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tlsdkssk 2015. 3. 4. 14:23

얼마 전 필리핀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한 소녀가 다가가서 울먹이며 물었다. "왜 신은 죄 없는 어린이들이 버려지고 마약과 매춘에 희생되는 일이 생기게 놔두시죠?" 그러자 교황은 "우리가 울 수 있을 때에 겨우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한다. 우리가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기쁘고 행복해야 하는 행복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슬퍼하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 양태로 인식한다. 하지만 웃음에는 가식적 웃음, 비웃음, 쓴웃음과 같은 여러 웃음이 있지만, 정화된 채 흐르는 눈물은 순수하다. 
 
해 질 녘 노을 구름 사이로 번지는 오묘한 풍경들이 아름답고 슬퍼, 눈가가 저절로 촉촉해질 때 가끔 꺼내는 음악이 있다. 지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알려진 비탈리 '샤콘'이다. 느슨함과 팽팽함 사이, 천상과 지상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절묘한 변주는 둔해진 몸속 세포들을 짜릿하게 적셔 주는 마력이 있다. 바흐 '샤콘'이 절제된 슬픔을 조율하는 것이라면, 비탈리 '샤콘'은 날것을 그대로 토해 내는 느낌을 준다. 하이페츠와 장영주를 포함한 내로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연주는 독특한 해석을 가한다. 어떤 지인은 '샤콘'의 절정 부분에 이르러서는 술 한 잔도 걸치지 않았는데도 참았던 눈물을 결국 흘렸다고 한다. 
 

영국의 월터 랭글리의 `슬픔은 끝이 없고`.
'샤콘' 반응도 제각각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샤콘'은 슬픔이 안겨 주는 정화된 '빔[空]의 공간'인 것 같다. 즐거움과 만족이 내달리는 전진적 감정이라면, 슬픔과 결핍은 시인 랭보처럼 구멍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은 채 거닐며 침잠하는 상태일 것이다. 허기를 느껴 봐야 배가 부른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듯이, 슬픔을 건너온 깊은 내면의 사람만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법이다. 헤세도 '향연이 끝난 후'에서 '눈을 감는 작은 위안마저 없다면 다시는 눈 뜨고 싶지 않으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거칠고 험한 공격에 직면해 어떻게 할 방법도, 할 말도 없는 사람에게는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위안이 남아 있다. 스스로의 존재를 액화시켜 버린 허허로운 상태에서 적절한 위안과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비탈리 '샤콘'의 사회학적 의미는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체력을 길러 타인과 공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일 것이다. 

[

'살며 사랑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박완서, 박경리 선생 추모사  (0) 2015.03.14
어린왕자  (0) 2015.03.14
카스트루초  (0) 2015.02.18
[스크랩] 깊은 강 - 엔도 슈샤쿠  (0) 2015.02.07
엔도 슈샤쿠/깊은 강  (0) 201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