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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모딜리아니와 여인들

tlsdkssk 2013. 3. 2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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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에퓨테른느)

 

1920 1 26, 파리에서 5층 창문을 통해 아래로 뛰어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잔느 에퓨테른느 (Jeanne Hebuterne) ‘라는 이름을 가진 23살의 이 여인은 만삭인

임신 9개월 이었습니다. 2일 전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그녀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했고, 어린 딸

하나를 남겨놓고 남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녀의 남편 이름은 3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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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너무 독특해서 그림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도 쉽게 그의 그림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 모딜리아니의 생애를 쫓아 가다 보면

많은 여인과 질병 그리고 술과 마약도 그를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키는 163cm 밖에 안되었지만 미남이고 매력적이었던 모딜리아니를 읽다가 저는 시인 이상과

소설 날개의 금홍이가 떠 올랐습니다.

갑자기 그림보다는 모딜리아니의 여인들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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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의 아버지는 환전상을 했었는데 넷 째 아이로 그가 태어났을 때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인 그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서 프랑스어 번역, 개인 교수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애정과 생활력을 보면 예전 우리의 어머니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와 어머니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밀접하지만, 병 치레가 심한 아들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더해졌기

때문에 그 둘의 관계는 보통 어머니와 아들 사이 이상이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10살이 될 때까지 직접 공부를 가르쳤는데 11살이 되던 해 모딜리아니는 늑막염에

걸립니다. 그 후로 그의 건강에는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몇 년 후에는 장티푸스에 걸립니다.

16살 때 또 다시 늑막염이 그를 괴롭히고 마침내 나중에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결핵이

찾아옵니다. 제가 아는 예술가들 중에서 어린 나이에 이렇게 많은 질병을 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모딜리아니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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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부인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초상화)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는 언제 보아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긴 얼굴, 눈동자가 없는 눈,

휘어진 선 등은 그의 작품의 특징입니다. 그의 이런 표현 방법은 아프리카 부족들의 마스크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파리에 있는 인류박물관에서 아프리카에 관한 여러 가지를

보았을 것이고 그 것이 그의 작품에 반영된 것이죠. 모델들은 마치 고대 이집트 회화처럼 볼륨을

찾아 볼 수 없는 평평하고 무표정한 얼굴, 아몬드 형태의 눈, 오므린 입술, 비틀린 코, 긴 목으로

표현되어 그의 작품에 나타났습니다. 예전에 모딜리아니 작품 중 눈동자기 그려지지 않은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어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얼굴은 슬프게, 어떤 얼굴은 환하게 변했습니다.

한 번 해보시죠.

 

14살 때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고열로 모딜리아니는 헛소리를 합니다. 그가 무의식 중에 했던

헛소리는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르네상스의 대작들이

모여 있는 그 곳을 모딜리아니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말한 것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병이 나으면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몸이 회복되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우피치 미술관을 구경시켜 주고

리보르노 최고의 미술가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아들의 희망을 조금씩 이루어 주신 그의 어머니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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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모딜리아니가 그린 풍경화는 3점이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물과 풍경을

그렸는데 나중에는 초상화와 누드로 확대되었고 특히 누드에서 그의 재능이 가장 잘 나타났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누드는 다음에 볼 까 합니다. 모딜리아니는 베네치아에서 공부를 할 때

해시시라는 마약에 손을 댑니다. 쾌락이나 자유방임 또는 10대의 반항이라고 보기에 그 정도를

넘었던 것은 그가 니체의 철학에 심취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따랐던 내용 중 하나는

진정한 창의성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도전과 무질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였는데, 어려운 말은 항상 다양한 해석을 가져오기 때문에 저는 어려운 것이 싫습니다.

물론 저도 10대일 때는 꽤 근사한 말을 많이 알고 있었고 또 따라 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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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배경의 폴 알렉산드르 초상화)

 

모딜리아니의 첫 번째 후원자는 의사였던 폴 알렉산드르였습니다. 그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25점이나 구입해 주었고 450개의 드로잉을 수집한 사람입니다. 모딜리아니에게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죠. 몇 가지 색을 대비시켜 작품 속의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후기의 작품과

비교해 볼 때 물론 모닐리아니 답지 않은작품입니다만 또 다른 느낌이 있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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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자켓을 입은 여인 아마존)

 

이 작품에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모델이었던 여인은 모딜리아니의 후원자였던

폴 알렉산드르의 말을 듣고 초상화를 모딜리아니에게 부탁합니다. 본인은 자신의 초상화가 잘

그려지기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포즈를 취했습니다. 이윽고 작품이 다 완성되었다고 해서 그를

찾아갔는데 자신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이 여인은 크게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노란색으로 옷과 얼굴이 통일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도 곱게 그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얼굴을 드려다 보면 한 성질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작품을 사 주어야 하는데 이 여인은

그냥 가 버립니다. 결국 그 여인을 모딜리아니에게 소개한 폴이 대신 돈을 내고 작품을 구입해야

했습니다. 이제 모딜리아니의 여인들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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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아흐마토바 초상 나단 알트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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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토바의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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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토바의 누드)

 

모딜리아니를 심각한 사랑의 늪으로 처음 이끈 여자는 러시아의 여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였습니다.

그 때 그는 26살이었고 안나는 방금 결혼 한 21살이었습니다. 같은 건물에 스튜디오를 두면서

알게 되었는데 점잖은 표현으로 을 저지르게 됩니다. 초상화 속에 안나의 모습을 보면 상당히

지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샤갈의 작품을 연상했습니다)

큰 키, 하얀 피부, 자신과 같은 검은 색 머리, 갈색 눈동자는 모딜리아니가 꿈꾸던 미적 이상형의

모습이었고 둘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1년 후 안나는 남편에게 돌아갔는데 모딜리아니는 죽을 때 까지 안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련(邪戀)이었지만 모딜리아니는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상형과 사랑을 해 봤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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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모딜리아니가 30살이 되던 해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거의 2년 가까이

그의 곁에 머물면서 작품의 모델이 되어줍니다. 그런데 헤이스팅스라는 이 여인은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었고 여행가이자 예술비평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또 기이한 행동으로도 유명했는데 카페에서 나체로 춤을 춘 적도 있었습니다.

성적인 취향도 특이했는데 야한이야기로 커질까 봐서 자제해야겠습니다.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았는데 모딜리아니 하고는 마약 해시시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만나면 좋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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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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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그리고 둘이 헤어질 때는 상대방에 대해서 상당히 신랄했던 모양입니다. 역시 돌아서면 남입니다.

초상화를 보고 원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원래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영국의 여류 화가 니나 헴릿과는 친구 사이였는데 처음 두 사람이 만난 장면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혹시 선수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니나 헴릿이 몽파르나스에 도착 한 날 저녁, 카페에 간 그녀는 옆 테이블에 빙그레 웃고 있는

남자를 발견합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나는 그림 그리는 모딜리아니입니다, 그리고

유태인죠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상투적인 작업 멘트가 때에 따라서는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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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에퓨테른느)

 

모딜리아니 그림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크고 깊은 눈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사진에서도 눈을 약간 치켜 떴는데 그림에서도 같은 표정입니다.

어쩌면 잔느의 얼짱 각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여인 잔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19살이었고 모딜리아니는 33살이었습니다.

잔느는 일본 태생의 츠구하라 후지타의 모델을 했었는데 모딜리아니의 모델로 왔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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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에퓨테른느)

 

잔느는 우아하고 부끄럼을 잘 타고 조용하며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그녀의 집안은 그녀가 화가랑 정을 통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으로서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그녀의 집안에서 모딜리아니는 유태인이고 타락한 낙오자이고 아직도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사실 모딜리아니가 그 때도 술과 마약에 빠져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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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에퓨테른느)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파리가 점령될 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남부 니스로 떠나는데

잔느는 아이를 갖게 되고 첫 딸을 얻습니다. 아마 이 때가 모딜리아니가 가장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수 많은 작품을 그렸고 판매도 상당히 한 모양이지만

돈을 크게 벌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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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모자를 쓴 잔느 에퓨테른느 초상)

 

니스에서 파리로 돌아 온 모딜리아니와 잔느는 서로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모딜리아니가

아내 잔느를 그린 초상화가 25점 있다고 하는데 사랑스런 아내 모습을 끝없이 그리고 싶었을 것

입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젤을 세워놓고 캔버스위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그림을 그리는 내내 입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림 아닐까요?

그러나 죽음이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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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에퓨테른느)

 

모딜리아니는 계속 그림은 그렸지만 알코올 중독에 의한 기억 상실이 빈번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딜리아니 아래 층에 살던 사람은 위층에서 며칠째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모딜리아니 집을 찾아갔는데 임신 9개월이 된 아내 잔느를 붙잡고

모딜리아니는 정신이 없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가 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결핵 수막염으로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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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에퓨테른느)

 

몽마르뜨와 몽파스나스에서 찾아 온 수 많은 예술가들로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뤄집니다.

잔느의 집 안 식구들은 잔느를 그의 부모 집으로 옮겼지만 2일 후 그녀는 자살로 그녀의 뱃속에

있던 아이와 함께 모딜리아니를 따라 갑니다. 아빠의 얼굴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걸까요?

 

잔느는 남편 모딜리아니 옆에 묻히고 싶었지만 잔느의 식구들은 모딜리아니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른 곳에 잔느의 무덤을 만들지만 10년 후 그녀를 용서한 가족들에 의해 잔느의 무덤이

모딜리아니 옆으로 옮겨집니다. 10년 만에 나란히 부부가 한자리에 누웠습니다.

만약 제가 자살을 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들을 수 있었다면 저는 그녀의 뺨을 후려쳐서라도

말렸을 것입니다. 사랑의 표현은, 모든 것을 잃었다는 표현은 적어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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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에퓨테른느)

 

지난 1월 저는 이태리 리보르노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었습니다. 피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바닷가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는데 이번에 그 곳이 모딜리아니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딜리아니를 그 전에 읽었더라면 또 다른 상념을 할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여간 ----.

아무래도 모딜리아니 이야기를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출처 : 고강동 천주교회 글로리아 성가대
글쓴이 : 선동기 라파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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