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생활의 위대함/임어당

tlsdkssk 2019. 6. 23. 20:33

빈둥거림의 즐거움 / 林語堂

인간, 유일하게 일하는 동물 자연계의 생물은 모두가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일을 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의무나 책임, 공포나 구속, 야심 따위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이러한 것들은 자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 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지금 창 저쪽에 보이는 교회의 첨탑 주위를 비둘기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다. 그러나 저 비둘기는 점심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 걱정하지 않는다.


비둘기의 점심보다는 우리들의 점심이 훨씬 복잡하다 것, 또 우리가 먹는 몇 가지 물건 중에는 수천 명의 노동과 경작, 장사, 수송, 배달, 조제 등의 고도로 착잡한 제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이 짐승보다 먹을 것을 구하기가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만일 한 마리의 야수가 도시 안으로 들어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을 얻기 위해 저토록 분주히 일들을 하고 있나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이 인간 사회에 대해서 깊은 회의와 곤혹을 느낄 것이다. 인류만이 울 안에 갇혀 사육되고 있으면서도 먹을 것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하고 복잡한 문명과 복잡한 사회에 강요되어 일을 하며, 먹을 것 때문에 머리를 썩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하기야 인간 생활에도 좋은 점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 지식의 기쁨, 담화의 즐거움, 연극 관람시에 공상을 해보는 재미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 생활은 너무나 복잡해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활동의 90%가 먹는 문제에 점령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문명이란 주로 먹을 것을 찾는 일이고, 진보란 식량 획득의 어려움이 더욱더 심해져가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먹을 것을 얻는 일이 이처럼 곤란하게 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은 오늘날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야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위험은 우리들이 지나치게 문명화되어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오, 현명한 인류여, 무서우리만큼 현명한 인류여! 기가 찬다. 머리에 서리가 낄 때까지 조금도 쉴 사이없이 먹기 위해서 죽도록 일만하고, 끝내 논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이 문명이야말로 참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가함의 예찬 인간의 교양(敎養)이란 그 본질이 한가함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교양의 법(法)은 한가(閑暇)의 법이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한적(閑適)을 사랑하는 현자가 가장 교양이 높은 사람이 된다. 바쁜 생활과 현자의 생활 사이에는 철학적인 모순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현자는 바삐 서두르지 않고, 바삐 서두르는 인간은 현자의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란 가장 우아하게 한적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한적 생활이 부유한자, 권력자, 성공한 자들── 그들은 얼마나 바쁜 사람들인가!──의 특권이라는 것은 천만부당한 말이며, 중국에서는 소위 넓은 도량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지는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방랑자의 기품과 아주 비슷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타인의 호의를 구하기엔 너무도 자존심이 강하고, 일을 하기에는 너무도 불기 분방하며, 세속적 성공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지나치게 현명한 사람들이다.


이 넓은 도량의 정신은 인생에 대한 대관(大觀)의 정신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또 필연적으로 그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야심이나 어리석은 행동, 부귀명성의 유혹을 꿰뚫어보는 능력에서 생긴다. 어쨌든 자기 영달보다는 인격을 존중하고, 부귀명성 보다는 정신을 존중하는 이 대관의 선비들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세속적 성공을 고고하게 냉소로 뿌리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계열에 속하는 문인들──도연명, 소동파, 백낙천, 원중랑, 원매──은 대개 짧은 관직생활을 통해 하찮은 일에 머리를 굴리고, 밤낮 상사에게 절하는 일과, 동료 관리들을 영접하고 배웅하는 일에 진절머리를 친 끝에 관직을 벗어 던지고 은둔생활로 들어간 현자들이다. 원중랑은 소주(蘇州)의 태수직에 있을 때 상사에게 일곱 통의 진정서를 연거푸 제출했는데, 그것은 일년 내 변함없는 돈수재배(頓首再拜)의 생활을 탄식하면서 무애무우한 개인 생활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렇듯 한적 생활을 찬미하고 있는 일례는 위의 다섯 시인들 외에도 백옥섬(白玉蟾)이라는 시인이 쓴, 나제당(懶濟堂: 게으른 서재)이라는 서재를 찬미한 비문 속에도 나와 있다.


내키지 않으면 노자(老子)도 읽지 않는다. 도는 책 속에 없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장구(章句)도 보지 않는다. 장구는 도보다 깊지 못하다. 도의 체묘(諦妙)는 허(虛)에 있고 징(澄)에 있고 냉(冷)에 있다. 그러나 나는 진일토록 바보스럽다. 또 어디서 허를 구할 것이냐. 내키지 않으면 시서(詩書)도 펴지 않는다. 놓으면 시신(詩神)이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거문고도 잡지 않는다. 노래가 줄 위에서 죽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술도 싫다. 강호(江湖) 자체는 술잔 밖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바둑도 두지 않는다. 승패는 판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산하도 보지 않는다. 그림의 흥취는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풍월도 대하지 않는다. 선경은 스스로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속세와도 인연을 끓는다. 의관과 모든 품(品)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봄 가을도 모른다. 천행(天行)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죽으리, 바위는 썩으리, 그러나 나는 나, 영원한 나. 이 집을 나재당(懶濟堂)이라고 부르기에 어찌 타당치 않겠는가?


그러므로 한적 생활의 예찬은 언제나 마음의 평화, 무애무우의 심경, 자연생활을 마음껏 즐기려는 자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인과 학자들은 모두 이상 야릇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강호객인(江湖客人: 두보), 동파거사(東坡居士: 소동파), 노호일인(露湖逸人), 하외각노옹(霞外閣老翁) 등등 그 밖에도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한적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한적 생활의 즐거움은 부유계급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귀를 가장 경멸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싫증이 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含蓄)에서 오는 것이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사시를 통해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 그날의 생계에 빠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노자는 인간세를 싫어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 인생애는 오히려 너무 정미가 깊어서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일에만 떨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속세를 버릴 것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 아닐까? 이 지상이 바로 천국 이러한 열렬한 인생애가 생자필멸(生子必滅)의 인생 실상에 마주칠 때 시적인 애조를 띄게 된다. 이상한 얘기이긴 하지만 생자필멸이라는 이 인생의 실상에 슬프게도 눈뜨게 되면 시인, 철인들은 보다 더 강하게, 보다 더 열렬하게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생명이 인간에게 주어진 전부라면 그 생명이 계속하는 한 보다 더 열렬하게 인생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헛되이 영원을 바라면 이 지상 생활의 건전한 즐거움은 그만 깨지고 만다. "아더 키드" 경이 말하는 다음의 한 마디가 바로 그러한 감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지상이 바로 천국이다. 이 일을 뭇 사람이 나와 더불어 믿는다면 이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게 될 것이다." 또 소동파는 말한다. "인생은 봄꿈이 깨어 흔적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인생을 지극히 사랑한 것이다. 중국 고전을 읽고서 우리가 항상 당면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인생무상, 생자필멸의 감상이다. 중국의 시인과 철인들이 희유환락(嬉游歡樂)을 다할 때 항상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인생무상과 속절없음을 느끼는 이같은 비애감(悲哀感)이다. "달은 차고 기울고, 꽃은 피고 지는구나" 같이 시구에 자주 나오는 비애감이 바로 그것이다. 이백(李白)의 유명한 시, "뜬세상은 꿈과 같구나. 기쁨을 느껴본 적이 그 몇 번이던가" 하는 시가 지어진 것은 봄밤에 도리원(桃李園)에서 주연을 베풀고 술잔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또 저 왕희지(王羲之)가 불후의 문장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지은 것은 벗들과 함께 즐겁게 놀며 한 때를 보내던 자리에서 지어진 일이 아니었던가? 이 소문장은 다른 어떠한 문장보다도 속절없는 인생의 비애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한 집에 모여 인간이 더불어 사는 한 세상을 위아래로 훑어볼진대, 혹은 이것을 가슴속에 취하여 방 안에서 말하는 자도 있고 혹은 맘 내키는 바에 따라 육신의 밖에서 방랑하는 자도 있다. 나아감과 머무름이 모두 달라 정조(靜操)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들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되고보면 흔연자족 늙음이 장차 올 것임을 잊는다. 또 그러한 우리의 흥이 이미 싫증이 나고, 정념에 따라 변덕이 일어 욕망이 변할 때 감개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기뻐하던 감흥은 순식간에 과거지사가 되고 쓰라린 후회의 기억만이 우리들을 엄습한다. 하물며 사람의 목숨에 장단은 있을지언정 결국 모두 다 허무로 돌아가는 것. 그러므로 고인은 말하길 죽고 사는 것도 역시 거대하다 하였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고인이 흥을 느끼는 까닭을 살피고 고인이 남긴 책을 뒤져서 그 감흥이 우리들과 다를바 없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애감과 연민감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죽고 사는 것을 하나라고 보는 것도 허망하고, 짧음이 같다 함도 또한 허망하다. 후세에 오늘을 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슬프다.


그러므로 현재 사람들을 나열하고 또 그 말하는 바를 기록한다. 때와 형세가 다르다 해도 마음을 일으키는 까닭은 다 같다. 후세에 이 글을 보는 자 역시 이 글에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난정기(蘭亭記) 생자필멸, 즉 인간은 결국 무(無)로 돌아가 촛불처럼 꺼져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비애감마저 든다. 또한 우리들 대다수는 시적인 기분까지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생자필멸의 신념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처세의 결의도 굳어지고 분별심 있고 진실하게, 일정한 체관(諦觀)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며 또한 여기에 평화가 있다. 왜냐하면 참된 평화는 최악의 것을 받아들이는 심경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인이나 서민들이 생활을 즐길 때는, 이 환락이 과연 영원히 계속될 것이냐 하는 잠재의식이 늘 발동하고 있다. 가령 즐거운 연회가 끝났을 때, "천리나 계속되어 장이 서 있는 번화한 저자거리도 언젠가는 쓸쓸해질 때가 온다"고 중얼거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인생의 향연은 저 "느부갓네살" 2세 (Nebuchadnezzar : B.C.605~562, 바벨론왕 나보포라살의 아들. 바벨론유수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에 등장하는 왕으로 구약성서 다니엘서에도 상세한 기록이 보인다.)의 향연이다.

이 세상이 꿈과 같다는 생각은 우리들 이교도(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적인 것을 불어넣어 준다. 이교도의 인생관은 송대(宋代)의 풍경화가와 아주 비슷한 데가 있어서, 이들 화가들이 신비의 아지랭이 속에 갇혀서 때때로 운무에 잠긴 산경을 바라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불멸이라는 것을 인간에게서 빼앗아 버린다면 인간은 필멸일 것임으로 인생이란 명제는 결국 하나의 간단한 명제가 되고 만다. 즉, 우리 인간은 일정한 수명으로 이 지상에서 살아야 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것도 겨우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이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만은 타고난 여러가지 조건하에서 되도록이면 즐겁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자신의 생활을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유교적 전통의 뿌리이다. 본래 유교라는 것은 현실적인 경향, 즉 지극히 사바적(娑婆的)인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저 "조지 산타야나"가 말한 "동물적 신앙"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다윈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래 동물계의 일족이라는 것. 그리하여 "우리들은 모두가 동물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본능이 정상적으로 충족되었을 때에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로써, 본능과 감각적인 인생에 우리를 접근시켰을 때 참된 인생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현실성과 정신성에 관한 이러한 느낌 속에는 중국인의 인본주의, 사고방식, 생활방식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 중국철학을 간명하게 정의하자면 "진리를 아는 것보다는 인생을 아는 일에 열중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형이상학적 사색 같은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방해가 되며 또 인간의 지성(관념) 속에 생겨난 창백한 반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인생 자체에만 매달려 늘 최초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문제를 자문한다── 어떻게 살것인가? 하고.


그러므로 서구적 의미의 철학이 중국인의 안목으로 볼 때는 극히 한가한 장난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서구의 철학자들은 항상 논리에 열중하여 있고,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지식의 가능성 문제를 설정하는 "인식론"에만 정신이 팔려있어서 인생 그 자체를 안다는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쓸데 없는 장난으로, 말하자면 다만 구애 구혼할 뿐이지 결혼하여 자손을 낳지 않는 일이며, 전쟁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보무당당하게 행진만 하는 군대처럼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독일의 철학자들이야말로 가장 싱거운 사람들로, 그들은 열렬한 연인처럼 진리에 구애는 하지만 청혼하는 일은 별로 없다. 운이란 무엇인가 빈둥거림을 사랑하는 기질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도교철학은 특수한 공헌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는 행운이니 불운이니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위대한 노자(老子)의 가르침은 행위보다는 무위(無爲), 영달보다는 인격, 움직임보다는 정밀(靜謐)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음의 정밀(고요함)은 운명의 변동에도 마음이 조금도 교란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회남자(淮南子)는 저 유명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우화를 만들어 냈다. 변방 가까운 곳에 말 부리기를 잘하는 새옹(塞翁)이라는 늙은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말이 국경을 넘어 호(胡)나라로 들어가 버렸다. 이웃들이 와서 이 일을 위로하자, 그 노인은 "이 일이 장차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국경을 넘어갔던 그 말이 이번엔 준마를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이웃들이 와서 이 일을 축하했는데, 노인은 "이 일이 장차 화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찌 좋다고만 하겠는가?" 했다. 어느날 말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그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이웃들이 다시 몰려와서 이 일을 위로하자, 노인은 "이것이 오히려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지 일년 후 호인(胡人)들이 변방을 침입하니 장정들은 다 나가 싸우게 되었는데 십중팔구는 전장에서 죽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절름발이라서 전장에 끌려나가지 않았고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니 그 변화는 끝이 없는 것이다. -淮南子(회남자) 이러한 철학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인생은 다소의 악운에도 참아나갈 수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행운을 동반하지 않는 불운은 없다는 믿음을 형성하게 된다.


주역(周易) 사상은 이러한 변화의 철학을 체계화 한 것에 불과하다. 인생의 비운에는 동전처럼 늘 그 이면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고, 막연한 행동이나 헛된 도모를 싫어하고, 성공 영달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성공을 하면 할수록 사람은 실패의 경우를 생각하고 점점 공포에 떨게된다. 따라서 성공욕이란 "실패에 대한 공포"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성공욕은 소멸되고 만다. 명성에 대한 꿈이 일단 깨지고 나면 커다란 도피의 이득을 얻게 된다. 노자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달(悟達)의 경지에 이른 선비는 성공을 성공으로 생각지 않고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외견적 성공이나 실패가 절대 참된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의 목표는 일체 무욕(無慾)에 있지만, 도학자의 목표는 "누구든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는 것"에 있다.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됨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능히 무애무우(無碍無憂)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이러한 사람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장자(莊子)는 "너무 걸출하지 말라, 너무 유능하지 말라, 너무 남에게 도움이 되지도 말라"라고 외쳤던 것이다. 돼지가 죽음을 당해 제단에 오르는 것은 살이 충분히 쪘기 때문이며, 곧게 자란 아람드리 나무가 먼저 베허지기 마련이며, 아름다운 새가 제일 먼저 포수의 목표물이 되는 법이다. 장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무덤 도굴꾼의 우화를 들고 있다. 도굴꾼들이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앞이마를 망치로 부수고 턱뼈를 깨뜨리는데, 그것은 어리석게도 그 해골의 입속에다 진주를 물린 채 파묻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방식을 좀더 진전시켜보면 결국, 인생이여! 왜 빈둥거림의 즐거움을 모르는가? 하는 말로 귀착된다. 빈둥거림의 즐거움 미국인(서구인)들에겐 세 가지의 커다란 결함이 있다. 능률ㆍ정확ㆍ성공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야말로 미국인들을 현재와 같이 불행하게 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든 요인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에게서 없어서는 안될 한적 생활의 권리와, 유쾌하고 한가한 오후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 비극적 결말이라는 것은 없고, 또한 완벽한 기술보다는 조금은 덜된 채 남겨두는 것도 훌륭한 기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가령 어떤 약속을 잊어버려 그 장소에 나갈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 사실은 불유쾌한 약속을 피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편지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우리들은 편지의 답장을 너무 빨리 써서보내는 바람에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것 보다 못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대부분의 편지는 3개월 쯤 서랍속에 쳐넣어두면 대개는 답장을 쓸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3개월 후에 이것을 읽어보면 참으로 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러한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쓰고 있었다면 꽤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체국 왕래가 잦은 미국인을 경멸했던 쏘로(Thoreau)의 기분을 이해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능률적이고 정확한 일처리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인도제 수통 마개 보다는 미국제 수통 마개를 더 신뢰한다. 왜냐하면 미국제 수통 마개는 물이 새지 않아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능률과 완벽만을 추구해서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능률은 우리에게서 한적 생활의 즐거움을 빼앗아가고, 완벽함과 정확함은 우리들의 신경을 마멸시키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문 잡지 편집자는 오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백발이 될 정도로 애를 쓴다. 그러나 중국의 편집자는 그보다는 현명하다. 독자가 스스로 다소의 오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도록 내버려둔다. 중국의 신문 잡지가 연재물을 게재하는 것은 좋으나, 싣다가 그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만일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편집자는 그야말로 혼이 날 판이겠지만 중국에서는 그리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술자들이 다리를 놓으려면 자세히, 정확하게 숫자를 산출하여 양쪽 둑에서 놓아온 다리가 중간에서 1미리의 오차도 없이 만나도록 건설할 것이다. 하지만 두 중국인이 산 양쪽에서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양쪽이 다 반대쪽 끝까지 파나가고 말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믿는다 ──터널만 파고 있다면 양쪽으로부터 코스가 어긋난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큰일이란 말인가? 하나가 될 것이 오히려 둘이 되었으니 더욱 좋지 않는가. 급하지만 않다면 터널이 둘이 있든 하나가 있든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 일없이 이럭저럭 파기 시작해서 이럭저럭 끝내고, 기차가 그 굴속을 아무 일없이 이럭저럭 통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대체로 중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는 데 있어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아주 정확하게 그 일을 해냄은 물론이다. 다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을 뿐. 현대 산업사회의 템포는 이러한 영광스럽고 위대한 한적 생활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활 템포는 시계 만능적인 시간관을 우리에게 부과하며, 끝내는 인간을 시계로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중국에도 언젠가는 오고야 말겠지만, 아무튼 미국인들의 이러한 시계바늘과 같은 생활 양식은 참으로 처참하고도 슬픈 일이다. 그들의 내일은 이미 그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주, 아니 다음 달까지도 이미 다 짜여져 있는 것이다. 3주 후의 일 따위는 중국에서는 정말 미지의 일에 속한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무슨 초대장을 받았을 경우, 가겠다 안 가겠다 등의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잘 알겠다"고만 말하는데, 그것은 참석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냥 초대의 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가게 될지 아닐지는 자신도 모르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인이 중국인처럼 유유자적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사업욕과, 행동하는 것을 삶보다 우선하는 가치관 때문이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걸작이라면 그 작품에 품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품격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술의 향기와도 같이 오랜 세월을 두고 쌓여지는 것이다. 미국의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존중받기 위해서 사회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동양에서는 노인들은 그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존중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꼭 무엇을 하고 있어야만 존중받게 되는 것일까? 중년인들이 유유자적할 수 없다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노인들에게 있어서랴. 그것은 차라리 인간성에 배치되는 죄악이다. 따라서 품격이라는 것은 노성(老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품격이 갖춰지기까지에는 그만한 시일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은 노인의 얼굴에 그려지는 주름살과 같은 것이다. 주름살이야말로 그 사람의 품격이 끊임없이 새겨져서 완성되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유행을 좇아 모두 구형차를 버리고 신형차로 바꾸는 듯한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품격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들은 옛사원이나 오래된 가구, 인쇄물, 낡아빠진 사진, 골동품 등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지만 노인의 미(美)에 관해서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아름다움은 노(老)ㆍ숙(熟)ㆍ훈(燻)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때때로 예언자적인 환상에 잠기는 일이 있다. 그것은 저 밀레니엄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으로, 그때가 오면 과연 분주다사한 맨허턴가의 사람들도 거리를 유유히 걸을 것이며, 미국식 "저돌주의자들"도 동양식 빈둥당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미국의 신사는 스커트와 슬리퍼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길을 걸을 것이고, 손을 주머니 속에다 집어넣고 브로드웨이의 인도를 느릿느릿 걷고 있을 것이다. 경관은 건널목에서 우물쭈물하는 친구들에게 웃음으로 대할 것이고, 운전수들은 잠깐 차를 세우고는 서로 인사를 하면서, 길 한가운데서 서로 할머니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또 자기 가게 앞에서 이를 닦으면서 한가하게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 무엇을 멀거니 생각하고 있는 학자가 부드러운 책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서 돛대처럼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일도 있을 것이다. 식당 안의 점심 식사 카운터는 없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동식료점의 부드럽고도 얕은 안락의자에 편한 자세로 유유히 걸터앉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찻집에서 대낮부터 저녁때까지 멀거니 시간이나 보낼 생각을 할 것이다. 한 잔의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데 반 시간이나 걸릴 것이고, 술도 단숨에 마셔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얘기들을 나무면서 쫄끔쫄끔 천천히 마시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병원의 환자명부는 폐지되고, 경비원은 이미 과거지사의 일로 없어질 것이고, 환자는 의사와 함께 철학 얘기들을 주고 받을 것이다. 기차는 달팽이 걸음으로 느릿느릿 달릴 것이고, 타고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기차를 세우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쳐다보면서 그 숫자를 알아맞추는 내기를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맨해턴가의 밀레니엄은 도저히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다. 좀 더 완전한, 그러한 한가한 오후가 그립다. ♧ 출처 - 林語堂의 대표작 "생활의 위대함" (The Importance of Living,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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