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사르트르와 보봐르

tlsdkssk 2014. 9. 4. 10:55

사르트르 같은 배꼽 밑이 개차반인 스승 밑에서 우째 이런 제자가 나왔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사르트르만 그랬든게 아니고 그의 천재아내 보봐르도 참 자유 분방했다.

앙드레 고르의 순애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름도 뜨아한 <계약결혼>이란걸 했으니 굳이 서로 외도를 즐겼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사르트르는 보봐르를 유혹할때 아예 처음부터 자기의 섹스철학을 선언했다.

많은 여성과 자고 싶다고. 흔히 <여행 多妻 비밀이 없는것> 세가지가 사르트르의

인생 원칙으로 알려졌는데 다처와 비밀이 없는거는 다 性과 연관있는 조건들.

사르트르는 아예 <중심>과 <주변>을 설정했고 보봐르를 이해 시켰다.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파리 고등사범 동기. 이학교는 파리의 <附高>다.

프랑스 안에서 수많은 사상가와 학자를 배출한 진짜<천하>다.

그러니까 보봐르를 중심에 두고 외식(?)을 즐기시겠다고.

그래서 보봐르 인생은 사르트르에게 애인 대리처 요리사 메네저 보디가드

그리고 간호부로 기능 하면서도 경제적 법적으로 사르트르 인생속에 이렇다할

대접을 받은바는 없다. 보봐르는 사르트르와 첫대면에서 부터 知的 가위에 눌려

평생 그의 노예(?)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1949년 현대 최초 여성해방선언인 <제2의 性>을 썼으니...

"사람은 여자로 태어 나지 않는다. 여자로 만들어 지는것이다." 이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의식적으로 반영한 소리지만.

 

157Cm키에 사팔뜨기인 사르트르에게 왠 여자들이 그렇게 많이 꼬여들었는지.

문학사에 이름을 요란하게 남긴 여인만 10여명 이다.

올라 코나키에비츠 처럼 보봐르의 제자도 있고(문학사가들은 보봐르가 뚜쟁이 노릇 했다고 본다)

그 동생 올라 봔다도 있고. 보봐르도 여자니까 어느때는 질투가 나 자기제자 올라를 소설

<초대받은 여자>에 등장시켜 죽여 버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떡하니 자서전에다가 "이런 선택을 만들어낸 사르트르와 올라에게 분노를 느낀다"고 써 놓았다.

 

하도 사르트르 노는게 눈꼴이 시니까 문학비평가 르베르 프랑시스는 사르트르의 소설

<출구없는 방> 비평에서 "우리모두 사르트르를 알고 있다. 그는 자기 제자의 속옷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변태적 대학자"라고 썼다.

 

프랑스에서는 좀처럼 남의 배꼽 밑은 잘 따지지않는 사회인데도 사르트르의 병통은 다른 여인과의

정사를 보봐르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친절이 괴이했다. 보봐르와 부부로 육체관계는 이미

1943년인가 마감했고 1950년대 말에 들어서면 사르트르 영감은 정력도 좋게 한꺼번에 4명의 애인과

섹스를 즐긴다. 미셸, 아르레트, 이브렁, 봔다등 그중 아르레트를 보봐르가 가장 미워 했다.

 

사르트르가 얼마나 사깃꾼인가는 <변증법적 이성비판 1960>이란 책을 펴내면서 "보봐르에게 바친다"라고

헌사를 써놓고 딱2부만 출판사 갈리마르에 이야기 하여 "봔다에게 바친다"로 바꿔 애인 봔다에게 갖다 주었다.

 

그런데 보봐르란 여자도 사르트르 못지 않다.

작가 아더 쾨슬틀러와 넬슨 알그렌과 질펀한 정사를 즐기고 사르트르에게 가서 자랑을 했더니

이 영감이 코웃음만 치더라고 <레 망다랭Les Mandarins>에 써놓았다. 미국 소설가 넬슨 알그렌은

보봐르와 연애한번 잘못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레 망다랭>에서는 보봐르가 넬슨과의 정사를

익명으로 처리해 주었는데 두번째 자서전 <여자의 한창때>에서는 '넬슨'이란 실명을 밝히는것은 물론

넬슨이 보낸 연애편지까지 책에 다 실었다.

기자들이 들여 닦쳐 확인 하자 "세상곳곳의 매춘가를 가 보았지만 그여자들은 그래도 반듯이

문을 닫는 예의가 있었는데 이 여자 보봐르는 문을 활짝 열어 졏혀놓는 개망나니"라고 비난하고

그날 밤 분노를 못이겨 심장마비로 죽었다.

 

또 보봐르는 동성연애 상대 <나타리 소로킨>부모로 부터 제소를 당해 대학 교수직도 잃고

교수면허도 취소 당했다.

 

분명 Esso가 이처럼 순애를 기린 앙드레 고르는 1980년 사르트르의 영구를 뒤 따라 몽파르나스

묘지로 향했던 5만의 문상객 중의 하나였으리라.

Esso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밑에 이런 지저분한 글을 달기가 미안해 Re로 뺐다.

 

지난겨울 나는 빗속에 사르트르 보봐르 묘를 몽파르나스 묘지로 찿아가 참배했다.

내 不文學 50년을 되돌아 결산하는 거금을 들인 여정 이었는데 미국에 와 손녀와 놀다가 보니

시간을 놓쳐 아직 글쓰는걸 착수도 못했다.

제삼 이글을 읽는 동문들께 미안하다고 말한다. 너무 배꼽밑 이야기를 지껄여.

그건 분명 신사가 할 이야기는 못된다.

자 이제 수년전 사다놓고 쳐밖아둔 보봐르의 <老年>이나 읽어야 겠다.

 

Sep 5 2009

안양 씨야

출처 : 구인회(Internet Nine)
글쓴이 : ecki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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