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스크랩] 술 먹으면 꼭 전화질 하는 놈들이 있어요, 외롭다고/김훈

tlsdkssk 2005. 8. 21. 22:18

 

 

결핍 없이는 세상을 알 수 없다


남재일/글을 읽을 때마다 두 가지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개별적인 대상을 냉혹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하나고, 나머지는 대상을 모르는 아주 맹목적이고 강한 그리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 그리움의 지향 혹은 정체가 뭘까 궁금합니다.

 

 

김  훈/그건 아마 결핍일 겁니다.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나잖아요?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마초 소리를 듣고 사는데, 근데 그 마초라는 것이 그 남자가 갖고 있는 결핍을 말해요. 자기가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이 숙명적인 결핍이고 그 결핍의 힘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해나가는 거지. 내가 충만하고 결핍되지 않고 아무런 그리움이 없는 자라면 난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을 거잖아요. 그건 결핍의 힘이야. 한데 결핍은 '경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뭘 결여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지. 사실, 여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 본래 그 무엇이 결핍된 채 태어나지 않나. 그런 것들이 아마 세계를 이해하는 내 감성의 기초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개>를 쓸 때 생각한 건 인간과 세계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미디어, 책, 관념, 상징, 추상, 언어 이런 것들을 몽땅 걷어내버리고 존재와 세계를 직접 맞부딪치게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처음에는 사람으로 설정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개로 바꾸었어요. 전략적인 후퇴이고 교활한 탈바꿈이죠. 사람으로는 도저히 승부가 안 나니까 사람이 가장 무책임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게 개잖아. 개의 내면에 대해서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으니까. 개로 바꾼 것은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내 자신의 절망감 같은 것이지.

 

 

남재일/싫어하는 것들이 뭔지는 알겠습니다. 뭔가 그리워한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작품에 거의 잘 안 나오거든요….

 

 

김  훈/자전거, 연장, 공구, 등산 장비를 좋아하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흠, 이게 지금 영화잡지잖아. 영화야. 영화관에 가본 적이 거의 없어요. 영화가 싫어서 안 가는 게 아니라, 아니 그것도 물론 싫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것이 영화관이라는 공간이야. 들어가면 컴컴한데 수백명이 앉아서 이놈 저놈 냄새 막 나고 그런 공간을 문 열고 들어가기가 나로선 불가능해. 난 놀 때는 꼭 강가로 들로 나가서 혼자서 뛰어놀거나 자전거 타고 놀아요. 기운이 없을 때는 바람 불고 물 흐르는 데 가서 멍청하게 앉아 있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영화에 미쳐가지고 영화라면 항상 신바람이 나 있어. 딸아이가 영화 찍는다고 해서, 돈을 1천만원을 줬거든. 10분짜리 만드는데 그렇게 든대. 현장에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한놈이 막대기에 걸레 같은 걸 달아서 들고 있더라고. 그게 마이크래. 그놈이 만든 영화를 봤어. 제목이 '일상에 대한 구토'야. 거기 나오는 아빠가 일상에 매몰돼가지고 머리맡에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가 있고 관념과 추상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 자막에 '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뜨더라고. 돈 받아다가 지들끼리 논 거야. 신바람이 나니까. 그리고 영상이 나오잖아. 소설은 영상이 안 나오지. 대학에서 배운 게 해체주의래. 탈근대, 포스트모던 해체주의, 그런 게 다 뭐냐 그랬더니 가족을 해체하고 정치제도를 해체해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그래. 가족을 해체한다면서 1천만원은 왜 나한테 달래?

 

 


몸에 대한 신비감, 생명이 작동한다는 게 놀라운 일


남재일/혹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은 보셨습니까?

 

 

김  훈/나는 드라마 안 봐요. 딱 하나 본 것이 이덕화 나온 거, <제5공화국>

 

 

남재일/<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조금 뚱뚱한 여자가 나와서 바른말 해갖고 굉장히 인기가 있었거든요? 요즘은 몸이 지대한 관심사인데, 그건 어떻게 보십니까?

 

 

김  훈/난 젊었을 땐 사람의 몸에 대한 신비감을 느꼈어요. 양감이나 조각적 아름다움보다 인간의 몸이 살아서 밭에서 기계적으로 작동하고 노동하는 것을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해부학책도 많이 봤고…. 근데 그런 해부학적 사실보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작동한다는 게 놀라운 일이었어요. '본다'는 행위를 예를 들면, 안구를 분석해도 '본다'는 것이 검증되는 게 아니야. '본다'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총체적으로 작동되는 종합적인 행위인 것이죠. 몸놀림이 다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몸이 자꾸 물신화, 대상화되잖아요. 그건 노예가 되는 거죠, 시각의 노예.

 

 

남재일/<개>를 보면 몸을 묘사할 때 '똥구멍'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몸 중에서도 하필 그걸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까?

 

 

김  훈/인간의 추악한 성질 속에서 아름다움을 입증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의무겠죠. 인간이 인간인 이상 아름답다는 것을 입증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것은 홀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추악함과 더러움과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질서, 먹이다툼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남재일/살면서 어떤 유형의 인간을 아름답다고 느꼈습니까?

 

 

김  훈/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더럽혀지는 인간들이 아름답지. 인간은 반드시 더럽혀지게 돼 있으니까. 더럽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면 신뢰가 가지 않죠. 살아 있다는 건 더러운 세계와 타협하고 흥정했다는 거니까.

 

 


그 빌어먹을 놈의 연애, 외로움


남재일/연애나 사랑에 대해 거의 안 쓰시지 않습니까? 원래 경험이 없어서 안 쓰는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나이 들어보니 그것들이 웃겨서인가요?

 

 

김  훈/난 스물네 살에 조혼을 했고,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에 노동이 애인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는 게 공허하다고들 느끼면 그걸 다 연애로 해결하려 들어. 온 나라가 연애중독에 걸린 거 같아. 그 빌어먹을 놈의 연애, 아이고…. 일부일처제라는 것이 야만 제도이기 때문에 인간이 승복할 수 없지만 부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 문명 전체가 부서지는 거니까. 일부일처제는 지금 사실 형해만 남았지. 그럴수록 인간은 그 형해를 강화하겠죠. 삶은 공허해지고 연애는 탈출구처럼 유혹할 거고…. 어쩔 수 없는 거죠, 연애.

 

 

남재일/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통 언급이 없으시네요.

 

 

김  훈/나는 개인적인 연애나 치정의 경험이 없어요. 어찌 보면 불구자지. 나는 남자가 좋았어요. 군대가니까 좋더라고. 남자들이 수북이 모여서 서로 욕하고 싸움하고 상소리하고 아무 데나 주저앉고, 아무거나 집어먹고. 육군 졸병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잖아. 욕이나 하고 주는 대로 먹고 훈련하고 땀냄새 나는 게 좋았어요.

 

 

남재일/기자 생활에 견주어 작가 생활은 어떤가요? 일상적인 생활의 패턴은 어떻습니까?

 

 

김  훈/주로 놀죠. 하루 세 시간 이상 일을 못해요. 자전거 타고 나가거나, 한강 하구쪽으로 가서 들에서 놀아요. 저녁 때 술먹고, 운동량은 많은 편이죠. 요새는 비가 와서 못 나갔는데, 심심풀이로 나가면 70~80킬로미터는 갔다오고 맘먹으면 200킬로미터도 가고.

 

 

남재일/혼자 시간을 잘 보내시네요. 외로움을 별로 안 타시는 건가요?

 

 

김  훈/외로움? 난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좌중 폭소) 어떤 놈이 '외롭다'고 써놓으면 뭔지를 모르겠어. 무슨 심적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나? 사전을 찾아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적적한 것이다'라고 돼 있더구먼.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내 느낌은 존엄함과 충만감이지. 외롭다는 것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연애하는 애들 글을 보년 연애하는 핑계가 백이면 백 외로움이더구먼. 그게 뭔 호들갑인지 모르겠더라고. 혼자 가만히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자신감 속에서 그게 편안하지가 않은 모양이야. 술먹으면 꼭 전화질 하는 놈들이 있어요, 외롭다고.

 

 

 

 

 

 

*졸면서 대충 페이지 넘기다가 김 훈 선생님을 만났네요. 후텁지근한 날씨도 잊을 정도로 정신이 번쩍! 아직도 서늘하고 기분 좋습니다. 씨네21 '몽당연필을 든 무사'에서 옮겼습니다.

 

 

 

 


 

출처 : 술 먹으면 꼭 전화질 하는 놈들이 있어요, 외롭다고/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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