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스크랩] 경주(慶州) 최부자댁(崔富者宅)

tlsdkssk 2013. 2. 1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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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최부자댁(崔富者宅)

 

주소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주 최 부자 집안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웠고,

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크게 일으켰는데

형산강 상류의 개울가에

둑을 쌓아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실시하였더니

소작인이나 노비들이 자기 일처럼 농사일에 참여 하였답니다.

재물은 똥거름(糞尿)과 같은 것이어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 가 없지만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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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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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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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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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명변(愼思明辨)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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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담 사이의 각종 문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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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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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과 행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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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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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

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최채량(崔採亮)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愚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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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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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

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
남(南)으로 울산,

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

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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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부잣집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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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법주의 담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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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다.

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한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

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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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 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않다.

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랭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한다.

 

★ 참고 알림 ★

몇 해전 어느 모TV방송사에서 경주 최부자댁을 소재로

방송이 되였음을 알려드림니다.  최부자댁의 일화중에

우리나라 6.25동란중 스웨덴의 간호장교들이 스웨덴국왕의

명에의하여 죄부자댁의 모든 건물구조들을 스켓치와

사진찰영을 해간것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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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1  2.  1  2.  2.  시   곡(枾   谷).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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