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얼마?

tlsdkssk 2015. 1. 20. 07:56

[할머니 육아노동] 안 봐줄 수도.. 안 드릴 수도.. 손주 돌봄 '대가 딜레마'

가족끼리 ‘가격’ 매길 수 밖에 없는 슬픈 현실 국민일보 | 문수정 박세환 기자 | 입력 2015.01.20 00:37

"아이는 누가 봐줘요?" 아들 백일잔치도 못하고 출산휴가 3개월 만에 복직한 이현정(33·여)씨는 직장동료들에게 인사말처럼 이런 질문을 들었다. 친정엄마라고 답하면 "얼마나 드리느냐"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얼마를 드려야 할까요"라고 되묻자 숱한 경험담과 목격담이 쏟아졌다. 이씨는 "참고할 만한 공식적 기준이 없다보니 주변 반응에 따라 내가 악덕 고용주가 되기도, 엄마가 욕심 많은 부모가 되기도 한다"며 "엄마에게 양육비 드리는 게 개인적인 일을 넘어서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할머니가 손주를 돌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씨 모녀처럼 육아를 놓고 부모자식 간에 돈이 오가는 건 오래되지 않았다.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 진출에서 시작된 '보육 공백'이 심각한 저출산·고령화와 맞물리면서 '돈'이 끼어들게 됐다. 대가족 틀에선 자연스러웠던 할머니의 손주 육아가 암묵적인 '고용·피고용' 관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할머니 육아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경우 어느 정도면 적정할까.

할머니 육아노동 가치는

회원 125만여명의 국내 최대 임신·출산·육아 인터넷 커뮤니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시어머니·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면 얼마를 드리느냐'다.

사연은 제각각인데 의견은 비슷하다. 어림잡은 평균 액수는 월 100만원쯤 된다. 주 5일 12시간 정도 맡기는 경우 그렇다. 야근이 잦거나 사는 곳이 멀어 주 5일 24시간 맡겨야 하면 150만원 이상 드리는 사람이 많다. 아이가 둘이면 더 많아진다. 어린이집에 6∼8시간 보내고 나머지 공백 시간만 돌봐주면 60만∼80만원대로 떨어진다. 인터넷에는 이렇게 일종의 '시세'가 형성돼 있다.

이에 대해 한 육아 전문가는 19일 "여성가족부의 아이돌보미 시급 6000원에 준하는 가격으로 보인다. 얼핏 합리적인 기준 같은데, 이 가격이 적정한 것이냐고 물으면 '글쎄'다. 가족관계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이 개입된다. 시급 외에 다른 요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펴낸 보고서 '2012년 전국 보육 실태 조사'를 보면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긴 맞벌이 부부의 절반(53.7%) 이상은 비용을 지불한다고 답했다. 평균 금액은 33만600원으로 인터넷 시세와 차이가 컸다. 이 조사는 월 소득 100만원 이하부터 700만원 이상까지 다양한 소득계층이 응답한 것이고, 정기적이 아닌 '용돈' 개념으로 드리는 경우도 포함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시세'가 낳은 서글픈 풍경

시세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사례도 있었다. 이모(30·여)씨는 6개월 육아휴직 뒤 다음달 복직이 예정돼 있었다. 아이를 봐주기로 한 시어머니는 양육비로 월 100만원 정도를 원했다. 3년 전 시조카를 80만원에 돌봐줬던 터다. 시어머니도 월 80만원 직장이 있어서 그만두고 애 봐 달라 하려면 그 정도는 맞춰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씨는 "월급 200만원에서 양육비, 차비, 밥값, 용돈 쓰고 나면 남는 돈은 거의 없다. 믿고 맡길 어린이집은 못 찾겠고, 시어머니에게 맡기는 것도 비용 부담이 만만찮아 육아에 전념키로 했다. '남들 하는 만큼' 말고 적당한 금액 기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변의 간섭에 '적정 가격'을 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모(32·여)씨는 36개월, 12개월 된 두 아이 모두 백일 때부터 봐주고 있는 친정엄마께 월 120만원을 드린다. 그는 "형편껏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스트레스를 준다. 내가 잘못하는 건지 견줘볼 근거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래도 엄마는 '지금도 충분히 많이 준다. 일도 하고 애도 키우느라 우리 딸 애쓴다'고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내 월급으론 생활비와 양육비도 빠듯해 일하는 시간 동안 애 봐 주는 엄마께 한푼도 못 드려 속상하다"는 싱글맘도 있고, "친정엄마 살림이 우리보다는 넉넉하다보니 엄마가 아이 용돈 줘 가며 공짜로 봐줘서 죄송하다"는 경우도 있었다.

고령화시대 정책적 고민 필요

고용·피고용 관계가 불편한 사람들도 있다. 자식에게 용돈 받는 건 기쁘지만 대가로 받는 돈은 껄끄럽다는 것이다. 15개월 된 손녀를 봐주고 월 50만원씩 받는 양모(64·여)씨는 "내 나이에 어디 나가서 돈 벌기도 쉽지 않다. 내가 넉넉하면 돈 줘가며 봐주고 싶은데 못 그러니까 속상하다. 자식 돈 받는 게 자존심 상하고 서글픈 일"이라고 말했다.

신윤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모와 자식 관계에 적절한 가격을 매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너무 시장화되는 게 안타깝기도 하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의 유대에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는 건 한국사회에서 이미 현실이 된 만큼 이에 대한 정책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할머니의 손주 육아에 돈이 개입된 데는 노인들의 부족한 노후대책 문제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여성 노인의 노후빈곤 현황 및 대응정책'을 보면 65세 이상 여성의 월평균 근로·사업 소득은 2012년 기준 50만7216원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런 평균 소득도 참고할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적정 금액'을 선뜻 답하지 못했다. 진미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할머니 육아노동이 본격적인 '직업'은 아니어서 가격을 정하는 사정이 저마다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이를 맡아줄 부모가 노후 준비를 못하는 상황, 할머니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