의 목적은 당연히 상호부조입니다.

 

맹수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사냥에 성공하기 위함

또는 혹시 모를 부상에서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 생존율을 올릴 수 있는 이점과 같은 이유들에서

상호부조를 통한 군집생활이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군집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 ‘정의감’과 ‘동정심’이 진화합니다.

 

집단 내에서 상호부조를 위배하고

동료들의 상호부조를 이용하게 개인의 이기심을 챙기는 개체는

상호부조를 위한 신뢰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군집생활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요인이 됩니다.

 

따라서 군집은

이러한 배신자 개체들을 제거하는데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정의감의 기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동정심은

서로를 보살펴주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덕목이고요.

 

이 부분까지 굳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진 않군요.

 

3. 고대부터 근대까지 : 상호부조의 계보

 크로포트킨은 이러한 경향을 인간에게까지 연결시킵니다.

 

우선 야만인 얘기를 하지요.

 

그는 음식 앞에서

호텐토트인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 먹고 싶은 자가 있는지

세 번 큰소리로 외치지 않고 식사하면 수치로 여기는 일이나,

 

미개부족들이 살인을 하게 될 경우

피해자의 양자가 되거나 피해자에게 딸을 보내어 사과를 하는 것,

 

그리고 부족의 생존을 위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으니 이제 물러 갈 때가 됐구나!”]

등의 자료들을 들면서,

 

미개인이나 야만인들을 생존을 위해 무한 경쟁보다는

다수가 살아남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즉, 인간계역시 위에서 든 동물계의 사례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원시사회를 공산사회라고 부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게 됩니다.

 

가령 일명 “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네 등을 긁어줄게”식의 호혜적 이타주의로 원시공산사회가 설명이 가능한데, 이런 사회가 성립했던 수렵채집민의 사회에서 열매를 발견할 확률이나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란 것은 지극히 불규칙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원시인들 중에서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은 그 사냥물은 공동체 전원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죠. 왜? 내일 자신이 사냥에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혹여나 다른 사냥꾼이 사냥에 성공한다면 그 사냥물을 나눠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적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최대한 경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사고방식이 진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처럼 그들에겐 협동만이 살길이었죠.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이런 진실을 외면하는 종래의 인류학적 견해에서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던집니다.

지난 세기에 ‘야만인’과 그들의 ‘자연 상태에서의 삶’은 이상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특히 인간이 동물로부터 기원한다는 생각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야수적’ 특징을 야만인들에게 뒤집어씌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확대해석은 루소가 이상화시킨 것보다 훨씬 더 비과학적이다. 야만인들은 미덕의 전형도 아니지만 ‘포악함’의 전형도 아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혹독한 생존경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형성되고 유지되어 온 한 가지 특성을 지닌다. 즉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종족의 존재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결코 현재와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6

 마찬가지 맥락에서 인류학을 떠나 거의 모든 주류 역사적 견해에 대한 비판도 던져집니다. 여러분들이 배운 역사는 무엇인가요? 보통 왕들의 역사요, 전쟁과 각종 제도가 반포된 것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으로서의 역사일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전쟁이나, 분쟁, 사소한 충돌, 모든 항쟁과 폭력행위 그리고 모든 종류의 개인적인 고통 등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해서 후손들에게 전해주지요—‘잔혹함’에 좀 더 끌리는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역사를 읽고 있노라면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고, 따라서 적자생존을 향한 본능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크로포트킨은 이 견해에 반대합니다. 이런 식의 역사 자체가 전체 모습을 왜곡한 그릇된 편집에 불과하며, 실제 역사는 이런 역사가들이 전해주지 않은, 혹은 주목하지 않은 민중들의 상호지지와 헌신행위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면서요. 실제로 여기에 대해서 고대인들의 풍습에 대한 인류학적 자료나 중세 도시의 길드7나 각종 협업과 같은 상호부조 풍습 또는 르네상스-근대의 코뮌8들과 같은 광범위한 자료들을 덧붙이지요. 단순히 공동노동력을 제공해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원시공산사회와 같은 분배풍습 그리고 일종의 최저생계비 개념의 생활필수품들을 공동으로 구매해서 모두에게 분배하는 등의 조치들까지9, 정말 인류가 유지해온 상부상조의 전통들은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약간씩 모양새를 달리했을 뿐, 그 근본뿌리까지 변하지는 않고 유지되어 왔습니다. 중에선 현대의 협동조합과도 같은 체계를 세운 집단도 있더군요. 놀라웠습니다.

요약하자면 중세 도시를 더욱 깊이 이해할수록 중세 도시가 정치적인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단순한 정치 조직만은 아니었음을 더 잘 알게 된다. 중세 도시란 촌락 공동체보다 훨씬 커다란 규모로 상호원조와 지원, 소비와 생산을 위한 연합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국가라는 속박을 부과하지 않으면서도 예술, 공예, 과학, 상업 그리고 정치 조직에서 각기 독립적 집단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개인들이 완전한 자유를 표출하면서 함께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밀접한 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였다.10

 중에서도 더욱 흥미를 더하는 것은 중세의 도시들이 협업의 전통을 가지고 영주들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내려는 싸움을 벌이고, 또한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자치권을 누리던 시절에 사회전반적인 산업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크로포트킨의 분석입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상호부조의 전통 속에서 사람들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하면서 기술의 진보를 위해 투자하게 되는데—봉건주의 전통에서 지배층에게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발전이라기보다는 피지배층에 대한 완벽한 지배이고, 피지배층들에겐 노동이 자신의 노동이 아닌 영주의 세금을 내기 위함이라는 노동소외로 규정되기에 기술혁신을 위한 동기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것이 바로 중세의 모든 혁신들을 이뤄냈다고 봅니다.

 실제로 자유도시의 몰락과 18세기 초반에 산업이 전반적으로 눈에 띄게 붕괴되는 현상이 맞물린다는 점은 이러한 크로포트킨의 주장에 힘을 실어줍니다.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제임스 와트가 자신의 발명품을 실용화하는 데 20년 이상의 시간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난 세기에 중세의 피렌체나 브뤼헤에서라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환경들, 즉 자신의 발명품을 금속으로 만들고 증기기관에 요구되는 정교한 마무리와 정밀 작업을 할 수 있는 장인들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1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서 이룬 산업의 진보는 모두가 주장하듯이 만인에 대한 개개인의 투쟁 때문이라는 생각은 비가 내리는 원인을 모르면서 진흙으로 만든 우상 앞에서 제물로 바친 희생덕분에 비가 내렸다고 여기는 꼴이다. 서로를 위해 자연을 정복하는 경우처럼 산업 분야에서의 발전을 위해서도 상호부조와 친밀한 교제 등이 늘 그랬듯이 상호투쟁보다 훨씬 더 이익을 준다.12

4. 아나키즘을 위한 역사학

 서두에서도 소개했지만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입니다. 모든 역사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건을 판별하고 또한 거기에 대한 해석을 붙이는 역사가라는 E.H.카의 역사관을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크로포트킨이 아나키스트라는 것은 곧 그의 저작이 아나키즘의 시각으로 적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나키즘이 모든 권위의 철폐를 외쳤고 또한 “아무도 지배하지 않고 또한 아무도 지배당하지 않는다”라는 강령을 따르는 사상이라고 봤을 때, 크로포트킨이 다윈주의에 대한 맹렬한 반대를 한 것은 충분히 아나키즘적 의미를 지닙니다.

 가령 고대 중국의 강력한 국가주의자이자 군주론의 집필자였던 한비자(韓非子)같은 사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수라의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가 이들에게 법(法)을 강제로 부과해서 질서를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보았지요. 그래서 국가는 야만적인 인간을 문명화시키기 위해 필요악으로서, 또한 질서를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대상이 됩니다.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를 살았던 홉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봤을 때, 홉스의 리바이어던도 한비자식 논리를 따라서 절대주의 왕에게 모든 권력을 양도하는 형태를 띠게 되지요.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에 인성론이 크나큰 정치적 함의를 띄었던 만큼, 크로포트킨에게 있어서도 다윈주의는 단순한 과학적 견해를 뛰어넘어 아나키즘을 근본에서부터 거부하는 정치적 공격으로서 다가왔던 것입니다. 만일 자연 상태가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고 한다면, 아나키즘이 말하는 무정부의 상태는 권위와 위계질서가 철폐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아수라의 지옥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생각과는 반대로 만일 자연 상태를 상호부조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면, 아나키즘은 생물학적이고 역사적 의미에서 그 정당성과 설득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선 단순히 생물학적이고 역사학적 자료들을 넘어, 아나키즘적 분석이 이뤄집니다. 중에서도 왜 상호부조 전통을 지녔던 인간이 국가제도 하에 종속되고 마는 지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지요.

미개인들은 천성적으로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군사 지도자들에게 종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무장조합에 참여하는 생활 방식이 농업 공동체에서 토지를 개간하는 일보다 부를 축적하기가 더 쉽다는 것은 명백하다. 무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마타벨레인(남아프리카에 살던 원주민)들을 총으로 쏘아 가축 무리들을 약탈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마타벨레인들은 평화만을 바랄 뿐이고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13

 위에서 적었던 반(反)다윈주의적인 크로포트킨의 견해를 따라가자면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세밀한 언어와 각종 관습과 제도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우수한 군집생활을 일궈낸 대다수의 인간들은 진화론적으로 이타적인 부분이 발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 자체에 대한, 일종의 공격본능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지요. 위 인용문에 적었듯, 이러한 생물학적 진화가 바로 무력을 가진 소수에 의해 다수가 지배당하는 위계질서를 탄생시킨 아이러니가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집단에서 무력을 가진 자가 상호부조의 전통을 자신의 사익으로 왜곡시키려는 시도를 할 때, 여기에 대한 저항을 하는 것을 망설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전쟁상태를 지양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가축이나 철을 제공해주거나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막아준다는 명분으로 농부들을 정착시키고, 그 땅에서 어느 정도 수익이 발생할 시점부터는 영토의 영주로서 농부들을 노예로서 부리는 방법으로도 위계질서와 국가적인 제도들을 발생시켰습니다. 이 방법은 꽤나 효력이 있었는데, 위의 방법이 일방적인 지배이기에 반감을 불러일으킬 요소가 있었던 반면에, 이 방법은 비록 기만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방어’라는 명분이 있기에, 지배당하는 노예에게 자신의 노예 상태가 노예가 아닌 합법적 계약[자신을 생산을 영주는 국방을]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식의 기만적 자기합리화와 자위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합리성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약간의 위안이라도 준다면 알량한 인간은 그 상황에 순응하는 법입니다.

정의란 잘못된 행위를 적절하게 복수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부족 단계에서 발전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제도의 역사를 실로 꿰듯 일관되게 통찰해보면 정의 관념은 왕과 봉건 영주들의 권위가 세워질 때 군사적, 경제적인 원인보다도 훨씬 더 강한 밑바탕이 되었다.14

 위에서 생물학적으로 군집생활을 방해하는 이기적 개체들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그러니까 군집 내에서 불량인자를 골라내는 본능에서 정의감이 발달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정의가 군집에 대해 이기적 잘못을 저질렀다는 복수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인간집단은 이러한 복수를 대리해줄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대리’입니다. 아, 물론 아나키즘적인 생활이나 국가가 아닌 사회만으로 살아가는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인류학적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이들은 ‘대리’할 사람을 상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디언 주민들 전체가 여기에 참여하는—직접민주주의 느낌의—행동양상을 보여주지요.

 그렇다면 왜 ‘대리’하게 되었고, 또한 ‘대리’가 왜 문제인가? 일단 ‘대리’가 벌어진 이유는 종교적이거나 군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원시사회는 종교적 성향을 가득 찬 사회였습니다. 여기서 종교적 제의를 관장하는 신관이나 샤먼들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죠. 간단히 말해서 이들이 타락해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신의 이름으로 정의와 이 정의를 집행할 권력을 독점해버렸던 것이지요. 고대에서 보이는 ‘군장일치’사회의 모습처럼 이런 종교적 지도자가 자연스럽게 왕으로 넘어갔거나, 혹은 군사적 권력을 지닌 왕이 이런 샤먼의 권위를 빼앗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다는 의미에서 민중들은 종교적 의미와 함께 실용적 의미에서도 이러한 위계질서의 형성에 암묵적 동의를 해버렸던 것이고요.

 이런 식으로 발생한 대리는 역사적으로 그 기간이 오래되면서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무력을 독점한 자가 풍기는 공포와 엮이면서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서 왕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리에 납득성을 부과했습니다. 이렇게 일단 정의를 독점한 세력은 정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사익을 챙겼으며, 더욱 기이한 것은 이들의 밑에서 핍박받는 대다수 하층민들은 반란을 통해 이들을 몰아낸 다음에 자신들이 왕좌에 앉는 것이 아닌, 자신들을 통치해줄 ‘어진 왕’을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노예근성이 되어버렸던 것이지요. 청교도 내전에서 승리한 크롬웰이 찰스2세의 목을 잘랐을 때, 이 광경을 본 민중들이 무서워서 도망쳐버렸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그 대가로 영주들은 농민에 대한 권리를 대부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부분적으로만 줄어들었을 뿐이다. 식량공급을 농민들에게 의존해야 했던 시민들은 농민에게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도시와 농촌 사이에는 깊은 균열이 드리워졌다. 어떤 경우에 농민들은 단순히 소유주가 바뀌었을 뿐이고, 도시는 귀족의 권리를 사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팔았다. 농노제는 계속 유지되었고, 훨씬 나중에 13세기 말에 수공업자들의 혁명이 일어나고서야 농노제가 종식되었고, 사적인 예속이 폐지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농노들은 토지를 빼앗겼다. 이러한 정책의 치명적인 결과들이 곧 도시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촌은 도시의 적이 되었다.15

 위에서 외압적인 성격에 의해서 국가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만, 이러한 점에는 공동체 내부적인 원인들도 산재해있었습니다. 충분히 내부를 뒤흔들었을 내부적인 원인이 없었다면 애초에 왕권이나 영주권이라는 외부적인 압제에 의해서 공동체가 박살나는 일도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일단, 내부적인 원인의 첫 번째는, 위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 있듯, 바로 영주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도시가 자신들이 얻게 되는 자치권을 철저하게 도시민에게 한정되어 제공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민들의 도시 길드내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협소한 시각에 대한 맹목은 결론적으론 자신의 자치권을 잃게 되는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경제사학자인 에릭 밀란츠의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에 보면 도시민들이 어떤 식으로 농촌을 져버렸고, 또한 이들을 철저하게 도시에 예속된 지역으로 ‘식민지화’시켰는지에 대한 분석들이 전개됩니다. 크로포트킨은 당대 학문적 자료의 축적량에 비해 에릭 밀란츠처럼 풍부한 자료를 접할 수는 없었지만, 근본적인 아이디어 자체를 에릭 밀란츠와 같은 노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도시민들이 농민들을 도시의 식량이나 노동수요를 공급하는 정도로 식민화시켜버렸다는 아이디어가 바로 그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시민이 아닌 대공이나 왕 혹은 황제와 같은 무력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확보 받을 희망을 걸게 됩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강력한 봉건 소유주들을 분쇄하도록 왕들을 도우면서 강력한 중앙집권화 된 국가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주게 됩니다. 이들은 중앙집권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군주가 단행한 자유 도시들의 수복전쟁에서 도시민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이들 입장에선 자신들을 착취하는 것은 왕이나 도시민이나 매한가지였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도시 내부에서도 원래부터 길드에 속해있었던 세력과 새로이 유입된 세력들 간의 분파가 나뉘어졌고, 기존의 길드는 새롭게 유입된—대개 도시 하층민을 구성했던—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도시 내에서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이 대립의 중재라는 명목으로 왕과 귀족이 자유도시의 자치권을 빼앗았습니다.

이런 내부분열과 함께 몇 백년간 교구 단위를 통해 진행되었던 교육적 부분에서의 세뇌도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청은 왕권신수설의 든든한 승인자가 되어 중앙집권적 사회를 지향했고, 반복적인 설교와 화형, 고문 따위의 잔혹한 수단들을 통해서 대중의 사고방식을 서서히 세뇌해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중들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권력이 아무리 확장되어도, 살인이 아무리 잔인하게 자행되어도 그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16 비판적 정신의 소멸이었죠.

정부를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의제를 개발하지도 못했다. 국가가 밀고 들어와 이들의 마지막 자유를 말살하였다.17

 

5. 끝나지 않을 연대를 위하여

 하지만 크로포트킨의 분석 속에서 상호부조의 전통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국가주의에 의해 계속해서 억압당하면서도 민중들의 연대들은 사라진 적이 없었죠. 특히 사회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크로포트킨의 시대에는 더욱더 그러했습니다. 톨스토이가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능력의 불평등에서 오는 불의와 빈곤을 근절하지 못할 것이다. 가장 강하고 가장 똑똑한 자들이 언제나 더 약하고 더 어리석은 자들을 이용할 것이다. (...) 마르크스의 예언이 이루어진다 해도 일어나게 될 유일한 일은 지속적인 폭정뿐이다. 지금은 자본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이 지배할 것이다.”라면서 당대 사회주의 운동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봤던 것처럼, 크로포트킨 역시 진정한 민중의 연대가 아닌 당의 이익을 위해 변질되고 교조적으로 흘러가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지만, 그럼에도 본래 사회주의가 가지는 핵심적인 아이디어 중 하나인 상호부조적 전통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선을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거창하게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식의 거창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분을 말하지 않아도 상호부조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좀 긴 인용문 하나 인용해보죠.

그러므로 워렌 계곡과 룬드 언덕에서 두 차례의 폭발이 있은 후에 각 위원회의 증언에 따르면 광부들 사이에서 사망한 남자들 가운데 거의 3분의 1 가량이 부인과 자식 이외에도 친척들을 부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림솔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부자들이나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뭐가 다른지를 생각해보라.” 노동자들이 동료의 미망인을 돕기 위해 기부하는 1실링이나 동료 노동자가 장례식에 들어가는 추가비용을 도와주려고 내는 6펜스가 일주일에 16실링을 벌어 어떤 경우에 아내와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이러한 기부 행위는 전세계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나는 죽음보다도 훨씬 더 일상적인 경우로서 흔하게 실천되고 있다. 한편 일할 때 서로 도와주는 행위는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가장 비일비재하다.18

 

 우리네시대도 연대는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만 마칩니다. 총총.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


 

 

 

 

메모한 구절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어떤 시기에도 전쟁이 정상적인 상태인 적은 없었다. 무사들이 서로 죽이고, 성직자들이 이러한 대학살을 찬양하는 동안에 대중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노역을 수행해 나갔다. p149-150

-인간 심리에는 동기가 있다.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호소를 듣고 이에 응답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영웅들은 행동한다. 모든 사람들은 영웅들이 할 일은 자신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라는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고 인류가 나타나기 전 수십만 년 동안의 군거 생활 속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 p323

-더욱이 다른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는 상호부조와 동정심이라는 인간적 감정에 폭넓게 호소했지만, 기독교 교회는 국가와 손을 잡고 상호부조와 상호지원 제도를 파괴하였다. 당연히 이 제도들은 교회가 있기 전에도 있었고 교회 밖에서도 항구적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모든 야만인들이 자신들의 동족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던 상호부조 대신에 교회는 자비를 설교하였다. 자비란 하늘로부터 감화를 받는다는 성격을 지니고 그에 따라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우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와 더불어 단지 인간적인 행동을 하면서 자신들을 선택받은 단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의도는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상당수의 종교적인 자선 단체를 상호부조와 똑같은 경향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다. p329

-이런 식으로 취급되는 모든 잘못이 전적으로 인간 본성의 범죄성 탓으로 돌려져서도 안 된다. 아주 최근까지도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을 불신하고 경멸하거나 증오하도록 가르친 것은 과학자들과 심지어 일부 유명한 성직자가 아니었던가? 농노제가 폐지된 이후로 스스로 결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가난해질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은 과학이 아니었던가? 교회에서 아동 살해범을 비난할 용기를 가진 자는 극히 소수였지만,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흑인들의 노예 상태까지도 신이 계획한 일부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대체로 비국교도란 그 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가혹하게 취급하는 국교회에 맞선 대중들의 저항이 아니었던가? p336-337

-요약하자면,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서 만들어낸 상호증오와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연대감이란 앞선 진화과정 속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p338

-항상 신권정치나 동방의 전제국가에서 또는 로마 제국이 쇠락하면서 상호부조 원리가 몰락하고 있을 시대에 수시로 생겨나는 새로운 종교들, 이러한 새로운 종교에서도 똑같은 원리를 재확인할 뿐이다.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낮고 학대받는 계층에 속한 비천한 사람들이 맨 먼저 신흥 종교를 지지한다. 그러한 사회 계층에서는 상호부조의 원리야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근간이 된다. 초기 불교와 기독교 공동체 그리고 모라비아 교도들은 새로운 연대의 형태를 채택했는데, 그 특징을 들자면 상호부조가 가장 바람직한 양상으로 나타났던 초기 종족 생활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p347-348

 

-“라이프니츠와 낙관주의가 바보스럽지만 유쾌한 꿈이라면,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그 불쾌함 때문에 더욱더 바보스러운 악몽이다. 유쾌하지 않은 오류란 실로 최악의 잘못이다.” -토머스 H.헉슬리 p377

 

추천도서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 에릭 밀란츠

저주받은 아나키즘 / 엠마 골드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피에르 클라스트르

촘스키의 아나키즘 / 노암 촘스키

미하일 바쿠닌 / 에드워드 카​


 

  1.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105
  2.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91
  3.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항상 그 종에 치명적이고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다!” 이 말이야말로 항상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지만 자연에 항상 존재하는 경향이다. -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106
  4.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88
  5.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90
  6.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146
  7. 길드 제도는 인간 본성이 지닌 아주 뿌리 깊은 욕구를 충족시켜주었고 이후에 국가가 관료나 경찰 제도를 통해 독점하였던 모든 기능을 구현하였다. 어쩌면 그 이상일수도 있다. 길드는 모든 상황마다 그리고 살면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행동과 충고’를 통해 서로 도와주는 단체였고,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국가 간섭의 근본적인 특징인 형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모든 경우에 인간적이고 형제애적인 요소가 채택된다는 점에서 길드는 국가 조직과는 다르다. 길드 법정에 출석하는 경우에도 길드의 조합원은 자신을 잘 알고 있고 일과나 공동식사, 조합원의 의무를 수행했던 사람들 옆에 서서 진술을 했다. 즉 법률가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정에 출두한 자신과 동등하고 같은 조합원 자격인 사람들 앞에서 진술했던 것이다. -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216
  8. 자치 사법권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었고, 이는 곧 자치 경영을 의미했다. 그러나 코뮌은 단순히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일부는 아니었고 본질적으로 국가 그 자체였다. 코뮌은 이웃들과 전쟁이나 평화를 맺을 권리, 연합이나 동맹을 체결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코뮌은 자신의 일을 처리할 때 자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외부 세력의 유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219
  9.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223-224
  10.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226
  11.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347
  12.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347
  13.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194
  14.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196
  15.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245-246
  16.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264
  17.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266
  18. 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역, 르네상스, 2005년, p335-336
출처 : 진리에 이르는 길
글쓴이 : 知友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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