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기철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시집『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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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감사해야할 일만큼이나 이토록 사죄해야할 곳도 많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기철 시인의 자기성찰과 참회는 속죄의 진정성 보다는 그렇게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성숙한 자아에 그 방점이 놓여야할 것이다. 인격의 성숙은 타인에게 감사한 마음과 송구한 마음을 품는 것에서 비롯된다. 살다보면 나의 작용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로부터 덕을 입는 경우가 있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히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맺은 숱한 인연들 가운데서 나로 인해 서운하고 마음상한 사람이 없다고는 누구라도 말 못한다. 본의 아니게 못 알아본 사람, 오랜 연락 두절로 서운한 친구도 있을 것이며 내 불찰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도 있을 수 있다. 무심히 내뱉은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상했던 사람도 있겠고, 나의 짧은 생각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음갈피를 헤아리지 못해 섭섭한 사람이 있음을 안다. 그리고 명색이 시인일진데 이처럼 발에 밟혔을 미물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온당한 노릇이라 하겠다.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공생적 관계를 맺고 있다. 갯벌이나 습지가 생명력을 잃는다면 우리 인간들도 결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인류 공동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이없는 원인으로 한꺼번에 3백여 명의 고귀한 생명들을 내 둘레에서 앗아간 이 참사가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다.
60년대 초 국제신보가 창간을 기념하여 시민위안 무료잔치를 공설운동장에서 벌였다가 밀려든 인파에 여러 명이 압사한 참극을 빚은 일이 있었다.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 선생께서 신문사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그는 이 돌발사고로 인한 비통함에 애도와 사과의 글을 일주일간 싣겠다고 신문사 사장에게 알린 뒤 쓰기 시작한 사설이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여기서 그의 진한 휴머니즘과 작가적 역량을 눈여겨본 김동리 선생이 본격적으로 소설쓰기를 권유한 게 계기가 되어 소설가로서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눈물과 헌사와 사죄가 쉽사리 마무리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그 어떤 사과든 사죄든 진정성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수가 있다. 대통령의 대국민사과에서 '사죄'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진일보라고 여겨지나 여전히 사과의 주체란 인식은 미흡한 것 같고 대변인의 ‘유감’발언으로 진정성을 더욱 의심받게 되었다.
이런 일에는 사과를 받는 사람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라야 되는데 대통령께서는 나도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아직 못 벗어난 것 같았다. 사과는 받는 사람이 수용되지 않으면 사과라 할 수 없으며 사죄는 더욱 그렇다. 마지못해 미안하다고 해 놓고선 상대가 수용하지 않는다고 난 사과했으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라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에도 저렇게 사죄를 하는 시인도 있는데 말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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