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스크랩] 名 人 -李 外 秀

tlsdkssk 2008. 4. 6. 11:46

 

 

名 人 -李 外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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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빛깔에 대해서만은 아주 특별한 시감각視感覺을 소유하고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은 개체마다 각기 다른 빛깔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비록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조건 속에서 동일한 형태로 태어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동일한 빛깔만은 소유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반 사람들이 그것을 식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표면에 드러나 있는 빛깔에 현혹되어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빛깔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표면에 드러나 있는 빛깔은 육안肉眼에 의해서 감지되지만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빛깔은 결코 육안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으며 오로지 심안心眼을 통해서만 감지된다는 것이 노인의 주장이었다.

노인은 오늘날 고려청자의 비색이 그대로 재현될 수 없는 이유를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흔히 고려청자의 비색이 흙이나 유약의 비술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재현이 불가능한 이유가 그 비술을 전수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터무니 없는 낭설이라는 것이었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흙이나 유약에 의한 비술로써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도공의 마음에 의한 비술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달리 말하면 고려청자의 비색은 곧 기술의 빛깔이 아니라 마음의 빛깔이라는 것이었다. 도공이 어떤 마음의 빛깔을 가지고 가마를 지키고 앉아 있는가에 따라 도자기의 빛깔도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고려청자의 비색은 곧 마음의 비색이었다.

노인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유일한 즐거움은 날품팔이를 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전국의 가마를 찾아다니며 도자기를 감상하는 일이었다. 백자건 청자건 분청이건 가리지를 않았다. 노인은 도자기를 감상하러 다닐 때는 절대로 차를 타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눈동냥이라고는 하더라도 도공이 몇 날 몇 밤을 노심초사해서 만들어 낸 예술품을 쉬운 방법으로 감상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동곡東谷 서창목徐昌穆은 오십대 초반의 도공이었다. 일본의 유수한 도예전문지에 그의 백자가 몇 번 소개되기 이전까지 그는 별로 세인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공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국내의 내노라하는 미술평론가들이나 애호가들도 그에게 명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그의 백자를 찬탄하는 일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일년에 겨우 한번 가마에 불을 때는데 삼백여 개의 작품 중에서 오직 한 개만이 선택된다는 소문이었다. 가격이 엄청나서 어지간한 애호가들은 소장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노인이 목욕재계를 끝낸 다음 동곡요東谷窯에 당도했을 때는 아직 해가 서너발 정도는 남아 있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소문난 명인의 가마이기 때문인지 벌써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가마 앞에는 약 백여 개의 도자기들이 도열해 있었다. 육십 프로 정도는 이미 가마 속에서 터져 버렸노라는 동곡의 설명이 있었다. 방송기자와 신문기자들이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취재에 열중해 있었다. 과연 삼백여 개의 작품들 중에서 어떤 명품이 살아 남는가에 모두들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봄부터 지금까지 어떤 고초들을 겪으면서 작업이 진행되었는가를 동곡의 제자라는 사내가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자 선별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동곡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자라는 사내가 신중한 동작으로 백자 한 개씩을 동곡에게로 날라다 주었다. 동곡은 마당 한복판에서 장도리를 들고 서 있었다.
깡!
도자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동곡이 한 번씩 장도리를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백자들이 박살나고 있었다. 상당히 오래도록 그 작업은 진행되었다. 살아 남은 백자는 마당가에 준비되어 있는 탁자 위로 모셔졌다. 그러나 동곡은 그것들을 모두 취하지는 않았다. 세심하게 점검해 보고는 그것들마저 하나씩 장도리로 박살을 내기 시작했다. 아까워라. 백자가 하나씩 박살이 날 때마다 사람들은 아쉬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오직 한 개의 백자만이 탁자 위에 살아 남았고 그것은 탁자 위에서 마치 신의 하사품이라도 되는 듯이 오만한 자태로 늦가을 석양빛을 튕겨내고 있었다.

“눈 먼 도공 하나가 명품은 모조리 장도리로 박살내 버리고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아집의 덩어리 한 개만 세상에 남겨 놓는 광경을 구경하고 가는 구만.”

노인은 발길을 돌리면서 아무도 들리지 않는 혼잣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출처 : 名 人 -李 外 秀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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