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갈대 등본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틈 태풍의 진로를 거스르는 적도의 안개 낀 바다나 계곡의 경사를
새들의 페루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은 봉지들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산수유꽃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다비식
바위 위에 바위보다 한 발은 더 바다로 나가 석양볕에 늙은 뼈를 태우는 해송을 본다
서해 변산
가지 저 끝에 타올랐으니 그래서 어두웠으니
날마다, 그러나 파도 끝 붉게 젖는 때
또 한 줄 바람을 긋고 갈라지는 채석강
신용목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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