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을 복사하다/이화은
예술의 전당에서 이만 원 주고
詩論,입맞춤 / 이화은
여자는 키스할 때마다 그것이 이 生의 마지막 입맞춤인 듯 눈을 꼭 감고, 애인의 입 속으로 죽음처럼 미끄러져 들어간다는데
남자는 군데군데 눈을 떠 속눈썹의 떨림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며 풍경의 변화와 춤추는 체온의 곡선까지 꼼꼼히 체크한다고 하니
누가 시인일까
독자는 여자 편에 설 것이고 시인은 당연히 남자 편에 설 것이다 몰입의 바닥에는 시가 없다 불타는 장작을 뒤집어 불길의 이면을 읽어야 하는 남자여 불쌍한 시인이여
키스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은 시인이거든 그대 당장 독자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하리 그러나 시인의 발바닥은 완전 연소의 재 한 줌도 함부로 밟지 않는다
아픈 보라로 피다/이화은
두통을 꽃핀처럼 머리에 꽂고 308동 앞을 지나가는데 누가 곁눈으로 훔쳐보는 듯 오른쪽 뺨 언저리가 따끔거린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내가 오른쪽 뺨 언저리 너머를 곁눈으로 이미 다 훔쳤기 때문이다 내 두통과 같은 계절에 피는 자목련 한 그루 이마에 서리꽃이 박힌 청교도의 푸른 피와 창녀의 붉은 피가 만나 저렇듯 아픈 보라로 피었는지 내 살 속에서 숨죽여 우는 꽃의 울음소리를 들은 이후 나는 다만 저 꽃을 곁눈으로 훔칠 따름이다 곁눈만 주고받으며 몇 生을 함께 걸어온 듯 통증으로만 교신하는 이런, 업을 끊어내듯 저 나무의 밑동을 톱으로 잘라내는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내 두통과 저 꽃의 발화점은 한 켤레 구두처럼 언제나 나란하다 먼 길을 열듯 단정하게 가르마를 긋고 잘 핀 두통으로 치장하고 안 보는 척 저 꽃나무를 스쳐 지나기만 하면 그만이다 올해도 나의 봄은 무사할 것이다
나, 그 사람 잘 몰라/이화은
친한,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잘! 모른다고 했단다 나는 아는데, 그 사람을 알 것 같은데,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내 아이가 친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나를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어쩌나
등나무가 동백나무가 애기똥풀이 클로바가 구절초가 다 나를 모른다고 모르겠다고,
두통이 죽음이 외면하면 어쩌나
늙은 은사시 나무처럼 잔걱정이 많은 오늘이 며칠이었지? 무슨 날이었던 것 같은데
친하다고 생각했던 오늘이 단 하루도 모른 척 지나친 적 없던 꼬박꼬박 오늘이 나를 모른다고 한다
이제 나만 나를 부인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나도 저들과 한 통속이 될 수 있다 나를 모르는, 모르겠다는 세상과 완벽하게 친해질 수 있겠다
갑자기 그런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다 잘 알 것 같았는데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든가 바로 좀전에 무언가를 했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소하게 느껴질 때 아니면 정말 절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이 나도록 깨졌을 때 왜 나는 살고 있는가 의아해질 때가 있다 왜 사니, 왜 살았니, 왜 사는데? 등 내 몸처럼 생각했던, 내 분신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길을 잃을 때 저 사람도 내가 느닷없이 낯설고 생소하고 서러워지지 않았을까? 그런 적 없었을까? 미안해진다. 나의 상처를 보니 다른 사람의 상처도 비로소 보인다 내가 경험해보니 그제사 다른 사람의 입장도 알아진다 오죽하면 네가 나를 무시하고 모른 척 하면 나도 너를 모른 척하고 무시할테다 하고 저녁의 시에 그런 말을 썼을까. 서글퍼져서 마음 독하게 한번 먹어보는 것이다. 가끔씩! 어느 날, 내가 누군지 몰라지는 날이 올까봐 두렵다 치매에 걸려 아기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바라보자면... 그래서 평상시에 내 주변의 정리를 좀 해두어야지, 정돈을 어느 정도 해두어야지 하는 두려움...있다 그 생각의 끝에서 끝내 길을 놓아버린다, 슬프다, 산다는 일!........^^*
이화은 경북 경산(자인/진량) 출생. 인천교육대학교 및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포엠토피아 편집주간 시집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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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x Vandyke /Historia De Un Amor(어느 사랑이야기)
4.AUGUST.2013 by j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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