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스크랩]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tlsdkssk 2014. 8. 7. 09:13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시집『눈물이 시킨 일』(시와시학, 2011)

...........................................................................

 

 경전은 우리들 삶의 지표가 될 불변의 절대적 문서나 문장을 일컫는다. 그 경전을 거룩하고 성스럽게 받들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과 이해가 선행되어야함은 물론이다.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 뜻을 깊이 음미하면서 또박또박 읽어가다 보면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하는 불온한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채 여물기 전에 생기는 인간의 나약하고 조급한 습성이다.

 

 ‘세상천지의 시작은 바로 오늘’이라고 순자가 말했던가. 과연 내가 읽고 있는 경전이 오늘에 합당하고 유익한 것일까에 의문의 도화선이 닿는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우리들 삶의 부박함이 경전을 얼마나 더 인내하며 붙들고 있을지.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도,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도 다 오늘의 소소한 시작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일지니. 하루하루 타박타박 걷는 길로 생은 열리고 있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하였지만 수시로 길 아닌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이 시인에겐 눈물의 길, 사랑의 길 그리고 시의 길이었다. 그래서 갓길과 뒷길조차 때로 환할 수 있었다. 눈물과 사랑이 시킨 일은 시인의 ‘소중한 신념이자 고집’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전은 완결이 아니라 매순간을 잇는 미완의 종결어미였다.

 

 이렇듯 시인에게 경전이란 자기 스스로 닦아 나가는 길이라 한다면, 정치인과 공무원에게 있어 경전은 헌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빼거나 박거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성질의 경전이 아니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1항 과 2항의 정신만 잘 숙지하고 지킨다 해도 절반은 따고 들어갈 수 있다. 헌법정신의 진정성만 발휘되어도 사랑과 눈물의 길이 보일 것이며, 그렇다면 지금처럼 저러지는 않을 것이다.

 

 헌법 제7조에는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이는 일반 공직자뿐만 아니라 사법기관 종사자와 국회의원까지 다 해당되고 대통령도 열외가 아니다.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경전을 머리맡에 두고 생활하는 공직자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으며 대개는 아예 잊어버렸거나 무시하는 것 같다. 그 권리를 망각하고서 그들의 눈치나 살피며 머리를 조아리고 아부를 일삼는 비굴한 국민 또한 적지 않다.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경전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해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머리맡에 둔 경전은 끊임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묻게 할 것이지만 그들 공무원과 정치인들은 그들이 필요할 때만 잠시 사랑이 작동된다. 사랑에 대한 물음은 생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경전이 사랑과 생을 더듬더듬 답하는 동안 사람들은 참된 나를 찾아 나서고 시인은 자신이 걸어 가야할 시의 멀고 고단한 길을 얼굴 붉히며 바라보겠지만 그들은 다만 눈만 껌뻑 껌뻑 하고 있는 것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