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서남준 | 음악평론가
현대 유럽의 문화 속에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그 뿌리를 둔
것이 수 없이 살아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를 계승한 고대
로마에 이어지고 오늘의 유럽 문명을 형성하는 핵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의 신화나 전설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풍부하게 표현되어 왔고, 영화예술의 발달과 더불어 스크린에도 수
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줄스 다신감독의 영화 ‘페드라’(Phaedra, 1962)는
그리스의 전설을 그대로 현대로 가져온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이야기가 나온다. 신들의 사랑, 영웅의 사랑,
지순한 사랑, 사련(邪戀)의 비극 등등, 모두가 인생의 깊이를
더해주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 많은 연인들
중에서도 가장 뜨겁게 사랑을 불태운 연인은 페드라와 알렉시스가
아닐까. 금단(禁斷)의 사랑을 했으니 말이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의
딸인 페드라는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후처가 되었는데, 전처의
아들 히폴리티우스에게 연정을 품는다. 유리피데스의 비극에서
히폴리투스는 테세우스와 아마존 여인인 히폴리타의 아들로 되어
있다. 젊고 잘생긴 히폴리투스는 아테네에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도 사연이 있다. 그러나 히폴리투스는 결백한
청년이었다. 페드라가 욕정을 고백하자 너무나 역겹다는 반응을
나타내었고 애정을 거부 당한 페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자식들의 장래를 망쳐 놓을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고만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히폴리투스가 자기를
범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절대 얘기하지 않겠다고 한 페드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히폴리투스는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분노한 테세우스는
히폴리투스를 추방하고, 포세이돈이 그에게 준 저주 가운데 하나를
내린다. 히폴리투스가 얼마 길을 가지 않았을 때, 몸집이 큰 소가
바다에서 불쑥 솟아 오르고, 히폴리투스의 말들은 겁을 내서 결국
마음대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사납게 날뛴다. 말들은 마차를 부숴
놓고 히폴리투스를 끌고 다녀 죽게 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가. 그러나 고대의 비극시인들은 결코 페드라를 악녀로
그리지 않았다. 비극의 원인은 자신을 소홀히 했던 히폴리투스에
대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이었다고 설명한다.
영화 ‘페드라’의 아이디어를 감독 줄스 다신에게 준 사람은
그리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말가리타 리베라키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이나 왕을 등장시켜 비극을 꾸며냈지만 오늘날에는
그들 신이나 왕은 전과 같은 의미를 잃어 버렸으므로 새로운 강자(强者)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왕은 누구인가?
그리스에서는 선주(船主)들이 왕에 견줄만한 권력을 갖고 있고,
그리하여 줄스 다신과 말가리타 리베라키는 왕을 대신해서 현대
그리스의 해운제국 속에 페드라를 탄생시켰다. 그리스 해운 왕의 딸
페드라(멜리나 메르꾸리)는 아테네에 본사를 둔 그리스 해운계의
실력자 타노스(라프 발로네)와 결혼한다. 페드라는 30대 한창 나이의
여인으로 어디에 있어도 남의 눈을 끄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다. 다섯 살 자리 아들을 가진 그녀지만 페드라에게는
아들이 또 한명 있다. 타노의 전처였던 영국 여배우 사이에서 낳은
24살 난 알렉시스(안소니 퍼킨스)다. 알렉시스는 런던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계모를
미워해 그리스로 돌아 오려고 하지 않는다. 타노스는 아내를 시켜
아들을 데려오도록 하기 위해 페드라를 런던으로 보낸다. 그러나
런던 박물관에서 알렉시스를 처음 만난 순간, 페드라는 젊고 순진한
그를 사랑하게 되고 알렉시스 역시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계모에게 매혹되고 만다. 파리로 간 두 사람은 이성과 예지를
완전히 불태우는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마침내 비극을 초래한다.
페드라는 남편 타노스의 애무의 손길을 뿌리 치면서 알렉시스를
향한 사랑과 죄의식에 떤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노스는
알렉시스에게 귀국 선물로 스포츠 카를 사준다.
포장된 스포츠 카를 보고 있던 노인(줄스 다신)이 중얼
거린다. “ 꼭 관(棺)같구먼...” 이성이란 원래 사랑을 다듬지
못하는 법이지만 아버지의 명령으로 처형(妻兄)의 딸 엘시와 강제
결혼을 하게 되는 알렉시스를 보고 질투와 절망감으로 이성을 잃은
페드라는 파국에의 길을 열고 만다. 페드라는 남편에게 알렉시스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망연자실한 타노스의 놀람은 마침내
분노로 변하고 알렉시스를 불러 인장을 새긴 반지로 그를 구타한다.
“난 다시는 페드라의 얼굴을 보지 않겠어요. 난 페드라가 죽어
버리길 바래요... 나는 스물 네 살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스물 네
살요....” 피투성이의 알렉시스의 얼굴을 물로 씻어 준 페드라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깨닫는다. 그녀는 눈가리개로 얼굴을 덮은 다음
수면제를 먹고 침대에 눕는다.
바로 그 순간
알렉시스는 무서운 속도로 스포츠 카를 몰아 푸른 에게해가 보이는
깍아지른 벼랑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라디오에서 볼륨
가득히 울려 퍼지는 바흐의 멜로디를 소리 높이 노래한다. 그것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Tocata & Fugue, F Major BWV
540)였다. 알렉시스가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져 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추출되는 것은 결코 운명론적인 체념이 아니리라. 그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과 사, 사랑, 슬픔, 노여움, 미움 같은
심정의 연소가 강렬하게 클로즈업 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바흐는
알렉시스의 죽음을 넘어선 해방과 정화(淨化)로의 동경을 노래한다.
모든 삶의 희로애락이 가슴을 파고드는 바흐의 음악 속으로
녹아드는.... “그녀는 날 사랑했어! 그녀는 날 사랑했어!”갑자기
전방에 나타난 트럭을 피하려던 알렉시스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간다. ‘페드라! 페드라!...“ 알렉시스의 스포츠 카는 관으로
변했다. 페드라와 알렉시스, 순결한 동경에서 시작되어 이성과
예지를 모두 불태우는 숙명적 사랑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같은
순간에 함께 승천한다. ‘죽어도 좋아’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이다. 아마도 이런 류의 연애는 죽음도 마다않은 각오가
아니면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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