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스크랩] 누드 - 문솔아

tlsdkssk 2013. 4. 5. 14:27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누드 - 문솔아

  
  모두들 옷을 벗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걸 부끄러워하긴 커녕 깔깔대며 웃는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내연산 수목원, 화단에 핀 야생초들이 모두 누드다. 구절초, 꿩의비름, 물옥잠들이 나체로 피어 저마다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꽃들뿐만이 아니다. 울타리처럼 둘러선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오동나무들도 모두 나체다. 수목원 연못으로 흘러드는 시냇물 소리도, 화단가에 잠든 고양이털을 슬쩍 만지고 가는 바람도 누드다. 지금 막 덤불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이며 백양나무 꼭대기 위로 흘러가는 솜털구름, 이 모든 것들이 누드다. 지금 이곳에서 누드가 아닌 것은 나뿐이다.

  한때 누드열풍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누드화장품, 누드폰, 누드속옷. 너나없이 누드를 표방하며 상품화했다. 누드가 풍기는 약간의 에로티시즘과 자연으로의 회귀본능이 상품구매 욕구를 야기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누드에 열광했으며 다투어 누드상품을 구매했다. 그건 어쩌면 문명화된 현대인들이 문명 이전의 원시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발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리가 분명해져 어떤 것에도 혹함이 없어야 한다는 불혹지년(不惑之年)을 몇 해 전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욕망과 허영의 덩어리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인들의 모임에 갔다 온 날에는 끊임없이 마음에 물결이 일기 일쑤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움보다는 건네받은 명함의 지위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 같아 자리가 불편하다. 걸치고 있는 보석, 들고 있는 가방이나 입고 있는 옷에 따라 묘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살고 있는 거주지와 집의 크기, 타고 온 차의 종류에 따른 생활상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진다. 출발은 똑같이 했건만 이미 속한 세계도, 생활상도, 성취의 결과도 확연히 달라진 친구들을 보며 인생의 성패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그로인한 열패감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다. 하나도 모자라 여러 겹의 옷을 덧입고 있다. 어디 옷들뿐이겠는가. 몸을 치장하고 있는 장신구며, 학벌, 명예, 권력, 아이와 남편에 대한 욕심까지. 나는 너무 두꺼운 가식과 위선의 옷으로 나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내가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존클리어의 걸작인 '레이디 고디바'는 고디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얀 말을 타고 가는 그림이다. 고디바의 남편 레오프릭은 11세기 중엽 영국의 백작으로서 지방 영주였다. 당시 그는 농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기기로 악명이 높았다. 꽃다운 열여섯 살의 고디바는 남편의 세금정책을 과감히 비판하고 세금을 낮추어달고 요구했다. 백작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세금 감면을 고려하겠다.'라고 빈정댔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했다. 주민들은 그날 창문과 커튼을 닫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애벌레의 몸을 벗지 않으면 나비는 자신을 완성하지 못한다. 뱀은 일생동안 여러 차례 허물을 벗는다고 한다. 누드는 이처럼 제 자신을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어서 본래의 자연 상태인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무소유란 모든 번뇌와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덜어내는 일이다. 무위자연의 도(道)를 설파한 노자도,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도 결국은 누드에 닿아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요즘 벗는 연습을 자주 해본다. 손톱의 매니큐어를 벗겨낸다든지, 집안의 잡다한 장식품을 떼어내고 빈 공간을 많이 만든다든지, 살림살이를 조금씩 줄이는 일이 그것들이다. 그건 일견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겠지만 작은 것들을 비워내야만 큰 것들도 비워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성적을 위하여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모는 일이며, 더 높은 지위를 위하여 남편을 다그치는 것들도 요즘은 조금씩 자제를 한다. 그러다 문득 비워낸 공간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 벽으로 빗살무늬처럼 비쳐드는 햇살이며, 출렁이며 창을 넘어 오는 노을이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남편의 사랑이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것이었다.

  김미루는 누드사진작가이다. 폐쇄된 기차역, 버려진 건물, 지하철, 터널 같은 도시의 폐허 속에서 자신의 누드를 직접 촬영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는 문명의 더께를 벗고 벌거벗음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웠고,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동양화에선 여백을 중요시한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때문이리라. 수묵화법도 먹의 농도를 풀어 풍경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사물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누드열풍이 사라진 것이 개인적으론 무척 아쉽다. 누드열풍을 조금 더 연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누드학교, 누드국회, 누드정상회담. 이처럼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누드를 놓으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개인과 개인, 나라와 나라, 종교와 종교 간의 거리가 훨씬 줄어들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평화와 화해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환경운동가들이 모피반대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서 전라(全裸)의 몸으로 시위를 하는 데모대의 모습을 본다. 인간의 벗은 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가 이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스스로 높은 지위에서 내려온 고디바처럼 이들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지구보호라는 큰 이익을 위해 옷을 벗은 것이다.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저만치 수목원을 뛰어다닌다. 꾸미지 않은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야말로 누드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내게 꽃들과 나무와 바람이 손을 내민다. 나는 하나 둘 옷을 벗는다. 어느새 나도 누드가 되어 있었다. 어느 시인은 민둥산에서 옷을 벗고 구름의 자식들을 낳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지금 수목원에서 옷을 벗고 꽃의 자식들을 낳는다. 나무와 바람의 자식들을 낳는다. 훌쩍 커버린 꽃과 나무와 바람들이 내 젖꼭지를 빤다. 어느덧 나는 꽃이 되어 있었다. 나무와 바람이 되어 있었다.



<당선소감>

몇 해 동안 나는 간이역 주변을 서성이며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서 톡, 톡, 기다림을 발로 차는 동안 패랭이꽃들은 피었단 지고, 바람은 들녘을 건너갔다 건너오고, 눈발은 나뭇가지 위로, 침목 위로 내려앉았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가끔씩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철로 위를 달려보기도 하고,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오고 있는지 레일에 바짝 엎드려 귀를 대어 보기도 했다. 이제 그만 기차를 포기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차창에 노란 손수건을 매단 기차가 끼이익!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성탄절 전날 저녁이었다.

노란 손수건은 필시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내준 성탄절 선물이리라. 손수건을 바라보는 동안 따뜻한 손 하나가 내 어깨에 걸쳐졌다. 그때 지나가던 구름이 눈발 몇 개를 흩날려도 좋았으리라. 아니면 은하수의 별 몇 개 내려와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 반짝여도 좋았으리라.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크고 억센 손등에 가만히 내 손을 얹었다.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 사이를 부유하던 시간들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를 절망하게 했던 글들이 내가 넘어질 때마다 오히려 손을 내밀어주었듯이, 이제는 내 글이 다른 이를 찾아가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필의 길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께 오롯이 당선의 영광을 돌린다. 언제나 큰 힘이 되어 준 김영식 시인께는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할지 모르겠다. 늘 격려의 말씀으로 힘을 북돋아 주던 김은주 작가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문학을 함께 공부한 '동목수필문학회', '문맥' 식구들과 덜 자란 글들을 보고도 매 번 칭찬을 마다않으며 용기를 세워준 '미리내' 식구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애틋한 이름인 남편과 글을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

끝으로 부족한 글에 눈 마주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전북일보사에 감사드린다. 어쩌면 이제 더 아파해야할 시간들만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걸 굳이 감추고 싶진 않다.


△ 문솔아 : 본명 문춘희, 1964년 부산 출생, 영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8년 시흥문학상 수필부문 금상 수상, 2008년 대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경주대 사회문화교육원 문예창작반 수료,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료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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