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강에 가서 말하라

tlsdkssk 2008. 3. 19. 23:36
  2008 3월

               

               강에 가서 말하라

             

                                                     



  황인숙의 ‘강’이라는 시가 있다. 강은 초장부터 심상찮게 내 촉수를 건드렸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에게 토로하지 말라


   어쩌자고 시인은 내 마음을 이리도 잘 대변하는가. 나는 좀더 깊숙이 강으로 빠져든다.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정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에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이쯤 되니 회심의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래, 나 역시 몇몇 지인들에게 시달린 경험이 있었지. 시도 때도 없이, 입만 열면 몇 시간이라도 좋다는 듯 나를 고문(?)을 해대던 사람들이 말이다. 몇 년씩, 또는 몇 십 년씩 나는 그들의 피와 침이 튀기는 이야기를 들어줘야만 했다. 사연도 다양했다. 부모, 형제, 애인, 남편, 친구, 돈, 외로움….

  인생의 어깃장과 저미는 애간장을 난들 어쩌란 말인가. 딱히 해법도 없는 내용들, 격앙된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 머리는 지끈거리고 가슴은 무거웠다. 어떤 이는 멀리 해외에 가서까지 1시간가량이나 전화를 해대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만 쥐가 날 것 같은 내 팔은 어찌 하라고?

  사연들은 대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깔고 있었다.  화자의 얼굴은 자연 그의 감정만큼이나 흉하게 일그러들었다.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들을 성토하느라 그들의 몰골 역시 말씀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혹 도움과 조언을 요청하면서도 정작 내 얘기는 듣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 사이의 조언이나 상담이 때론 얼마나 공허하고 무익한 것인가를 일찌감치 깨우쳐 준 일등 공신들이다. 나는 그네를 통해 터득했다. 인간이 제아무리 자신을 돌아보려 한들 개인의 성숙 없이는 모든 게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란 상당한 조율과 기술을 요한다는 것을. 가깝다는 것은 언제나, 늘, 서로의 거리를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중 한 사람은 색깔이 좀 달랐다. 그녀는 웬일로 나를 만날 적마다 자기를 놓고 사람들이 얼마나 예쁘다고 칭송하는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런 자랑이라면 한 두 번이면 족하다. 거듭되면 상대가 아무리 미인이라도 거북할 판이다. 그녀는 꽤 명민한 편인지라 언제고 내 심드렁한 의중을 간파해 내리라 여겼다. 딱하게도 그의 집요한 자기 몰두는 오래도록 식을 줄을 몰랐다.

  결국 18년 째 되던 해 한 마디 짚게 되었다. 자신과 유사한 어떤 이의 행태를 지적하며 하필 내게 그의 비난을 늘어놓을 게 뭔가. 절호의 기회. 그러나 20년 남짓한 교분을 생각해 나는 꽤 조심스레 말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내 말을 들은둥 만둥 여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도 나만큼 씁쓸했을 것이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남모를 심연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

  지금껏 남 얘기만 늘어놓았는데 나인들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상처와 회한, 미움과 분노가 누군들 없을까. 인간의 내면인즉 너나 할 것 없이 얼룩덜룩할 터이다.

  이 시를 읽어 내리며 나는 혼자 비실비실 웃다가 마침내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맨 끝자락, 내 묵은 체증을 단번에 날려주는 이 한 마디 때문이었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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