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동거

tlsdkssk 2014. 9. 27. 05:10

동거가 알콩달콩한 일상의 연속일 거라는 생각은 환상일까? 내 것 네 것을 너무 가르면 치사해지고, 가리지 않고 공유하다 보면 지리멸렬해지는 동거의 양면, 동거 커플들의 실제 사례를 모아 흑과 백을 살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 전제되지 않은 동거는 여전히 위험하기도, 왠지 남들에겐 알리기 껄끄럽고 음험하기도 하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은 구시대의 유물과 같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결혼 적령기를 스스로 감지하고 은근한 압박을 받는다. 철없던 청춘기를 살짝 지난 만큼 신중한 동거를 결정한 이들에게 "같이 사니까 좋아?" 의도적으로 편하게 물었다. 우문에 현답, 각양각색 답들이 쏟아졌는데, 거기엔 '같이 사는 것'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얽혀 있었다. 서른부터 2년 반째 동거 중인 31세 여자 H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살아 보고 결혼하라'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살아보니 별로라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판단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동거 내내 '그는 나와 결혼할 정도로 확신이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각자의 이름으로 된 재산세 고지서, 건강보험확인서 같은 게 날아올 때마다 '법적으론 아무 사이도 아님'을 끊임없이 확인받는 것 같아 씁쓸하고 괴로웠다. 다른 주제로 싸워도 결국 결혼 문제를 건드리는 게 지겹기도 했다.

동거하기 전후를 비교해 보면, 남자의 단점은 그대로 단점이고 싸우는 이유도 그대로였다. 굳이 살아봤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 서로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게 되는 건 사실이나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란 생각도 들었다. 결혼을 결정한 후 마음이 바다처럼 평온해진 여자는 동거 기간이 길었던 것을 조금 후회한다. 동거가 결혼을 결정하기 전의 테스트 역할을 할까? 결혼이 싫어서 동거를 선택한 사람의 말은 달랐다.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상처를 받아 비혼주의자가 된 30세 여자 K는 지금까지 3명의 동거남이 있었다. 한 명은 결혼을 원해서 헤어졌고, 한 명은 결혼을 원하지 않는 여자를 마치 자유연애주의자, 나아가 프리섹스주의자 대하듯 해서 헤어졌고, 나머지 한 명인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이혼남이다. 그 역시 비혼주의자고, 동거한 지 1년째 접어들지만 결혼은 일종의 금기어다. 그녀는 외국처럼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하며 아이를 키우는 경우는 한국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결혼을 거부하는 게 제도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게 슬프다고 했다. 과격하게 말해 '법적 불가촉천민' 아니면 '가족부적응자'로 분류되는 기분이 서글프다고도 했다.

합법적 동거, 결혼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주위 사람이나 부모에게 알리지 못하는 건 동거 커플 모두가 안고 가는 문제다. 교포인 34세 남자 L은 미국에서 만난 여자와 한국에서 8개월째 동거 중이다. 둘 다 집이 미국에 있어 연애가 자연스럽게 동거로 이어졌는데, 부모에게 근황을 전할 때마다 점점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고 여자의 부모가 한국에 오기로 했을 때 동거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부모 세대가 완전히 이해해 줄 거란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오랜 갈등의 시간 후 부모들이 일종의 '포기'를 선언하면서 우회적인 허락을 받았다. 그는 마음이 홀가분하긴 해도,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면 알리지 않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남의 일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 동거 사실을 쉬쉬하며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신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어른'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경제적 부담을 나눈다는 차원에서 동거를 선택한 커플은 결혼 이상으로 민감한 게 돈 문제라고 말했다. 함께 살던 친구가 독립하는 바람에 큰 평수 아파트 월세를 혼자 내는 게 버거워 룸메이트 개념으로 남자친구와 집을 합친 33세 여자 P. 연애 기간이 길지 않았기에 월세도 반반, 방도 따로따로 쓰는 조건으로 동의를 구했다. 귀가 시간이나 개인적인 저녁 약속을 최대한 터치하지 않는 것도 사전에 합의했다. 돈 얘기는 처음 동거를 시작할 때 대략의 룰을 정한 후, 살면서 거의 불문율처럼 최대한 덜 하는 게 P가 다년간의 룸메이트 생활 노하우로 체득한 결과다.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할수록, 덜 싸우고 덜 서운하다는 게 지론. 함께 산 지 1년 2개월이 돼가는 지금까지도 마음속으로 최대한 룸메이트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거를 결정하고 집을 새로 구한 게 아니라, 원래 살던 집에 애인이 이사를 들어오는 경우 또는 경제적으로 둘 중 한 사람이 부담하는 돈이 너무 큰 경우 종종 속이 부글부글 끓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자로부터 제안을 받고 5개월 정도 동거한 33세 여자 O는 최근 자발적으로 동거를 끝냈다. 남자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니까 집의 구조나 물건의 위치 등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 계속 남의 집에 초대받은 기분에 불편하기도 했고, 생활수준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O는 남자의 귀가가 자신보다 늦을 경우, 그의 주방에서 요리를 해야 하는지 늘 갈등했던 기억을 꺼낸다. 동거를 끝내고 원래 살던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고.

한편 여자가 살던 집에 남자가 들어온 케이스도 있다. 27세 여자 H는 한 남자와 6년간 동거했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며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같이 살다가 헤어질 땐 흔한 이별 통보보다 타격이 훨씬 컸다. 남자가 들고 나간 물건을 다시 살 때 고통스럽기도 했고, 누가 있다가 없는 자리가 공허해서 늘 TV를 틀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다시 남자가 들어왔을 땐 그새 혼자의 삶에 적응해 그가 군식구처럼 느껴져 불편했다.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가 방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느껴져 왠지 미덥지도 않았다. 동거 기간이 길어지자 관계가 느슨해지면서, 남자가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손님인 척하는 것 같아' 짜증났고, 집안일을 열심히 해도 '자기 집인 척하는 것 같아' 짜증났다. 이 모든 문제가 동거 때문에 커진 것 같고, 만약 동거하지 않았더라면 나쁘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한다.

물론 동거를 둘러싼 문제들을 걷어내고 본질적인 장점, '같이 사는 즐거움'에 만족하는 게 돈 따위로는 바꿀 수 없는 동거의 보석 같은 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연애 4년 반, 동거 1년째인 33세 남자 P는 어차피 각자 외롭게 살 거라면 서로 의지가 되는 게 좋다는 결론 끝에 동거를 시작했다. 둘 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 기간이 길었다. 집에서 밥 한 끼 안 먹고 냉장고엔 생수와 배달 음식뿐이던 삶에서, 굳이 데이트 거리를 찾아 밖을 전전하지 않고 집밥을 차려 먹거나 밤늦게까지 TV를 보며 가볍게 맥주를 즐기는 삶으로 바뀌면서, 소소한 일상의 힘을 느낀다. 여자가 냉장고에 "우유 오늘 지나면 상함. 안 먹으면 버려"라는 쪽지를 붙여놓은 걸 퇴근 후 보게 됐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받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고 한다.

직장 바로 앞 비싼 월세를 내는 오피스텔 대신 남자친구와(만약 결혼한다면 살고 싶었던 동네에) 작은 아파트를 전세로 얻은 29세 여자 S는 동거 5개월째에 접어든다. 동거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모텔 가는 게 너무 지겨워서'도 포함된다. 정말로 쉴 곳이 필요할 때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인데, 사람 많은 데가 싫다는 이유로 시뻘건 불이 켜진 모텔에 무거운 발을 들어올리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가 으슥한 카운터를 지나는 게 너무 싫었다. 더불어 모텔에 왔기 때문에 의무 방어처럼 섹스를 하는 것도 싫었다. 함께 살면서 오히려 섹스 횟수는 약간 줄었고(!), 자질구레할지도 모르지만 여자에겐 소중한 생활형 대화가 늘었다는 것이 그녀의 변화다. 그러나 동거 전에 무조건 걱정부터 해댈 필요는 없다. 살아보니 의외로 너무 안 맞는다면, 지나치게 얽히고설키기 전에 과감하게 정리하면 되는 것.

34세의 남자 K는 3개월의 동거 경험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특별히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어도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탓에 집에 나만의 룰대로 정리된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못 견디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데이트할 때 보는 여자의 모습과는 달리, 집이라는 내밀한 공간에서 하는 행동이나 여러 가지 생활습관을 밀착 관찰하면서 서로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았다. 결국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 지 2개월 후에 둘은 결별했지만 그는 동거가 자신에겐 잘 맞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이란 걸 배웠고, 얼굴만 보고 여자를 사귀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뭐든 배웠으면 됐어." 동거 후유증에 시달리던 H의 엄마가 H에게 한 말이란다. 동거를 통해 진짜로 자립하는 법 또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나 아닌 누군가와 베개 위치부터 욕실 세정제까지 모든 것을 조율하는 일은 동거가 지속되든 깨어지든 당사자에겐 뼈와 살이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절대 내 취향이 아닌 베개 커버를 씌우는 일, 피곤해 쓰러질 것 같아도 욕실 바닥에 낀 내 머리카락을 건져 올리는 일을 감수할 마음의 준비는 하고 동거를 시작하라는 것이라는 현실적 조언이다. 커플 컵에 커피를 내려 함께 마시며, 헤어지기 싫어서 한 이불 속에서 밤새 까르륵거리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 클리셰처럼 깨가 쏟아지는 장면만이 동거의 전부는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고민하고, 노력하고, 진지하고, 책임질수록 동거의 이상적이고 알콩달콩한 일상이 매일 찾아올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