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가 없는 남성 노인 가운데 상당수는 매춘을 통해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는 조사 보고도 있다. 과거도 현재와 비슷한 것 같다. 여러 문헌과 골계를 보면 조선시대의 노인들도 性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성욕과 해소 방법을 탐구해 본다
어려서 들은 이야기다. 먼 윗대에 96세까지 수를 누린 할아버님 한 분이 계셨다고 했다. 다들 ‘참봉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는데, 그분의 장수법에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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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 할아버님은 환갑을 넘긴 뒤로 늘 어린 계집종을 끌어안고 주무셨단다. 그것도 아직 초경이 있기 전 애송이만 가까이하셨다니 듣기에 따라서는 망측한 점도 있다. 어쨌거나 그 덕택에 참봉 할아버님은 혈색이 남달리 좋았고 정력이 절륜했으며 무병장수했다고 한다. 우스갯거리로 이 이야기를 주고받던 집안 어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봉 할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는 세월과 더불어 꽤 윤색된 것 같다. 그럼에도 한가지 속설은 확인해주고 있다. 어린 소녀를 품에 안고 자면 소녀의 젊음이 옮겨져 회춘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전통적 관념에 따르면 흔한 말로 노인은 ‘고개 숙인 남성’ 또는 ‘폐업상태’로 알려졌다. 고개 숙인 남성은 나이와 정비례한다는 것이 속설. 대략 40대에는 40%, 50대에는 50%, 60대에는 60%가 성 불능이라는 것.
혹자는 이를 불에 비유하기도 한다. 30대가 장작불처럼 화끈하다면 40대는 화롯불이어서 오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50대에는 벌써 담뱃불로 전락해 한 모금씩 빨아 줘야 겨우 불길이 꺼지지 않는단다. 그마저 60대가 되면 꺼진 불이 되고 만다.
여성의 경우도 본질적인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폐경(閉經)이 오면 성적 정체성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에는 그 나이를 40대로 보았다. 그 결과 40세 이상 된 여성은 중성으로 취급받았다. 40세 이후부터는 출입 통제가 풀려 바깥 나들이가 자유로워지고 과부인 경우에는 담뱃대를 소지해도 별 흉허물이 되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상실이 도리어 여성들에게 사회적 지위와 자유를 보장한 셈이다.
폐경 이후 여성은 여자가 아니다?
여기서 요점은 노인의 성관계는 ‘주책’ 또는 ‘창피한 이야기’로 간주됐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지적·육체적 능력이 감퇴한다. 그런 점에서 성 능력이 얼마간 저하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조선의 갓 쓴 양반들은 이런 현상을 인정했을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시골에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다복했던지 슬하에 세 딸을 두었다. 첫딸은 집안 형편이 그런대로 넉넉할 때 출가시키게 됐다. 결혼 당시 사위는 혈기방장한 20세 청년이었다. 그 뒤 노인의 살림살이가 갑자기 나빠지는 바람에 나머지 두 딸은 아깝게 혼기를 놓쳐 버렸다. 겨우겨우 둘째딸은 40세 홀아비에게 재취(再娶)로 시집보냈다. 셋째딸은 그마저 어려워 50세 된 늙은이에게 삼취(三娶)로 들여보냈다.
하루는 무슨 일이 있어 세 딸이 모였다. 노인이 기쁜 마음으로 안채로 들어서는데, 세 딸의 이야기 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세 딸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앉았는지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노인은 선뜻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설이다 문밖에 서서 세 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먼저 큰딸이 말했다.
“아우들아! 남자의 양근에는 꼭 무슨 뼈가 있는 것 같지 않니? 뼈가 없다면 어찌 그렇게 야무지고 단단하겠니?”
언니의 말을 듣고 둘째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닌 것 같아요, 언니! 그것이 몰랑몰랑하잖아요? 뼈는 아니고 마치 무슨 부드러운 힘줄 같은 거 같던데요?”
말석에서 조용히 앉아 두 언니의 말을 듣던 셋째는 불만을 터뜨렸다.
“뭐라고요? 딱딱하다느니 부드럽다느니 하셨는데, 언니들 말씀은 하나도 안 맞아요. 우리 남편 물건은 물컹하고 알맹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가죽만 흐물흐물 남아 있는 게 무슨 힘이 있어요?”
막내는 큰언니와 작은언니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세 딸의 이야기를 엿듣던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했다.
“어쩌다 우리 집안 살림이 기울어 둘째와 셋째딸 혼기를 놓쳤던가?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시집보내 힘찬 ‘뼈대의 참맛(骨味)’을 영영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구나. 참으로 원통한 일이로다.”
말끝에 노인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20대 남성은 뼈대의 참 맛을 가졌으나 40대는 그저 그렇고 그런 물렁물렁한 상태라고 보았다. 그나마 50대가 되면 영영 불가하다는 평가다. 이 이야기에는 30대를 고비로 남성의 성 능력은 크게 한풀 꺾여 50대 이후에는 종말을 맞이한다는 통념이 반영돼 있다. 60대 이상은 아예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전제돼 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70∼80세까지도 정상적인 성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통념으로 받아들이던 ‘노인은 중성’이라는 명제는 실상과 거리가 먼 허구라는 것이다.
몇 년 전 노인의 성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가 상영된 뒤 많은 사람이 노인의 성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인들의 규칙적 성생활은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노인 남성은 고환과 음경의 위축이 방지돼 전립선 질환이 예방된다고 한다. 노인 여성은 골다공증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노화도 방지되고 자신감도 높아지며 심폐기능까지 좋아지고 면역기능도 상승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만병통치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제 노인의 성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했다. 노인의 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영양상태가 좋아진데다 평균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부장적 질서가 무너지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데서 비롯된 새로운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 같다.
노인의 성에 대한 현대의 담론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 비해 훨씬 가부장적이었고, 여성에 대한 차별도 강했으며, 영양상태가 상대적으로 불량했던데다 평균수명도 훨씬 짧았던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당시에는 노인의 성이 어떻게 취급됐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당시의 노인들은 성적 욕망 없이 그저 중성적 존재로 살았던 것일까? 노인의 성에 대해 갓 쓴 양반들은 정말 무관심했을까?
우선 <조선왕조실록>을 들춰 보았다. 노인의 성적 욕망에 얽힌 기록이 군데군데 나와 있었다. 마침 중종 29년(1534) 기사에 노인 남성과 노인 여성이 성욕을 비정상적으로 해결했다는 이야기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어전에서 있었던 대화인데, 중종은 어느 시골에서 사위가 늙은 장모와 간통한 사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헌납 김광준은 자신이 경기도사(京畿都事) 시절 직접 다룬 사건을 말한다. 70여 세의 백발노인이 40세도 넘은 딸을 간음했다는 것이었다.
백발노인은 딸과 사위를 한집에 거느리고 살았다. 평소 사위가 졸렬한 사람이라고 얕보았는데 “문득 음욕이 생겨 도저히 참을 길이 없어 간음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 딸의 말은 어떤가? “어머니와 한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범했다. 부끄러워 고함을 지르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하는 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중종 29년 윤2월12일)
백발노인에게는 엄연히 늙은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무슨 사정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백발노인은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이미 초로에 접어든 딸을 선택했다. 사위와 간통했다고 적발된 늙은 장모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장모는 과부가 아니었지만 남편보다 젊은 사위를 원했던 것이다.
10대 소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독일의 문호 괴테(왼쪽)와 노년에 젊은 하녀와 관계한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극작가인 빅토르 위고.<사진:중앙포토> |
백발노인이나 장모는 이미 노년이었지만 성적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사위 또는 딸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파트너를 찾기가 불가능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건강한(?) 욕망은 적절한 배출구를 찾지 못해 결국 사회적 지탄을 낳고 말았다.
잠시 문제의 백발노인과 장모의 환영을 걸고 가상 대담을 나눠 보자.
백발노인: 아무리 생각해도 반사회적 인물로 치부된 우리 두 노인네는 정말 불행했소. 할미와 내가 처벌받은 것은 결국 우리가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 아니겠소? 역사상 내로라하는 영웅호걸들은 우리처럼 노인이 된 다음에도 성적 욕망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었소.
장모: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기 어렵소만 사실이지요. 저승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우선 중국 고대의 진시황(秦始皇)이 그랬고, 수양제(隋煬帝)나 당현종(唐玄宗)도 노익장을 과시했다고 하더군요. 본래 아들의 짝이던 며느리 양귀비를 가로채 향락을 즐긴 당현종 이야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요. 당현종의 할머니 측천무후(則天武后)도 말년까지 성적 쾌락을 마음껏 누렸다니 참 대단한(?) 집안이었어요!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외도했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으니 정말 억울해요.
성욕 추구에도 차별이 있다니
백발노인: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더니 가관이오. 그건 그렇고, 서양에서도 영웅들의 호색은 나이를 초월했다오. 심지어 문사들까지 그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다고 했소. 독일의 문호 괴테는 70대의 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대 소녀 뷔르리케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빅토르 위고도 늙은 나이에 젊은 하녀의 육체를 탐했다고 전하오. <좁은 문>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 작가 앙드레 지드 역시 칠순에 애정행각을 벌였다오.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도 네 번이나 결혼식을 올리며 사랑을 위한 행진을 계속했다고 하오.
장모: 조선시대 유명한 성리학자들도 아마 비슷하지 않았을까 해요. 미암 유희춘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솟구치는 성욕에 시달렸다고 일기에 적어 놓았다고 해요. 그는 기생들에게서 얻은 화류병을 초로의 부인 송덕봉에게 옮기기도 했다니, 나 원 참! 퇴계 이황 선생에 대해서도 ‘밤 퇴계’와 ‘낮 퇴계’가 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지요? 낮에는 엄숙 단정한 학자였지만 밤에는 누구 못지않게 용맹한 남성이었다는 말인데, 그분의 배필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부러워 죽겠어요.
백발노인: 하여간 권세 있는 노인들은 정력을 보강하느라 부심했소. 그들은 온갖 정력제를 즐겨 찾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전설적 효능을 보장하는 최고의 식품은 곰발바닥이었다오. 중국 고대에 폭군으로 악명이 높았다는 걸왕은 애첩 매희를 위해 곰발바닥을 즐겨 찾았다는 말이 있소. 왕은 옥으로 된 술잔에 연거푸 술을 부어 마시며 곰발바닥을 안주로 들었다는데, 그는 특히 오른쪽 앞발바닥을 좋아했다지요? 알다시피 곰은 꿀을 좋아해 오른쪽 앞발로 벌집을 건드리는 습관이 있소. 그때 수많은 벌이 오른쪽 발바닥을 쏘게 마련이어서 자연히 꿀벌의 좋은 성분이 박혀 최고의 정력제가 그 발바닥에 형성된다고 보았던 거요.
장모: 우리 같은 평민들이야 감히 꿈도 못 꾸었지만,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뱀장어 백숙, 홍삼·사슴피 등을 정력제로 복용했다면서요? 부와 권력을 한몸에 지닌 남성들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성적 쾌락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요?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도 따로 특권층이 있고 우리 같은 평민, 그중에서도 여성은 이중으로 소외된 것이지요. 정말 억울하고 부럽기 짝이 없어요.
백발노인과 장모의 말이 그럴 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설사 특권층인 양반 남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생리적 노쇠현상은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때는 아직 ‘비아그라’ 같은 약이 나오기 전이었다.
어느 늙은 양반이 어린 첩을 몹시 사랑했다. 어린 첩을 찾아간 노인은 마음이 부풀어 올라 첩의 손목을 부여잡고 운우의 정을 나누려고 했다. 다른 것은 다 준비됐는데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고약하게도 노인의 양물이 문제였다. 주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힘없이 축 늘어져 도무지 애첩의 파릇한 음문을 파고들어가지 못했다.
노인은 꾀를 냈다. 물건을 자기 손으로 쥐어 조금씩 몸을 틀어가며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그는 첩의 배 위에 납작 엎드려 공작을 시작했다. 한참을 시도하다 “이제 좀 들어갔느냐” 하고 물었다.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노인은 다시 몸을 일으켜 거듭 손으로 감싼 다음 다시 꽂으려고 엎드렸다.
“어때 조금 들어갔느냐?”
“아직도 아니옵니다.”
몇 차례나 반복을 거듭했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노인은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지고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여태껏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냐?“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노인은 애첩에게 물었다. 어린 첩은 노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옳은 대답이 꼭 옳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예! 이제 겨우 조금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애첩이 목소리를 명랑하게 꾸미고 대답했다.
노인은 즐거워 어쩔 줄 몰랐다. 이때 노인의 양물은 실상은 방바닥에 닿아 있었다. 차츰 방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물건에 느껴졌다. 하지만 노인은 자기 물건이 애첩의 꽃다운 음문 속에 꽂혀 있는 줄로만 믿었다.
“아 참, 네 음문은 여름철에 시원해서 참 좋겠구나!”
생각하면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우선 노인은 불끈 일어서지도 않는 양물의 소유자인데 무슨 속셈으로 어린 첩을 거느리느냐는 것이다. 노인의 부질없는 허영심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법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전파한 갓 쓴 양반들은 노인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했고, 그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았나 싶다. 그놈의 양물이 말을 안 들어 탈이지, 애첩을 향한 사랑이야 그 노인이라고 해서 덜할 리 없었다.
성적으로 무능해도 노인은 애첩과 사랑을 나눌 권리가 있었다. 갓 쓴 양반들은 그 점을 인정했기 때문에 노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고 본다. 어찌 보면 노인 양반보다 훨씬 현명한 이는 어린 애첩이었다. 그는 양반들의 멸시를 받는 하층 신분 출신이었고, 사회 통념상 열등하게 취급받는 여성이었다. 그렇건만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어린 애첩은 현명한 어머니 같고, 권세 있는 노인 양반은 엄마에게 보채는 어린아이 모습이다.
수천 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진시황. |
사회적으로는 현격하게 저열한 위치에 있는 애첩이 노인 양반을 포근히 감싸 안아 위로해 준다. 이것은 분명 조선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유교적 가치관이 전도된 모습이다. 갓 쓴 양반들은 일면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이고 배타적 신분질서를 옹호했지만, 그 틀을 넘어선 더 근원적 가치가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런 인식을 체계적으로 심화할 기회를 애써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또 하나.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갓 쓴 양반들의 성 인식은 너무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인 노인 양반의 만족에만 집착한다. 어린 애첩이 성적 쾌락을 맛보았는가 하는 부분은 완전히 외면한다. 양반들의 자기중심적 경향은 끝 간 데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갓 쓴 양반들은 노인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정말 무심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양반들은 폐경기의 여성은 더 이상 성적 호기심조차 없을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많은 양반노인들은 버젓이 늙은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젊은 첩을 두었던 것 아닐까?
한 젊은 양반이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술집의 젊은 여인에게 반했다. 젊은 양반은 여인에게 밤에 어디서 자는지 물었고, 여인은 뜻이 있었는지, 순순히 대답해 줬다. 그들은 밤에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 그날 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명령으로 다른 방에서 자게 되었다. 여인이 일러준 처소에서는 시어머니가 잠자리를 폈다. 시어머니는 초롱불을 끄고 홀로 누웠다.
이런 영문을 알 리 없는 젊은 양반은 시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양반은 무릎을 꿇고 시어머니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젊은 여인의 살결과 달리 까칠한데다 음문이 쪼글쪼글해 양반의 성난 물건을 꽂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에 불타오른 양반은 결국 두 손가락으로 음문의 주름진 부분을 잡아 젖힌 다음 가까스로 양물을 틈으로 깊숙이 들이밀었다.
시어머니는 몸과 마음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속된 말로 영감 죽고 나서 처음이었다. 시어머니는 손으로 양반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가 빠져 바람이 새는 소리로 감탄을 연발했다.
“양반의 젊은 자제라 신을 신는 법을 무척 잘 아시네!”
그제야 양반은 방을 잘못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즉시 몸을 빼내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았다.
이처럼 갓 쓴 양반들은 노인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뿐인가? 여성의 성기가 노년에 어떤 특성을 지니게 되는지도 분명히 알았다. 그에 더해 노년 여성과의 성교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 그 문제를 나름대로 극복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 이야기는 욕정에 어두운 젊은 양반을 비꼬는 듯하면서도 실은 노인 여성의 성적 욕구 또는 불만을 거론하는 계몽성이 있다.
거지 총각이 추운 겨울에 길가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길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한밤중이 되었다. 할머니가 자다 말고 숨이 답답해 눈을 뜨고 보니 총각이 자기 배 위에 올라탄 참이었다. 할머니는 화가 나서 버럭 성을 냈다.
“이놈아! 어디서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네놈을 형조(刑曹)에 고발해 죄를 엄히 다스리게 하고야 말겠다.”
하지만 총각은 아무 대답도 없이 양물을 자꾸 앞뒤로 움직였다. 할머니는 몸이 점점 뜨거워지며 마음이 달뜨기 시작했다. 그것을 총각은 정확히 눈치챘다.
“그럼 저는 이제 그만 빼고 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할머니는 더욱 역정을 냈다.
“네가 정말 그렇게 할 양이면 당장 포도청에 알릴 거야!”
“이게 바로 옛말에 이른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는 것이군요.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네요.”
할머니는 총각에게 입을 다물고 좀 더 빨리 움직이라고 몸으로 뜻을 전했다. 처음에는 총각 혼자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둘이 다정하게 같이 끝을 보았다.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뜻을 음미할 때 다시 패륜으로 처벌된 백발노인과 장모가 등장했다. 그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각자 논평을 가했다.
노인 성 문제를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 한 장면. |
장모: 백발노인도 역시 한심한 조선 남성이군요. 이봐요. 노인 여성의 성은 결코 그렇게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라오. 갓 쓴 양반을 포함해 남성들은 왜 하나같이 우리 여성을 수동적 또는 피동적 존재로만 인식하는지 모르겠소.
문득 이때 머리를 스쳐가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의 갓 쓴 양반들이 할머니들의 욕망을 제대로 인식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 골계다.
어떤 젊은이가 이웃 노파에게 물었다.
“성적 충동은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나 강하다면서요? 할머니! 그 말이 정말 사실일까요?”
할머니는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남성의 성욕이 여성보다 적어도 두 배는 세다고 고집했다. 청년은 부러 할머니의 화를 돋우면서 고집을 꺾지 않을 듯 굴었다. 할머니는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그럼 내기를 해 보자. 뉘 말이 맞나 보자!”
청년의 꼬임에 할머니는 넘어가고 말았다. 청년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안 그런 체했다. 두 사람은 벌거벗고 드러누웠다. 청년은 할머니의 몸을 이리저리 어루만져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할머니! 지금부터 저는 ‘보국숭록대부영의정’이라는 말을 외워댈 테니 할머니는 무엇을 외우시렵니까?”
할머니는 생각 끝에 “숙부인강씨강아지”를 되뇌기로 했다. 청년은 할머니의 배 위에서 신나게 오르내리는 운동을 했다. 할머니는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자기가 할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전진후퇴의 속도가 빨라지자 흥분이 심해졌다. 할머니는 이제 허리를 상하좌우로 흔들면서 한다는 말이 “아지아지아지” 소리만 연발할 뿐이었다. “숙부인강씨강”은 오간 데 없었다. 청년이 힐책했다. 그리고 마지막 고지를 향해 질주했다. 할머니는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흔들더니 마지막에는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이 말이 끝나자 백발노인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한다. 마치 자기가 그 청년이 되기라도 한 듯 즐거운 표정이 역력하다. 장모는 그것 보란 듯이 말한다.
“할머니가 내기에 진 것은 못내 아쉽지만 이것으로 우리 노인 여성들의 욕망은 복권됐어요. 완전히 인정받은 것이라고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정말 옛날 책에 나오나요? 갓 쓴 양반들이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고요?”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허리를 잡고 유쾌하게 웃는다. 성담론이란 이런 것 아닌가?
월간중앙 2005년 07월 01일 356호 / 2005.07.12 10:24 입력 / 2005.07.12 10:24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