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크랩] 영화 <밀양>과 하나님의 정의

tlsdkssk 2018. 2. 2. 11:22

     
[224호 블로그]영화 <밀양>과 하나님의 정의
위르겐 몰트만 강연 후기
[224호] 2009년 05월 25일 (월) 17:00:16 박치현 http://blog.daum.net/ursangelus

   
▲ 위르겐 몰트만 교수 (사진제공 <뉴스앤조이>)
어제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20세기 후반 최고의 신학자로 여겨지는 위르겐 몰트만 교수의 강연에 갔습니다. 주제는 바로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정의’에 관한 것입니다.(제목 : ‘그의 이름은 정의 :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위한 하나님의 정의’) 저는 이 강연을 듣고, 곧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떠올렸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묻어두는 질문을 제기한 바로 그 장면.

전도연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자를 신을 믿은 뒤 용서하고자 면회를 갔다가, 유괴-살해범이 “전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환하게 웃는 장면, 그래서 전도연이 패닉상태에 빠져들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전도연이 그랬죠. “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어떻게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라고. 그 장면과 대사에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불편했을 것이고요. 사실 그 장면은 기독교 신학의 일반적 입장에서 보면,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거든요.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만사가 오케이라는 게 우리가 많이 보고 듣는 기독교 신앙의 논리입니다. 이창동은 그런 논리에 문제제기를 한 것이고요. 그렇다면 과연 20세기 후반 ‘희망의 신학’을 주창하여 한 획을 그은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이러한 문제제기를 어떻게 다룰까요. 아니 다루기나 할까요?

어제 강연에서 그는 바로 ‘용서’라는 문제를, 가해자와 피해자(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를 구분하여 다루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용서는 ‘신의 정의’라는 기준에 따라, 우리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의 문제가 개입됩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모두 죄인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한국인이면 모두 들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를 지었고 가해자인 경우, 이런 주장이 잘 먹힙니다. 가해자는 그렇게 해서 해결을 본다(해방, 구원이라고 하죠) 칩시다. 그런데 과연 피해자, 억압받는 자는 어떻게 되나요? 그들도 죄인(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이 설사 옳다하여도, 그 사람들이 받은 피해와 상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용산참사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가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요? 가해자는 가서 하나님의 용서만 구하면 되는 건가요?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회 속의 피해와 억압의 경험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억압하는 자만 해방되고, 억압받는 자는 찬밥 아닌가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논리는 모든 문제를 ‘개인’이 감당해야 할 일로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이건 현재 집권층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가해자의 신학만 다룬 서양 기독교

   
▲ 저는 몰트만의 강연을 듣고, 곧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떠올렸습니다.
몰트만 교수는 서구 독일의 백인 신학자입니다. 그는 서양의 주류 기독교는 ‘가해자의 신학’만을 다루어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 ‘억압받는 자’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제3세계, 특히 남미의 해방신학자들, 한국의 ‘민중신학자’들과 만나게 되면서부터라고 하더군요. <밀양>에 입각해서 빗대어봅시다. 몰트만 교수는 제3세계의 민중들에게서, 전도연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주류 신학과 영성이 범하고 있는 근본적인 실수 하나가 얼마나 끔찍스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중세의 고해 성사가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은 자기의 악행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도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죄와 악행의 피해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불의와 폭행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자기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교 교회는 항상 가해자가 죄에서 구원받는 문제에만 골몰했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피해자의 탄원은 흘려듣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정의를 위한 외침은 주로 폭력의 희생자들, 불의로 인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서 들립니다. 가진 자는 정의에 별다른 관심이 없겠지요. 헌법을 읊조리는 시장을 비웃는 <남자이야기>의 채도우, 헌법 제1조를 외치는 촛불시민들을 짓밟는 지배층… 오히려 가진 자, 지배자들은 정의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상한 정의가 탄생하여, 저 <밀양>의 유괴-살해범의 행복한 미소가 가능하기도 합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한국교회엔 비슷한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 중심이다

몰트만은 먼저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연대의 그리스도론’ 예수는 밑바닥 인생들 부족한 인생들과 연대했다는 것이죠. 예수가 주로 만난 사람들은, 소외된 지역인 갈릴리 지방의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쓰던 말로 민중들이지요. 지배층들과는 주로 싸움만 했지요.(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든 사람에게 치유를 선포하며,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빛을, 억눌린 사람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약속하십니다.(눅 4:18~19)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과 연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희생자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하는 사람은 그런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 중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자 가운데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연대의 그리스도론 VS. 대속의 그리스도론

가해자(죄인)를 위한 그리스도론도 있습니다. ‘대속의 그리스도론’이지요. 죄인 대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는 말씀이죠.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인이 과연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는가? 깨닫기 위해선 어떤 선행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요. 죄인이 정말 제대로 자기 죄를 깨닫는다면, 자기존중을 잃어버리고, 무거운 죄책감의 짐을 지고 살아가며, 심지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됩니다(물론 요즘 싸이코패스라는 ‘신인류’의 등장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실 이 대속의 그리스도론은, 죄를 지은 ‘가해자’에게는 놀라운 해방의 메시지입니다. 죄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이죠.

 

하지만 몰트만은 가해자가 죄를 깨닫기까지는 3단계의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말합니다.

(1) 악에 희생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인식해야 한다. 즉 희생자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2) 삶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희생자를 양산하는 사회체제를 거부하게 된다.

(3) 자신이 일으킨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한 뒤, 비로소 희생자들과의 친교가 회복된다 (이때 희생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 공동체가 비로소 회복된다.

가해자를 위한 대속의 그리스도론만 현재 교회에서는 강조되고 있습니다. 연대의 그리스도론은 무시되고 있지요. 결국 몰트만은 양자가 다 필요하며, “가해자는 반드시 희생자의 얼굴 앞에서”만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희생자 편에 계시기(연대의 그리스도론) 때문에, 그리하여 희생자들은 신적인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는, 사실 보상과 형벌 차원에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몰트만은 신의 정의는 ‘바로 잡는 것’ ‘우주적 정의’를 요구한다고 봅니다.

 

<밀양>이 던진 물음과 몰트만의 응답

이렇게 신학자는 <밀양>의 질문에 대해, 가해자 면전에서의 용서가 없이는 신의 용서는 기만적인 것임을 인정합니다. 몰트만의 논리에 따르면, 이 사회의 가해자들은 희생자의 얼굴 앞에서 희생자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고, 나아가 피해자를 양산하는 사회시스템의 질주에 제동을 걸어야 하겠지요.

물론 이러한 주장이 어느 정도 <밀양>이 제기하는 의문을 해소해주기는 하지만, 저는 다른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1) 이 세상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과연 명확히 구분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아닌가? 사실 가해와 피해는 시스템적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가해가 피해를 낳고, 그 피해자는 또 가해자가 됩니다. 영화 <똥파리>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가해로 인해 본인도 가해자가 되지요. 사회시스템이라는 각도에서 접근해야 이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악순환을 끊으려면, 먼저 피해자를 생산하는 사회체제가 지속적으로 변경되어야만하고, 그래서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용서를 하고 화해가 되어야 하는 것인 듯합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용서하고 해도, 사회체제가 계속 양극화 같은 현상을 낳는다면, ‘마음치료’가 얼마나 효과가 있고 진정성이 있겠습니까?

 

(2) 몰트만의 논리는 ‘복수심’과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희생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하지만, 만일 희생자가 복수심으로 가해자를 용서하려 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수심에 불타서 용서를 요구할 경우도 있지 않나요?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 <남자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일개 서민인 박용하가, 재벌2세 김강우를 용서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복수하기도 뭣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한국인의 부자에 대한 적개심이 심해지면 복수심이 될 텐데, 이 복수심은 결국 저 놈을 이기고 내가 출세하자는 마인드로 와전되지나 않나요?

그래도 어느 정도 몰트만의 강연은, 저에게 <밀양>의 질문에 대해 일정 정도 답변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제기되는 질문은 차차 풀어나가야 될 듯합니다. 특히 지금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과 관련해서 많은 함의가 있는 강연이었습니다. 이미 벌어진, 앞으로 벌어지게 될 ‘가해의 현장들’을 직면하여 우리가 가져야할 관점을 가르쳐주는 듯했습니다. 가해자가 가식적인 행복한 용서의 미소를 지을 때, 피해자(희생자들)가 신의 권위로 진정한 그리고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박치현 님의 블로그(http://blog.daum.net/ursangelus)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출처 : 인천 다윗신학교
글쓴이 : 익투스 원글보기
메모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셰이프 오브 워터  (0) 2018.03.03
지바고  (0) 2018.03.02
[스크랩] 영화해설/역사에 휩쓸린 인물을 다룬 영화 / 세 가지 색 : 화이트[ Trois couleurs : Blanc ]  (0) 2018.01.18
메릴 스트립  (0) 2017.12.16
남한산성  (0) 2017.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