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인생의 가을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의 가을을 무척 사랑한다.
혹간 삶이 나를 슬프고 고달프게 할 적마다 눈물은 흘렸을지언정
나는 내 삶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한 인간의 머리가 아무리 비상하게 뛰어나다 해도
그가 인생의 봄이나 여름을 살아내는 중에 가을을 미리 깨달을 수는 없는 법이다.
가을의 정취나 수확은 비로소 가을이 되어야 만끽할 수가 있다.
요즘엔 인간의 긍국적 가치와 미덕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뭍 인간들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그것은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요긴한
조건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효기간이 있는 식품처럼 언젠가는 곰팡이가 슬고
변질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한 때는 휴머니티라는 말을 좋아했고 똑똑한 인간이 지닌 번뜩이는 재능과 지성과
매력을 중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더 살아보니 젊은 날의 화두였던 휴머니즘이나 휴머니티란
단지 관념적인데 머물지 않았나 싶어 그런 거창한 표현도 이젠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최근에 이르러 내가 끌리는 것은 겸허하고 순후한 인간성,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씨 같은,
전엔 그 가치를 인정한다하면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들이다.
나는 따뜻함이 많이 부족한 인간이다.
침착과 냉정, 혹은 인내같은 건 그런대로 수련이 된 것 같은데,
따뜻함은 많이 결핍되어 있다고 본다.
혹시 어릴 적에 부모로 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은 충분히 받은 것 같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충분히 받질 못한 것 같다.
어머니와 나는 늘상 예각을 이루며 대치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도 분명 나를 사랑했을 것이나 얼음 속의 사랑같이 차갑게 느껴졌다.
다섯살 적, 어머니는 소꿉놀이를 하며 내가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빈대떡을
지저분하다며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버린 일이 있었다.
하기야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 중구 충무로의, 당시로선 대로변에 있던 집이었으니
집 문앞에다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내 살림살이들이 깔끔떨기 좋아하는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소꿉놀이는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 없었다.
그 사건은 내가 어머니와 대치 국면에 접어들게 된 원인중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심리학적인 면에선 지적이고 똑똑한 모성보다는
원시적이고 푸근한 모성이 자녀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점은 내가 아들을 키우는 과정에서도 많이 부족했음을 시인한다.
나는 당시 많은 시련을 겪고 있던 터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아들을 강하고 독립적으로 키우는데 주력하였다.
당시엔 원시성이나 푸근함 같은 게 그닥 큰 가치로 다가오지 않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훈련을 하며 살아야겠다.
어제 읽은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나오는 문구가 인상적이라 아래에 옮겨본다.
따뜻한 말은 공격하던 사람을 무장해제 시킨다
말로 공격을 받으면
따뜻한 말로 대응하기는 정말 어렵다
말싸움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누구인가?
모든 말싸움에서 핏대올리고 소리높이고 얼굴 붉히며
공격적으로 말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신경회로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사람의 뇌속에는 '아미그달라'라는 단백질이 들어 있다.
듣기 싫은 말이 들리면 뇌에 입력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물질이다.
우리 몸은 공격적이고 날선 말을 들으면 생존본능에 의해
아미그달라가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만들어졌다.
따뜻한 말은 공격하던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이정숙의《상처주지 않는 따뜻한 말의 힘》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