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이덕무, 책에 미친 바보,

tlsdkssk 2006. 1. 2. 06:26
이덕무, <책에 미친 바보>, 권정원옮김, 미다스북스, 2004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고서, 멀지만 않은 우리의 고전을 생각해봤다. 너무 익숙하고, 너무 오랫동안 은연 중 교육된 서양문화권의 책들보다 비교하여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공감대가 많았을 과거의 어떤 이는 이렇게 살았구나를 조금 체험하게 된다. 글을 통해 보면, 그는 큰 사건을 만들지도 않고 군자의 도에 충실하려는 삶, 매일 책을 읽고 절도를 지닌 삶을 살았다. 생활력 없는 유생의 삶에서 오는 비애, 학문하는 태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보기에 좋았다. 무엇을 할 수 있다기보다는, 주어진 삶에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는 옛 선비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진다. 일을 저질러야하는 지금 사회에서는 꼭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남의 일만도 아니라 생각한다. 먼저 스스로 자처하는 '책에 미친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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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看書恥傳
목멱산 아래 어리석은 사람 하나가 살았다. 말씨는 어눌하고, 성품은 졸렬하고 게을러 세상 일을 알지 못하였으며, 바둑이나 장기 같은 잡기는 더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았고, 칭찬을 하여도 잘난 척하지 않았으며, 오직 책 보는 일만을 즐거움으로 삼았기에 춥거나 덥거나 배고프거나 병드는 것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선인들의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그래도 동, 서, 남쪽 삼면에 창이 있어, 동에서 서쪽으로 해 가는 방향을 따라 빛을 받아가며 책을 읽었다. 행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대하게 되면 번번이 기뻐서 웃고 했기에, 집안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면 기이한 책을 얻은 줄 알았다.
특히 두보杜甫의 오언율시를 좋아하던 그는 골똘히 시를 생각할 때면 앓는 사람처럼 읊조리기도 하였다.그러다가 심오한 뜻을 깨치기라도 하면 매우 기뻐하며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기도 하였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가마귀가 우짖는 듯하였다. 때로는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때로는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책에 미친 바보看書恥"라 불렀지만 그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전기傳記를 지어주는 이가 없기에 붓을 들어 그 일을 쓰고는 「간서치전看書恥傳」이라 하였다. 그의 이름과 성은 기록하지 않는다.(2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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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주는 벗]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 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다음,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예스러운 옥으로 막대를 만들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뾰족뽀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 그사이에 펼쳐놓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간절히 원하지만 다정한 벗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없는 마음은 꽃가루를 묻힌 나비를 맞는 꽃과 같다. 나비가 오면 너무 늦게 온 듯 여기지만 조금 머무르면 소홀히 대하고, 그러다 날아가 버리면 다시 나비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움이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지극한 즐거움은 드문 것인가? 이러한 즐거움은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올 뿐이다.
눈 오는 새벽이나 비 내리는 밤에 다정한 벗이 오지 않으면, 누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것인가. 시험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면 듣는 것은 나의 귀요, 내 손으로 글씨를 쓰면 구경하는 것은 나의 눈이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될것이다. 책이 없다면 구름과 노을이 내 벗이요, 구름과 노을이 없다면 하늘을 나는 갈매기에 내 마음을 맡기면 된다. 갈매기마저 없다면 남쪽 마을의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친해지면 될 것이고, 원추리 잎새 사이에 앉아 있는 귀뚜라미도 구경하며 좋아할 만하다. 내가 아끼더라도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이 모두가 나의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끼니마다 밥을 먹고, 밤마다 잠을 자며, 껄껄대며 웃고, 땔나무를 해다 팔고, 보리밭을 김매느라 얼굴빛은 새까맣게 그을렸을지라도 천기天機가 천박하지 않은 자라면, 나는 장차 그와 사귈 것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은 존경하고 사모하며, 나와 같은 사람은 서로 아껴주고 격려해 주며, 나만 못한 사람은 불쌍히 여겨 가르쳐준다면 이 세상은 당연히 태평해질 것이다.(117-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