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미인도(美人圖) 비교
일본의 화장방 (1873)
지라르 Marie-Francois-Firmin Girard (1838-1921) 작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 그림은 유럽인이 19세기의 아카데믹한 화법으로 그려낸
일본 게이샤로, 정교하게 묘사된 의상이며 가구며 소품이며...
일본풍을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그림이 전체적으로 화사해서 눈을 즐겁게 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진정한 일본 정서가 느껴지나요?
우선 모델이 진짜 일본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얼굴도 그렇지만 나체의 여인의 몸매를 보세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 없다는 거예요.
방안이 꽉 차서 여백의 미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나체로 전통 현악기 샤미센을 연주하고 있는
여인이라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원래 샤미센을
저런 자세로 연주하지도 않지요.)
일본식 관능미를 이해했다면 완전 나체가 아니라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겹겹의 의상 뒤로 살며시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를 그렸겠죠.
이쯤 되면 이 화가가 일본에
정말 가본 적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수입된 일본 가구와 우키요에 몇 점을 참고해서
자신의 환상을 그린 건 아닐까요?
배경만 바뀌면 아래 오달리스크 그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달리스크와 노예 (1839)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작
캔버스에 유채, 포그 미술관, 매사추세츠
오달리스크 (Odalisque) 는 아시다시피 터키 황제의 시녀나 후궁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런데 일련의 오달리스크 그림으로 유명한
앵그르는 사실 터키나 다른 서아시아 국가에 가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앵그르나 그 시대의 다른 화가들은 “오달리스크” 란
제목으로 누드를 그리기를 즐겼을까요?
아마 누드에 늘 “비너스”라는 제목을 다는 것이 지겨웠기
때문일 테죠. 주변에 이국의 소품을 배치해서
색다르고 신비로운 느낌도 주고, 또 “이 그림의 배경은
우리가 사는 유럽이 아닌 이국이다. 거기선 이렇다더라,
나도 확실히는 모르지만”이라는 핑계 아래
화가의 성적 환상을 더 대담하게 표현했겠죠.
이런 데서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의
부정적 의미가 나오기도 하는 거고요.
아무튼 게이샤 문화에 대해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이 명화가
게이샤와 몸을 파는 유녀(遊女)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이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비록 게이샤가 타락하여 매춘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유녀 중 고급인 오이란의 경우에는 교양과
가무 실력도 갖추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게이샤는
예능을 파는 자이고 유녀는 몸을 파는 자로서
철저히 분업이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자부심 있는 게이샤들은 연인과 관계를 가진다 해도
금전 대가를 받는 일이 없었고 에도 요시와라(吉原)의
게이샤들은 아예 남자와 육체 관계를 갖지 않고
예술에만 정진하는 고고한 삶을 살았다고 하네요.
사실 게이샤와 오이란은 복장부터 다릅니다.
아래 미인도를 보세요.
두폭 벽걸이 (1820)
우타가와 구니히데 작
비단에 채색, 84.7 x 29.5 cm
from www.kobijutsu.co.jp
왼쪽에 있는 여인은 게이샤, 오른쪽에 있는 여인은 오이란입니다.
기모노의 특징인 “오비”라는 넓은 띠를 게이샤는 뒤로 매듭이
가게 매고 오이란은 앞으로 매듭이 가게 맵니다. 또 오이란은
비녀(?)를 부채살처럼 꽂은 독특한 머리모양을 합니다. 그리고
오이란이 옷을 전반적으로 더 화려하게 입습니다.
앞으로 일본 우동집에 걸려있는 미인도를 열심히 보고
게이샤인지 오이란인지 구분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키요에 미인도, 특히 18세기 후반과 19세기의
그림들을 보면 미인들의 얼굴이 왜 그리 길쭉한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길고 하얗고 턱은 둥글어서, 그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무나 조롱박 같다고 하던데... 모델이 된 게이샤나 오이란의 얼굴이
실제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요.
한국의 의상이나 예술품은 선의 멋들어진 흐름을 중시해서
그걸 방해하는 무늬를 절제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은 단순한
소박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 일본의 예술품이라고 해서
언제나 요란하게 화려한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단순한 가운데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 종종 있지요.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한국과 일본의 옛 미인도를 한 번 비교해 볼까요?
왼쪽 그림은 대표적인 미인도 작가로 18세기 후반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 1754-1806)의 목판화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해남 윤씨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작자 미상의
수묵 채색화로 18~19세기 중반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지요.
왼쪽 그림의 여인은 속이 비칠 듯 말 듯한 얇은 감색의 여름 의상을
입고 부채를 들고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의 여인은 팔을 들어
크게 올린 머리를 만지고 있는데, 짧은 삼회장 저고리 아래로
살짝 드러난 속살, 하얀 손과 새카만 머리카락의 대조,
입술과 띠의 강렬한 붉은색,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여유만만한 눈초리 등이 상당히 고혹적입니다.
이번에는 거울을 보는 여인을 그린 양국의 미인도를 비교해 볼까요?
큰머리 여인 (19세기 초 추정)
김홍도 金弘道 ? (1745-1810년대) 작
종이에 채색, 24.7 x 26.0 cm
서울대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한국 회화사의 거장인 김홍도의 작품입니다.
굵은 선으로 표현된 녹색 치마와 붉은 경대의 강렬한 대조,
그리고 여인의 살짝 내민 발이 인상적인 작품이에요.
거울을 보는 여인 (1808)
가쓰시카 호쿠사이 葛飾北齋․(1760-1849)
비단에 채색, 86.1 x 32.4 cm
from www.kobijutsu.co.jp
이 그림은 “거대한 파도”나 “불타는 후지산”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우키요에의 거장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입니다.
그의 걸작들이 대개 목판화인 반면에 이 그림은 직접 붓으로 그린 것이지요.
늘씬한 여인이 우아한 곡선을 만들며 몸을 뒤로 젖히고 거울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일본 회화에서만 자주 볼 수 있는 독특한 테마인 뒷모습의
미인도인 것이죠. 일본 의상 자체가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중시하지요.
옷깃을 오비에 가깝게 아래로 늘여서 목덜미를 드러내 은근한 관능미를
발산하고 오비의 매듭을 뒤로 늘어뜨립니다.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1986)”에서는
이것이 일본 특유의 “닫쳐진 뒷모습으로 열린 앞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한 함축미”라고 합니다.
미인도 (19세기 초 추정)
신윤복 申潤福 (1758-?) 작
비단에 담채, 113.9 x 45.6cm
간송미술관
이건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지요. 너무나 잘 알려져서
얼핏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물끄러미 들여다 볼수록
역시 걸작은 걸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黑雲(검은 구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얹은머리와
탐스럽게 부풀어있는 치마의 멋진 균형, 의상의 절제된 색깔에
액센트를 주는 노리개와 그 노리개를 움켜 잡고 있는 하얀 손이
주는 미묘한 에로티시즘, 그리고 어딘지 애달픈 느낌을 주는 앳된
얼굴과 가녀린 어깨선까지... 과연 미인도 중 으뜸이라 할 만합니다.
벚꽃 아래 미인과 그 시녀 (1805년경)
초분사이 에이시 鳥文齋英之 (1756-1829)
비단에 채색, 104.6 x 41.0 cm
from www.kobijutsu.co.jp
신윤복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한 일본의 화가 에이시의
작품입니다. 당대 한국의 대표적인 미인 화가가 신윤복이라면
일본의 대표적인 미인 화가는 우타마로와 에이시였지요.
고바야시 다다시의 “우키요에의 미(2004)”에 따르면 에이시는
무사 계급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우키요에 화가가 된 아주 파격적인
케이스였으며 따라서 에이시의 미인도는 그의 신분을 반영하듯
격조 있고 우아하며 정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인 계급의 화가인 우타마로의 미인도가
통속적이고 관능적이면서 생동감이 넘치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에이시의 이 그림은 판화가 아니고 붓으로 그림인데,
그는 이런 그림에 더 뛰어났다고 해요.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오비 매듭이 앞에 있는 것과
머리 모양을 보시면 알겠지만, 고급 유녀 오이란입니다.
옆에 있는 소녀는 영어 제목에는 그냥 시녀라고 되어있지만
머리에 붉은 띠와 꽃장식이 보이는 것을 보니 혹시 마이코가 아닐까요..?
어쨌든 분홍색과 진홍색의 화사한 옷을 입고 꽃가지를
꺾어든 여인들이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나무 밑을 걸어가고 있는
이 그림을 보면 봄날의 온화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져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