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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tlsdkssk 2018. 12. 20.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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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벌주로 원샷 3잔’ ‘무반주 댄스 몸개그’ ‘신청곡 부르기’….

 

경주 안압지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인공연못이다. <삼국사기> ‘본기·문무왕’조는 “674년 궁궐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했다. 이곳은 외국사절이나 신하들을 위한 궁중연회장이었다.

 

지난 1974년. 안압지 준설공사를 벌이던 조사단은 바닥 뻘층에서 유물 하나를 건져낸다. 6개의 사각형과 8개의 육각형으로 된 ‘14면체 주사위’였다. 그런데 각 면에 4~5자의 글씨가 어렴풋 보였다.


 

 

 

 

■ 벌주 석 잔을 ‘원샷!’으로…

 

새겨진 글을 읽어가던 조사단은 무릎을 쳤다. 주흥(酒興)이 고조될 무렵, 주사위를 던져 14면에 새겨진 글 대로 벌칙을 받았던 놀이기구(주령구·酒令具)가 분명했다. 통일신라시대판 ‘복불복’ 게임이었다고나 할까.

 

먼저 ‘삼잔일거(三盞一去)’. 문자 그대로 술 석 잔을 ‘원샷’하는 벌칙이었다. 이 ‘벌주 삼배’의 전통은 왕희지(王羲之·307~365) 때 시작됐다. 354년 3월, 왕희지 등 당대의 명사 42명이 모였다.

이들은 흐르는 곡수(曲水)에 띄운 술잔이 돌아올 때까지 시(詩)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당시 왕희지의 시 한 수.

 

“~술 한 잔에 시 한편 읊으니 그윽한 감정을 족히 펼칠 수 있다.(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난정기(蘭亭記)>  

 

그러나 잔이 돌아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한다면?

당대의 관습대로 ‘벌주삼거굉(罰酒三巨굉)’, 즉 큰 잔으로 벌주 석잔을 마셔야 했다. 이날 42명 가운데 16명이 시를 짓지 못해 벌주 석잔을 마셨다고 한다.

<난정고>

 

8세기대 신라인들도 그랬을까? 주사위를 굴려(던져) ‘삼잔일거’가 나오면 박수치며 ‘삼잔’ ‘삼잔’를 외치면서 ‘원샷’을 강요했을 지 모른다. 혹시 지금도 유행하는 벌칙인 ‘후래자삼배’의 전통도 예서 나왔을까.

 

 

■ 통일신라판 ‘몸개그’, 야자타임?

 

이 뿐이 아니다. 14면체 주사위에는 자창자음(自唱自飮·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과 음진대소(飮盡大笑·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 등의 벌칙도 있다.

요즘 리얼버라이어티나 토크프로그램에서 유행하는 ‘다양한 몸개그 벌칙’과 ‘개인기 자랑’도 14면체 주사위에 새겨져 있다.

 

금성작무(禁聲作舞·노래없이 춤 추기)는 무반주 댄스였다. 반주없는 춤이라. 얼마나 어색했을까.

 

‘유범공과(有犯空過)’는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가만 있기’다.

그런데 가만…. 이 벌칙은 요즘의 ‘야자타임’은 아니었을까. 반말하며 바득바득 달려들어도 꼼짝 못하는….

 

또 ‘임의청가(任意請歌)’, 즉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도 수상하다. 이 벌칙은 혹시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는 벌칙은 아니었을까. 요즘 ‘노래방 풍경’이 연상된다. 아니 ‘도전 1000곡’은 아니었을까.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즉 ‘스스로 괴래만을 부르기’라는 벌칙도 있었다. ‘괴래만’은 술 먹고 노래부르며 밤늦게 휘청거리면서 들어오는 모양이 아닌가. 말하자면 취권 형태의 술버릇을 재현하라는 벌칙이었을까.

 

양잔즉방(兩盞則放)은 술 두잔을 한꺼번에 비우는 벌칙이었다.

다만 술자리였지만 공영시과(空詠詩過·시 한수 읊기)는 나름 고상한 벌칙이었을 것이다. 아니 흥취의 분위기에 찬물을 쫙 끼얹는 벌칙이었을 지도 모른다.

 

 

 

 

 

 

 

 

 

현대 수학자들이 목제주령구 만드는 법을 재현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이강섭 교수의 논문 '복제주령구 제작기법 및 수 학교육적 의미'('한국수학사학회지 제19권 제3호', 2006년 8월)에서 인용했다.

 

별의별 벌칙도 다 있었다.

중인타비(衆人打鼻·여러 사람으로부터 코맞기), 농면공과(弄面孔過·얼굴 간지러움을 태워도 참기) 등….

이밖에도 주사위에는 당대 신라 생활상을 몰라 해석이 알쏭달쏭한 벌칙도 있다.

월경일곡(月鏡一曲·월경 노래 한 곡 부르기), 추물막방(醜物莫放·더러운 물건이나 벌레를 붙여도 떼지 않기). 곡비즉진(曲臂則盡·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 등이다.

 

어쨌든 1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노는 모양이 그렇게 비슷한 지…. 어떨까. 이번 송년회에서 이 ‘복고풍’의 놀이를 한번 즐겨보면…. 지금 내놔도 손색이 없는 ‘리얼버라이어티 복불복 쇼’일 터….

 

 

■잿더미가 된 주령구

 

참, 어처구니 없는 일 하나. 지금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14면체 주령구는 ‘정품’이 아닌 ‘복제품’이다. 왜 일까. 사연은 기막히다. 연못 바닥 진흙 속에서 출토된 나무에 강력한 빛을 쬐어 건조하면 뒤틀리고 만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전기오븐 건조였다. 그 때가 1975년 6월19일이었다.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전신)은 주령구를 자동온도조절장치가 가동되는 특수전기오븐에 넣고 말리고 있었다. 과열되면 전원이 끊어졌다가 낮아지면 다시 연결되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오븐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오븐을 연 보존처리요원은 절망의 끝을 보았다. 주령구가 재로 변한 것이다. 하룻밤 동안 자동전기조절장치가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망연자실…. 1300년 간이나 차디찬 물 속을 굿굿이 견뎌냈던 통일신라시대 놀이도구. 인간의 아차 실수로 그렇게 한 줌의 재로 변한 것이다. 그러고보면 ‘발굴’은 곧 ‘파괴’일 수밖에 없다.

 

 

■ 확률은 모두 1/14

 

그래도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 있다. 14면체 주령구에 담긴 신라인들의 지혜이다.

사실 보통의 14면체 주사위는 정육면체의 8개 꼭지부분을 잘라내 만든다. 각 꼭지점을 이루는 변 세개의 중앙점까지 잘라낸다. 그러면 꼭지를 잘라낸 자리에는 8개의 정삼각형이 생긴다. 원래의 6개 면에는 정사각형이 된다. 하지만 삼각형인 면이 나올 확률이 사각형인 면이 나올 확률보다 상당히 낮다.

삼각형의 면적이 사각형의 면적보다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사위로서 좋은 모양은 아니다. 통상 6면 주사위의 확률은 1/6이지만, 준정다면체(14면체와 같은)의 확률은 다르다. 그리고 보통의 14면체 확률은 면적에 비례한다. 사각형면이 나올 확률은 64~65%, 삼각형면은 36~35% 정도가 된다. 주사위로서는 적당치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라인들이 만든 14면체 주령구는 다르다. 삼각형 면을 더 넓히면서 육각형 면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신라인들은 이렇게 변형시킨 육각형의 면적(6.265㎠)을 기존의 사각형 면적(6.25㎠)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니 14면 각각의 면이 나올 확률이 1/14로 같아졌다. 육각형면이 나올 확률은 육각형 개수(8개)만큼인 8/14, 정사각형이 나올 확률도 정사각형 개수만큼인 6/14가 된다는 것이다.  

 

■ 케플러보다 1000년이나 앞섰다.

 

역사상 정다면체를 발견한 이는 플라톤이다. 또 14면 주령구처럼 정다면체를 변형시킨 준정다면체를 발견한 이는 아르키메데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원 저서가 소실되면서 아르케메디스의 입체는 구체적인 모양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619년이 돼서야 케플러에 의해 완전히 복구됐다.

 

그렇다면 신라는 케플러보다 무려 1000년 전인 7세기대에 정교한 모양의 준정다면체를 만들어 놀이도구로 활용했다는 얘기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立立立

 

세워라!(立)세워라!(立)세워라!立

 

“망측스럽게….”

 

2000년 4월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 웅덩이에서 야릇한 유물이 출토됐다. ‘남근(男根)’목간이었다. 길이가 22.6㎝(두께 2.5㎝)나 됐다. 목간의 밑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다듬었고, 그것도 모자라 구멍까지 뚫었다.

 

한쪽 면에는 ‘천(天)’자와 ‘무봉(无奉)’자가 서로 방향을 거꾸로 해서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면에는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확연했다.

 

 

 

 

땅을 향해 새겨진 ‘天’은 무엇인고? 또 남근 목간에 ‘立’을 세 번이나 반복한 뜻은?

이것은 ‘세워라(立·서라)!세워라(立·서라)!세워라(立·서라)!’라는 뜻이 아닌가. 대관절 이 무슨 망측한 소리인가. 

목간이 발견된 곳은 백제 각 지방에서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웠다. 그야말로 백주대로에서 이상야릇한 목간이 발견된 것이다.

 

이용현(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은 목간에 새겨진 글씨가 거꾸로 쓴 부분(天)과 제대로 쓴 부분(道立立立)으로 나뉘는 것에 주목했다. “평상시와 발기 때의 두 가지 상황을 전제로 제작됐다”는 것이다.

 

“또 있어요. 밑부분 구멍에 줄을 매달아 늘어뜨릴 수 있도록 했고…. 뾰족하게 깎아 밑부분을 꽂아 세울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마음대로 남근을 세우거나 아래로 축 늘어뜨릴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윤선태(동국대 교수)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라 ‘도양’을 ‘길의 신’으로 해석했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백제인들은 남근목간을 세운 뒤 기도했을 것이다.

 

“이제 남근이(을) 섰다(세워라)! 섰다(세워라)! 섰다(세워라)!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남근은 나라의 안녕, 그리고 악신·질병의 추·예방 등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다.

 

<삼국유사>는 “지증왕의 생식기가 1척5촌(약 45㎝)이나 됐다”고 기록했다.

 

또 가락국 김수로왕은 “거대한 남근을 낙동강 양쪽에 턱 걸쳐놓을 정도”였단다. 그걸 모르던 길손이 앉아 곰방대를 탁탁 터는 바람에 왕의 ‘그곳’에 커다란 흑점이 생겼다나 어쨌다나.

 

여하간 ‘길 제사’ 때 ‘세워~세워~세웠던’ 이 남근목간은 조선의 ‘장승’ ‘남근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전통은 도래인의 발자취가 닿은 일본까지 연결된단다. 백제가 뿌린 ‘남근 신앙’이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성애의 나라 신라?

 

“진흥왕의 태자(동륜)은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를 연모했다. 태자는 마침내 궁주의 담을 넘어 관계를 맺었다. 얼마 후, 태자가 밤중에 홀로 보명궁의 담장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고 말았다.”

 

1989과 1995년. 김대문(金大問)이 7세기 말 편찬했다는 ‘화랑세기’의 발췌본과 필사본이 잇달아 발견됐다.

필사한 이는 한학자 박창화(1889~1962)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궁내청에서 일하던 중 <화랑세기>의 원본을 보고 베꼈다는 것이다. <화랑세기>는 540~681년 사이에 활약한 화랑의 우두머리(풍월주) 32명의 전기다.  이 책은 540~681년 화랑의 우두머리(풍월주) 32명의 전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가짜’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야말로 끝을 모르는 ‘어색(漁色·물고기를 사냥하는 듯한 엽색행각)’…. 그 뿐이 아니라 근본을 찾을 수 없는 근친혼과 사통·통정과 같은 난잡한 성행위….

앞서 태자가 아버지의 여인을 몰래 범하다가 개에 물려 죽었다는 구절은 그야말로 세발의 피다.

 

미실이라는 여인을 보자.

여인은 임금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 1명(동륜),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을 닥치는대로 녹여버린 희대의 요부였다. 미실은 황실에 색을 제공하는 신분(대원신통)이었다

 

 

 

여인은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게다가 어머니(묘도)로부터 ‘남자를 녹이는’ 방중술(房中術)을 배웠다. 화랑세기는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정식남편인 세종은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측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 ‘가짜’라는 평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낙인찍을 수 있을까. 유교적 유리관의 잣대로 신라사회를 단칼에 재단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는 물론 이같은 신라의 풍습을 일일이 적시하지는 않았다. 개에 물려죽은 동륜의 죽음도 “동륜이 태자가 되었다가(366년) 죽었다.(372년)”고만 기록했을 뿐이다.

하지만 ‘까탈스런’ 유학자인 김부식이었지만 신라의 풍습을 양해하는 논평(史論)을 달았다. 

“신라에서는 같은 성끼리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이모·사촌자매까지 아내로 맞이했다. 이를 중국의 예속으로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다.(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삼국사기> ‘내물왕 즉위년조’)

 

화랑세기는 이같은 신라의 풍속을 이렇게 규정했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음이야.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는가.”(<화랑세기> ‘양도공조’)

그러고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얼핏얼핏 신라사회의 비밀이 보인다.
김춘추의 사위이자 대야주 도독인 품석도 막객 검일의 아내를 빼앗은 일도 있다.(<삼국사기> ‘열전·죽죽조’) 이에 화가 난 검일은 백제와 내통해 성을 함락시켰다.

 

또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자리를 드니 다리가 넷이더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하는 구절은 또 무엇인가.(<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

이밖에 <삼국유사> ‘무왕조·서동요’에도 나온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善化公主 主隱 他密 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원(저녁 夕변에) 乙抱遣去如)

 

<삼국유사> ‘김현감조’에도 “흥륜사에서 탑돌이 하던 김현이 한 여자와 눈을 맞춘 후 탑돌이 끝나고 구석진 곳에서 통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진성여왕(887~897년)은 숙부인 위홍과 사통했다. 위홍이 죽은 후에는 소년 미장부 2~3인을 몰래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요직을 주어 국정까지 맡겼다.

또, 잇단 발굴에서 출토된 ‘물건’들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미추왕릉과 계림로 30호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등에서 발굴된 토우를 보자. 고고한 선비들이라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외치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힐끗 쳐다볼 유물들이다.

 

엉덩이를 치켜든 여인, 그리고 과장된 남근을 들이미는 남자…. 그러면서 남성을 돌아보며 희죽 웃는 여인….

1976년 안압지에서 발굴한 목제남근의 두부에 붙여놓은 돌기는 또 어떻고. 민속학자 이종철은 “감미로운 여심을 자극하는 양물(陽物)”이라고 해석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성행위의 모양을 나타내는 각종 토우는 신라인의 자연주의적인 성의식을 보여준다. 각양각색의 도우들을 보고 있노라면 ‘난잡하다’, ‘부끄럽다’는 의식보다는 해학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화랑세기>는 이같은 신라만의 풍습을 ‘신국의 도’라고 규정했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는가.”(<화랑세기> ‘양도공조’)

그나저나 궁내청에 보관돼있다는 <화랑세기> 원본은 어떻게 된 것인고? 원본이 진짜로 존재하고 일본이 그것을 공개한다면…. 혹은 지지부진한 문화재 반환협상에 이 원본이 포함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우리 역사는 파천황(破天荒)의 세계가 열릴 터인데….

 

 

/ 경향.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三國遺事 紀異 第一 

智哲老王

第二十二 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辛己則三年也)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 ?一屎塊如鼓大 爭?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今溟州) 東海中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朴伊宗 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諡號)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또 우리말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 500)에 왕위(王位)에 올랐다(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永元 3년이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서 배필을 구했다. 사자(使者)가 모량부(牟梁部) 동노수(冬老樹)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 보고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牟梁部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서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황후(皇后)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했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順風)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우릉羽陵)가 있다. 이 섬은 둘레 2만 6,730보(步)이다.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朝貢)을 바쳐 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아찬(伊飡)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때 이종은 나무로 사자(獅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이종을 상주어 주백(州伯)을 삼았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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