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호기심

tlsdkssk 2008. 4. 19. 01:13

호기심

새롭거나 신기한 것에 끌리는 마음이 호기심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가끔 그런 마음이 된다.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서 서가에 꽂을 때 당장 그 책을 읽지 않더라도 우선은 호기심을 충족한 기분이 된다. 이 경우 호기심은 흥미나 지식욕구보다 더 원초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여행 중에 폭포를 만나면 그 폭포수의 보이지 않는 윗면을 보고 싶은 호기심에 늘 발길이 묶인다. 폭포의 꼭대기 끝, 내 시각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곳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면서 등산로를 찾아보곤 한다. 죽령 희방폭포의 ‘그 곳’에는 맹렬한 낙하를 앞둔 평온함이 있었다. 모인 물들이 마음을 비우는 모습, 평화였다.

골동품 수집가에게 골동품은 이미 ‘옛것’이 아니다. 처음 만나는 골동품은 그에게 새것이며,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본다. 발견의 기쁨으로 가슴 설레는 이에게 옛것이 어찌 옛것이랴.

아기가 아이 되고 아이가 어른 되는 과정에서 호기심을 빼놓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호기심에 끌리면서, 또한 제 몸 속의 호기심을 키우면서 성장한다. 어른 되어 분별력과 의지력을 갖추게 되면 본능적 호기심과 쾌락적 호기심은 제어당하고 쇠퇴하지만, 지적 호기심과 미적 호기심은 오히려 왕성해진다. 몸속에 키워온 호기심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호기심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호기심이 더 많단다. 남의 것을 찾아서 보고 질투도 한다. 그래서 수명이 더 길다는 학계의 보고도 있다.

‘사람들은 늙어 가면서/ 새것이 됩니다./ 그리고 더 아름답습니다.’라는 노래가사가 있다. 살아갈수록 새것을 많이 보게 되고, 새것을 많이 볼수록 새것이 된다는 뜻인 것 같다. 나는 이 가사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싶다. ‘새것은 찾는 사람에게/ 더 많이 보입니다./ 호기심을 잃지 않으면/ 그는 아름답습니다.’라고.

나에게 잊지 못할 호기심 사건이 하나 있다. 어언 25년 전 일이다. 어쩌면 호기심 때문에 내 인생 길이 바뀌어졌을지도 모를 사건이다.

1980년 1월, 출장 중에 동서냉전체제하의 모스크바 공항에 들렀다. 공항 내에서의 사진 촬영이 간첩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여행자 안보교육시간에 들어서 알고 있었음에도 카메라 후래쉬를 터뜨린 것은 ‘내 용감한 호기심’의 증명사진이 또한 필요했기 때문이다. 슬라브 민족 특유의 백치미와 러시아 모자의 앙상블, 그 소련 여성의 얼굴 사진은 증거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원칙적으로 금지된 항로‘에 대한 그 날의 선택은 매우 은밀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편은 파리에서 북극해로 우회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을 경유하여 오는 KAL외에 적성국가의 영공을 거쳐서 오는 코스가 있었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JAL을 타는 것이다. 탑승 전 현지 영사관에 전화로 신고해야 하는 절차도 무시했다. 뒷좌석의 일본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미쓰비시 상사의 과장이라 했다. 서로 명함까지 주고받은 것은 내가 그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데 대한 일말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회사도, 가족도, 영사관마저 모르는 데 대한….

항공기가 도착한 저녁 8시, 기내 방송이 알려준 기온은 영하 36도였고 머리 위까지 담요를 뒤집어 쓴 채 트랩을 내려 걷는 승객들의 양편에는 이상한 총(권총과 기관단총의 중간 크기)을 허리에 찬 긴 외투 차림의 군인들이 경계자세로 서 있었다.

그 여성은 기념품코너 판매원이었다. 전시대 위에 그림같이 솟은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절도 있는 군화소리와 함께 두 명의 군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났다. 그들이 내 몸을 수색하는 동안 나는 카메라를 통째로 가져가라는 시늉을 했지만 무표정이다. 여권을 뒤적이며 국적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따라 오라 한다. 황색선이 그어진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황색선이 국경선이다.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국적을 알고 나면 북한에 팔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필경 일본은 알 것이다.’ 뒤로 돌아서면서 소리쳤다. “야마모토 갓죠((山本 課長)!”

그가 달려왔다. 군인들은 일본 여권을 보더니 어떤 관계냐는 손짓을 했다. ‘친구’는 내 어깨를 감쌌다. 군인들이 카메라에서 필름을 빼내어 봉투에 담았다. 내 온 몸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호기심이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녹아 있는 사람은 그것에 이끌려 인생을 걸기도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P양은 그런 여성이다. 그는 오래 전에 중국어를 제대로 배우려고 중국에 유학 갔다가 대륙을 횡행종단(橫行縱斷)하였고 티베트까지 여행하였으며 지금은 미국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어학 공부를 위해 그 언어들의 본토에 간 것이지만 그의 경우 공부를 위해 갔는지 두 대륙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얼마 전에는 벤을 몰고 20여 시간 걸려 멕시코에도 다녀왔단다.

그는 혼기를 놓쳐버린 노처녀임을 개의하지 않고 호기심을 좇아 늘 새롭게 사는 사람이다. ‘호기심을 잃지 않으면/ 그는 아름답습니다.’라는 내 노랫말을 그에게 들려주고 싶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호기심 또한 인류역사를 일구어 나가는 추진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 발전의 원동력인 탐구적 호기심이나 예술 창조를 위한 심미적 호기심이 없는 나는 내 일상적인 지적, 미적 호기심을 책을 읽거나, 전파미디어의 특별한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어쩌다 한 번씩 문화생활에 해당하는 나들이를 하면서 채우고 있다.

그러다가 여행이라도 나서게 되면 그 미흡했던 일상적 호기심의 갈증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좋아한다. 시간에 쫓긴다든가 일행과 멀어진다고 해서 호기심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다. 피곤할 때는 여행3칙을 상기한다. ‘부지런할 것, 자유로울 것, 호기심을 마음껏 발동할 것’이 내가 정한 여행3칙이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업무5칙이란 걸 만들어 효과를 거두었다. 칙(則)이란 지키자는 것이며 잘 지키면 결과가 좋다. 많이 가질수록, 또 많이 쓸수록 좋은 것(多持益善, 多用益善)이 호기심이다. 여행 가방을 꾸릴 때마다 나는 호기심을 단단히 챙겨 넣는다.

호기심은 생활을 권태롭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윤택하게까지 한다.

호기심은 모험심을 동반하여 우리를 젊게 하기도 한다.

1999년 가을 (200x16매)

   ** 외손녀 들여다보니 호기심이 어떤건지 새로워 9년 전 써둔 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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