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송년 카드

tlsdkssk 2007. 12. 23. 21:05
 

                       송년 카드

    삼복더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연말에 보낼 성탄절 카드나 연하장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면 더위 먹은 탓이라고들 할까. 그렇지만 나는 연초부터 그 생각을 해오고 있다. 누구에게 보낼 것인지, 어떤 글귀를 담을 것인지를 그려보면서.

   작년에 송년카드를 보내지 않았던 탓이다. 카드를 공해라고 규정하여 일체 보내지 않기로 한 회사의 결정도 있었거니와, 해마다 늘어나는 발송숫자에 비례해서 받는 카드도 대부분은 의례적이거나 무의미한 것들이 많아서였다. 가끔씩 만나면서 전화도 자주하는 사람이나, 불과 며칠 전 송년 동창회에서 만났던 친구의 카드를 열어본 순간의 맹한 기분이란……    그러다가 김순애 마리나 수녀님의 카드를 받았다. 성탄의 의미와 축복의 글을 빽빽이 채운 카드들 읽으며 당혹스럽게 날짜를 짚어 보았다. 급히 보내더라도 성탄절까지 내 카드가 도착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수녀님은 내가 신앙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으로, 종신서원식에 초청되는 영광을 주신 분이다. 10년이 가깝도록 12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보내 드렸는데…….

    세모의 며칠동안, 받기만 하고 그냥 넘기기에는 아쉬운 카드들이 있어 난감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전화로 답례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전화와 카드는 교감의 질이 다르며 특히 이런 경우 전화는 감정의 전이에 적당하지 못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금연을 시작하듯, 일시에 카드보내기를 딱 끊어버린 것은 내 실수요 착각이었다. 회사가 준비하는 카드에다 한꺼번에 사인을 해 넣는 것을 ‘일’로 생각하면서, 인쇄된 글귀 외에 별도의 덕담을 써 넣던 일부의 카드조차도 예외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결정 그 자체가 실수였다. 더구나 성탄 전야나 제야의 분위기를 덤덤하게 맞이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카드보내기를 완전히 생략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착각이었던 것이다.

    송년카드를 주고받는 것은 어쩌면 ‘인연’에 대한 확인행위인지 모른다. 소중한 인연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의 표시 같은 것 말이다. 내가 가장 과분하게 간직하고 있는 카드는 금아 선생이 보내주신 것이다.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시는 선생의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한 글귀가 그 카드에 담겨 있다. 그것은 영문으로 인쇄된 것인데 절제미를 사랑하시는 선생은 그 글귀의 윗단에 ‘서병태 사장 내외분께’,  아랫단에 ‘피천득’이라 쓰신 외에  단 한 줄의 우리말 부언도 넣지 않으셨다.


   Hope it adds

   a little pleasure

   to your Christmas holiday

   To know

   that you're remembered

   in a very special way!


    언젠가 선생께 문안 가는 길에 그 카드를 가지고 갔다. 옆면의 백지 여백에 우리말로 번역한 친필 글귀를 써 주십사 간청을 했다. 선생은 그냥 미소만 지으셨다. 영문학자이기도 한 선생은 그 글귀를 읽은 순간 카드를 샀을 것이고. 더 이상의 것은 -번역문안을 써 넣는 것은 더구나 - 원어가 풍기는 언어의 뉘앙스에 흠집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선생의 이러한 속마음을 어느 날에 가졌었던 대화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은 김소운의 ‘외투’에 대해. 외투대신 선물한 만년필이 분실되었다는 내용의 마지막 문단은 쓰지 않았어야 했다고. 입맛을 다시면서 몹시 아쉬워 하셨다. 나는 그 문단이 또 다른 여운을 주는 것 같아 좋았는데 선생께서는 단호하셨던 것이다.

       ‘당신이 내게 매우 특별하게 기억되고 있음을

       당신이 아는 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당신에게

        조그마한 기쁨을 더해주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원어의 맛을 다 살릴 수는 없다 해도 나는 이 글귀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끼리 나눌, 송년카드의 가장 아름다운 인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올해에도 나는 회사가 준비해 주는 카드로 수백 통씩 발송하는 관례적인 카드 보내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꼭 보내고 싶은 이들의 카드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한 장 한 장 고르고, 정겨운 글귀를 담아 보낼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서, 카드공해라는 비평을 받기도 하는 카드 문화는 자체정화의 과정을 거쳐 그 본래의 길을 가리라 믿는다. 그러나 통신의 발달에 따르는 카드문화의 위기는 예측을 불허할 정도이다. 정보고속도로의 건설이 실현되면 사람들은 시간의 제약에서 좀 더 자유로위질 수 있음과 동시에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만나는 것처럼 생활할 수 있다. 음성전화시대는 사라지고 동화상전송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고속도로의 전단계이거나 또는 가장 초보적인 형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며. 통신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카드문화의 끝은 어디일까.

“미래로 가는 길”에서 빌 게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역사는 진보하게 마련이며 우리는 그 진보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도 미래를 곁눈질하면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혁명적 변혁의 징후를 간파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전율에 휩싸인다.’라고.

    그러나 어느 문우가 내게 보내온 편지의 다음 구절은 어떤가. ‘향기 나는 편지를 담아 걸어둔 편지함은 꽃핀 난분(蘭盆)입니다. 난초꽃 암향이 방 안에 골져 흐릅니다. 향기 나는 편지를 넣어둔 서랍을 열면 향기가 물씬 풍겨 나옵니다.…’

    혁명적 변혁으로 치닫는 통신기술의 끝이 편지함의 난향을 해명할 수 있을 때 카드문화는 종식될 것이다.

    카드는 그림이 인상적이어서 간직하기도 하고 글귀가 좋아서 간직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카드들을 향기 나는 편지들과 함께 편지함이나 서랍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난향을 맡으면서. 은은한 그 향기를 즐기면서….

                                  1997년 겨울(200x15매)

    성탄절인 오늘  성당에 가니 벽에 카드들이 붙여져 있다.  어린이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건데 내 편지함에 옮겨 넣어두고 싶다.

    ‘ 전 예수님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덜렁이(?) 박나송 가브리엘 인데요. 비슷하게 생긴 정오윤 로마노와 헷갈리지 마세요. 90년 더 살다가 예수님 계신 천상에 가겠어요.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2006년 12월 25일 


   요즘 아이들 90년 더 살다가 천상에 들겠단다.

                                           우리도 건강 유념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