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문학노동자 발자크의 커피

tlsdkssk 2019. 12. 27. 00:32




거장의 커피

발자크의 커피

발자크, 문학노동자의 카페인 수혈  

Photo by  Mike Kenneally  on  Unsplash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 1850)는 하루 50잔이 넘는 커피를 마시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다. 어떤 날은 하루에 80~100잔의 커피를 마셨는데, 한 통계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51세에 생을 마친 발자크가 이렇게 평생 마신 커피가 무려 5만 잔에 이른다.

 

카페인 수혈

발자크는 밤낮이 바뀐 삶을 살았다.

"한밤중에 일어나 여섯 자루의 촛불을 켜고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4시간에서 6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간다. 체력에 한계가 온다. 그러면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이 커피 한 잔도 계속 글쓰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다. 아침 8시에 간단한 식사. 곧 다시 써내려 간다. 점심시간 때까지. 다시 식사, 커피. 1시부터 6시까지 또 쓴다. 도중에 커피." (슈테판 츠바이크, <발자크 평전> )

발자크는 새벽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집필, 커피, 집필, 커피의 반복이었다. 글을 노동하듯이 썼다고 해서 문학 노동자라고 불렸다.

 

커피로 쓴 작품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등이 포함된 90여 편의 작품을 묶어 <인간희극>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등장인물이 어마어마하다. 우리나라 소설 중에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은 박경리의 <토지>, 62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아시아에서 등장인물이 가장 많은 작품은 나관중의 <삼국지> 1119명이다. 발자크의 <인간 희극>엔 삼국지보다 2배 이상 많은 2472명이 등장한다. 발자크를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소설의 계보도 없이는 파악이 불가능할 만큼 방대하면서도 생생한 묘사가 뛰어나 사실주의 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이런 엄청난 창작활동에 집중력과 창의력, 에너지 공급원은 커피였다. 발자크가 쓴 커피에 대한 글을 보면 그가 작품을 쓸 때 커피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커피란 것은 위 속에 떨어지자마자 새로운 생각들이 마치 전쟁터에 나선 나폴레옹의 군 부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전투를 개시한다. 기억이 바람결에 군기를 휘날리며 군마들처럼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비유는 경기병처럼 웅장하게 진군할 전열을 정비하고, 논리의 포병대가 화약과 탄약을 가지고 잽싸게 그 뒤를 따르면, 저격병의 총알처럼 날카로운 위트의 화살이 하늘을 난다. 직유가 샘솟고 종이는 검은 잉크로 물든다. 일단 창작의 몸부림이 시작되면 검은 물이 소용돌이치며 끝을 맺는다. 마치 초연에 뒤덮인 전장처럼’ - <현대 흥분제에 관한 고찰>

이렇게 커피를 마시고 창의적 에너지가 흐르면 발자크는 온 밤 글을 쓸 수 있었다.

 

카페인이 일하지 않는 시간

발자크는 창작기간엔 물과 커피, 과일 등으로 연명했다. 하지만 최종 원고가 인쇄업자에게 넘어가면 식도락을 즐겼다. 원고를 넘긴 발자크는 레스토랑으로 달려가서 먼저 굴 100개를 주문했다. 100개를 화이트 와인 4병과 함께 먹어 치운 후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는데, 해수 목초지에서 키운 양고기 커틀릿 12조각, 순무를 곁들인 새끼 오리 요리와 오븐에 구운 자고새 한 쌍, 노르망디산 넙치, 거기에 디저트와 코미스 배 같은 특별한 과일을 주문해 12개씩 먹었다. 이렇게 실컷 먹고 난 후 계산서는 출판사로 보냈다.

프랑스의 시인 테오필 고티에는 발자크가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내고 독한 부르레 화이트 와인 4병을 마시며 자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와인을 4병이나 마셔도 발자크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고 유쾌함은 더욱 빛났다고 한다. 고티에는 발자크가 오랫동안 커피를 마셔왔기 때문에 와인에 취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발자크의 작품과 음식

19세기 파리는 유럽의 미식 도시였다. 발자크가 살았던 시대는 레스토랑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였고 발자크에게 음식은 중요한 주제였다. 발자크의 소설 속 인물의 성격은 그들의 행동, 옷차림뿐만 아니라 어떤 카페를 가는가, 어떤 레스토랑의 단골인가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발자크는 음식의 맛 자체를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발자크의 식탁> 저자 앙카 멀스타인에 따르면,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굴의 맛을 감상하고 싶다면 모파상을 읽어야한다. 노란 크림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꿈꾼다면 플로베르를, 소고기 젤리를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럽다면 프루스트를 읽어야 한다. 하지만 굴의 맛보다는 굴을 주문하는 젊은이의 취향에 흥미를 느끼고 차갑고 달콤한 크림의 맛보다는 그 크림의 가격에 관심이 간다면, 입안에서 녹는 고기 젤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가계 형편에 관심이 간다면 발자크를 읽어야 한다.

 

발자크 시대의 커피

이 시대의 커피는 이미 모든 사회 계층이 즐기는 음료였다. 파리 사람들은 종일 커피를 마셨고 도시 어디서나 커피를 구할 수 있었다. 시장이 문을 열면 여자들은 양철 단지에 든 커피를 등에 지고 나와 작은 도기 잔에 따라서 행인에게 팔았다. 아직은 커피에 설탕 넣는 일이 흔하지 않았고 대신 우유를 넣은 카페오레를 즐겨 마셨다.

 

발자크의 커피

그러나 발자크가 집필 중에 마신 커피는 밀크 커피가 아니었다. 이 시대 프랑스 사람들은 샤프탈식 커피메이커, 즉 용기 2개가 필터로 분리된 커피메이커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발자크는 드립식 커피인 뒤 벨로이 방식을 선호했다. 필터를 이용해서 아주 진한 커피를 내렸는데,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말에 따르면, 커피를 마신 후에 바짝 긴장하게 되고 흥분한 상태를 발자크가 즐겼다고 한다.

발자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피의 도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고 믿으며 더 진한 커피를 마셨다. 속을 쥐어짜는 것 같은 끔찍한 경련이 와도, 눈이 씰룩거리고 위장이 타는 듯해도 주전자 가득 커피를 마셨다. 발자크에게 커피는 "정신의 명민함을 되찾기 위한 잔인한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커피나 진하게만 마신 건 아니었다. 발자크는 질 좋은 커피를 구하기 위해 파리 시내를 샅샅이 뒤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발자크는 부르봉, 마르티니크, 모카까지 세 가지 원두를 사용해 커피를 내렸다. 부르봉은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즐겨 마셨던 커피다. 마르티니크는 루이14세의 파리 온실에 있던 묘목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섬에 정착한 커피다. 부르봉은 몽블랑 가에서, 마르티니크는 파리 제3구의 비에유 오드리에트 가에서, 모카는 생 제르멩 근교의 위니베르시테 가에서 샀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한나절을 꼬박 투자해야 하는 원정이었다. 발자크는 자신이 직접 고안한 커피의 배합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커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섬세한 솜씨로 커피를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커피가 형편없는 시골에 머물 때면 직접 커피를 주문해서 가져갔다.

발자크는 파리를 벗어나면 커피를 우려내지도 필터로 거르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격분해서는 그의 소설에서 시골의 커피를 끓여 마시는 습관을 개탄했다. 소설 <농민들>에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의 묘사가 나온다. "여관 주인이 커다란 갈색 냄비에 커피를 끓였다. 파우더와 치커리 섞은 것을 커피에 뿌리고 바닥에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도기 컵에 커피를 담아서, 파리에 있는 레스토랑 종업원도 부러워할 법한 뻔뻔한 태도로 손님에게 내놓았다"

 

커피로 연명한 문학 노동의 이유

발자크가 커피로 잠을 쫓아가며 문학 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이유, 빚 때문이었다. 발자크는 일찍이 여러 종류의 사업에 손댔고 연이은 실패로 빚더미에 앉았다. 파리에 발자크가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보존돼 있는데, 앞문과 뒷문이 있다. 빚쟁이가 대문을 통해 앞문으로 들어오면 뒤로 도망가려고 문을 두 개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결혼이었다. 그의 나이 33살에 유부녀였던 한스키 백작부인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을 한다. 백작부인은 남편이 죽은 뒤 발자크와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발자크는 백작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지위와 재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결혼이 이루어지는 데는 무려 18년의 세월이 걸린다. 백작부인의 남편이 죽고, 교황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발자크는 51세에 백작부인과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하고 5개월 뒤에 발자크는 생을 마감한다. 까만 밤을 까만 커피로 하얗게 지새우며 명작을 남겼으나 그의 삶은 그가 마신 커피처럼 쓰디쓰다.

 

 

글. 커피컨텐츠크리에이터 커피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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