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들

tlsdkssk 2018. 10. 28. 03:38

[경향신문] “아빠, 우리집은 왜 이름이 없어?” 40대 직장인 ㄱ씨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집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난감하다. ㄱ씨는 서울의 한 빌라에 산다. 정확히는 다세대주택 거주자다. 유치원생도 어디 사냐고 물었을 때 집주소보다는 아파트 브랜드 이름을 대는 시대다. 빌라 이름을 지어볼까 했지만 포기했다. 다른 세대 집주인들과 협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한 빌라 및 연립 주택 밀집지역의 모습. 야산 너머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 서성일 기자


‘휴거’ 다음은 ‘빌거’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부와 신분의 상징이다. 국부(國富)의 70% 이상이 부동산이고, 이 중 상당수를 아파트가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주택 공급이나 관리와 관련된 국가 정책들도 대부분 아파트를 중심으로 짜여진다. 하지만 아파트에 살지 않는 국민들도 많다. 2017년 통계청 주택총조사 기준 전국 1712만호의 주택 중 20%에 해당하는 341만호가 연립·다세대·다가구 주택이다. 서울은 비중이 더 높다. 286만호의 주택 중 36%에 해당하는 104만호다. 아파트, 다세대, 연립은 법적으로 모두 ‘공동주택’이다. 그럼에도 아파트 외 공동주택 거주자들은 주택 관련 각종 법과 제도, 정책에서 소외돼 있다. 그리고 국가의 무관심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내년에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예정인 30대 주부 ㄴ씨는 걱정이 태산이다. 아이가 들어갈 초등학교에 “아파트단지에 사는 아이들로 반을 구성해달라”는 학부모들의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탓이다. 학교 측은 소문을 부인했지만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빌거’라는 말이 유행한다는 얘기를 들은 뒤 불안감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빌거가 무슨 뜻일까. ‘빌라에 사는 거지’의 줄임말이다. ㄴ씨는 “부모를 잘못 만난 탓에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차별당하는 건 아닌지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


‘휴거’라는 말이 논란이 됐던 때가 있다. LH주택공사의 과거 아파트 브랜드인 ‘휴먼시아’를 이용한 ‘휴먼시아 거지’의 줄임말이다. 임대아파트 거주자를 비하하는 뜻을 담고 있다. 휴먼시아 브랜드는 사라졌지만 휴거라는 말은 여전히 통용된다. 거주지에 빗댄 혐오와 차별의 말이 휴거에서 빌거로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휴거라는 말이 주로 중·고교생 사이에서 유행했다면 빌거는 초등학생들도 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휴거나 빌거 같은 말은 기본적으로 아파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빌라나 연립의 가격이 싸다는 빈부격차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단독주택이나 다가구주택은 이때 다소 예외적이다. 단독이나 다가구는 소유주가 1인이기 때문에 재개발 기대감 등이 반영될 경우 호당 가격이 웬만한 아파트값을 뛰어넘는다.

최근 서울의 아파트값이 폭등하면서 아파트와 빌라·연립 간 가격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통계를 보면 아파트와 연립의 평균 거주면적은 77~80㎡ 수준으로 비슷하다. 2016년 6월 기준 서울의 아파트 평균매매가는 5억6292만원, 연립의 평균매매가는 2억5193만원이었다. 2018년 3월 서울의 아파트 평균매매가는 7억원을 돌파했다. 같은 달 연립의 평균매매가는 2억7184만원을 기록했다. 불과 20개월 만에 가격 차이가 1억원 이상 더 벌어진 것이다. 부동산시장의 흐름은 빌거라는 말을 현실적으로 입증한다.

서울 송파구의 한 상가 부동산중개업소에 인근 지역 아파트 시세표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주거환경 개선엔 관심 없는 정부

이마저도 빌라·연립을 소유한 거주자에 해당되는 문제다. 집을 아직 갖지 못한 빌라·연립 세입자들이 겪는 심적 고통은 더 크다. 서울의 아파트값이 평균 7억원을 돌파한 상황에서 빌라·연립 세입자들이 아파트를 구매할 여력은 없다. 빌라·연립을 사는 것이 그나마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길이지만 막상 빌라나 연립을 사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모두가 뜯어말린다. 부동산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도 “빌라를 사면 망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결혼을 앞둔 30대 직장인 ㄷ씨는 “빌라에서 전세로 신혼살림을 시작할 계획인데 주변에 너무 눈치가 보인다”며 “그렇다고 빌라를 사자니 본전도 못 건진다고 해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아파트가 폭등할 때마다 정부가 내놓는 대책은 판박이다. 세금을 올리거나 아파트를 더 짓는다. 아파트에 대한 수요를 빌라·연립으로 돌릴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아파트값이 치솟자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 SH공사 사장을 지낸 변창흠 세종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그 배경을 “아파트를 짓는 게 각종 비용이나 편의성·효율성 면에서 가장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택지개발을 통해 신도시를 짓고 아파트를 올릴 때 정부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해당 택지에서 발생한 이익으로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택지를 수용해 기반을 닦은 뒤 아파트를 지어 분양할 건설사에 땅을 넘기면 정부 역할은 끝난다.

변 교수는 “빌라나 연립 거주를 꺼려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주차문제와 각종 편의시설 등 주거환경 문제”라며 “대단지 아파트를 건립하면 이런 문제들까지 한 번에 해결되지만 기존 주택가에 이런 시설을 추가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정부는 새 아파트를 짓는 것 말고 기존 주택가의 주거환경 개선에는 좀처럼 돈을 쓰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전국에 산재해 있는 도시공원 문제다.

전국 환경·시민단체 회원들이 2017년 4월 ‘도시공원일몰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근린공원, 소공원, 어린이공원(놀이터) 등 도시공원들은 국가와 지자체가 해당 땅의 용도를 공원부지로 정한 도시계획시설이다. 하지만 이들 공원 부지의 상당수는 개인의 사유지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의 보고서를 보면 2016년 12월 기준 전국의 공원 면적은 934㎢다. 이 중 계획만 잡혀 있고 공원이 아예 조성되지 않거나, 이미 조성됐지만 공원 부지 전체 혹은 일부가 사유지인 ‘미집행’ 면적은 504.9㎢로 절반을 넘는다.

장기간 공원 부지로 땅이 묶인 소유주들이 헌법소원을 냈고, 헌법재판소는 1999년 “20년 이상 미집행된 공원 부지는 무효”라고 소유주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른바 ‘도시공원 일몰제’ 논란의 시작이다. 이에 따르면 20년의 집행기한이 도래하는 2020년부터 미집행 공원은 규제에서 풀리게 된다. 집 주변에 있는 공원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맹지연 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국장은 “조경이나 공원시설이 함께 조성되는 아파트단지와 달리 공원은 빌라·연립 등에 거주하는 서민들이 도심에서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휴식시설”이라며 “일몰제가 시행돼 실제로 공원이 사라진다면 피해는 서민들이 더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만 해도 일몰제가 적용되는 2020년 7월 1일부로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해당하는 71개의 미집행 공원이 사라질 위기다. 여기에는 동네 놀이터가 있는 어린이공원도 일부 포함돼 있다.

빌라·연립은 법의 ‘사각지대’

공원이 없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미집행된 공원을 모두 정부나 지자체가 사들이는 수밖에 없다. 환경단체 등은 이를 위해 최대 52조원가량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추산 중이다. 지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돈이다. 지자체들은 수차례 정부에 예산 지원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도시공원은 지자체 사무영역”이라는 이유에서다. 급기야 서울시는 올 4월 “미집행 도시공원을 서울시가 장기적으로 모두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소요예산은 11조원에 달한다. 서울시는 일단 1조3000억원 규모의 지방채를 발행해 매입이 시급한 공원을 사들이고, 정부에 절반의 국고 보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요청에 정부는 화답했을까. 서울시 관계자는 “국토교통부에서 앞으로 서울시가 발행할 지방채에 들어가는 이자비용의 50%를 부담하겠다고 밝혀왔다”고 말했다. 워낙 지방채 발행비용이 큰 탓에 이자비용도 물론 적지 않은 돈이긴 하다. 하지만 정부가 밝힌 ‘이자비용의 50%’ 부담은 서울시가 요청한 ‘매입비용의 50%’에 비하면 그야말로 푼돈 수준이다.

서울시의 한 다세대 밀집 지역에 지어진 필로티 구조의 공동주택 모습. / 반기웅 기자


주차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빌라·연립이 밀집한 지역의 주차난이 심각하지만 공영주차장 조성은 이에 한참 못미친다. 그렇다보니 도심 신축 빌라나 연립주택 태반이 1층을 주차장으로 쓰는 일명 ‘필로티’ 구조로 집을 짓는다. 이는 주거환경 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변 교수는 “필로티로 해도 입주민 차량을 다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1층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면 야간에는 각종 안전문제도 생기고, 결과적으로는 지역주민 간 단절도 초래해 오히려 주거환경이 열악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법의 보호도 덜 받게 된다. 공동주택에 사는 이상 세대 간 협의가 필요한 문제가 생기거나 갈등이 생기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모든 공동주택은 우선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집합건물법)’의 적용을 받는다. 이 중에서도 150세대 이상 공동주택의 경우 의무관리대상으로 별도의 ‘공동주택관리법’의 적용을 받는다. 빌라·연립이 150세대를 넘기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아파트가 이에 해당한다.

세대가 많은 아파트의 경우 갈등 사안이 발생하면 사안의 범위나 파급이 크기 때문에 공동주택관리법에서는 세세한 항목을 들어 공동주택 관리에 관한 사항을 명시하고 있다. 반면 빌라나 연립 등이 적용받는 집합건물법은 공동주택관리법보다 규제조항이 느슨하게 돼 있다. 이렇다보니 세대 간 갈등이나 분쟁이 발생해도 관련 법으로 해결하거나 구제받기 힘든 구조다.

특히 10세대 미만의 소규모 빌라나 연립이 세대 간 분쟁 문제에 있어 가장 열악하다. 집합건물법에서도 공동주택의 관리단 구성이나 운영에 대한 사항이 명시돼 있지만 10세대 미만 공동주택의 경우 이마저도 적용받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소규모 빌라와 연립에서는 주택관리비나 건물 공동수선 문제를 둘러싸고 하루가 멀다하고 갈등과 분쟁이 일어난다. 소유주 75% 이상의 동의를 얻어 자체 규약을 만들 수는 있어도 실제로 규약을 만들어 운영하는 빌라나 연립은 찾아보기 어렵다.


10세대 미만 이웃 간 분쟁 중재 힘들어

4세대가 사는 빌라에 거주하는 ㄹ씨도 한 소유주가 관리비를 1년째 내지 않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ㄹ씨는 “백방으로 해결책을 찾아봤지만 결국은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길밖에 없었다”며 “아예 안볼 사람도 아닌 데다 월 2만원 관리비를 받아내겠다고 소송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자치구의 한 관계자는 “자치구에는 집합건물법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사실상 없어 관련 민원이 들어와도 구청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소규모 빌라나 연립의 경우 갈등과 분쟁 조정 문제에 있어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집합건물법에서는 분쟁 해결을 위해 광역단체에 분쟁조정위원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위원회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드물뿐더러 위원회의 조정 실적이나 법적 권한도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 서울시에도 분쟁조정위원회가 있지만 2014~2017년 조정신청이 들어온 건 139건으로 연평균 35건에 불과하다. 이 역시 시·군·구 단위의 기초단체까지 분쟁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더 나아가 국토부에 중앙분쟁조정위를 두도록 한 공동주택관리법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분쟁조정위는 조정을 하려 해도 당사자 중 한 명이 거절하면 그만”이라며 “위원회의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정효과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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