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홍세화 컬럼

tlsdkssk 2018. 1. 22. 17:55

홍세화

남의 불행 덕에 기름진 삶을 누리게 되고 오만해지면 그 불행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면하듯이,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진실과 정의의 거울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응시하려 하지 않는 것은. 정부 차원의 사과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의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발언에 머물러 있다.

<한겨레21> 최근호(1196호)는 “1968 꽝남 대학살” 특집을 실었다. 표지 사진이 섬뜩하다. 반세기 전 한국군의 총과 수류탄에 어머니와 어린 누이들을 비롯해 가족 19명을 한꺼번에 잃은 69살 레탄응이씨다. <한겨레21>은 한베평화재단과 공동기획으로 세 차례에 걸쳐 “1968 꽝남! 꽝남!” 기사를 연재한다. 이번호엔 ‘1968 꽝남대학살 지도’와 함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를 원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꽝남 순례길 1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1999년에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미안해요 베트남’ 시리즈를 연재했던 구수정 박사(현재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에 따르면,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건에 달하며 꽝남성에서만 4천여명, 총 5개 성에서 9천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고경태 <한겨레> 기자는 “기록하려는 열망으로 시작했다”고 서문에서 밝힌 책 <1968년 2월 12일>(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에서 “한국군 해병대원들이 젊은 여성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는 소문”에 관해 기록한 뒤 이렇게 썼다.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부터 20년이 흐른 뒤였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12년 남겨둔 때였다. 1968년 2월12일의 베트남은 제주와 광주의 중간에 놓였다. 그날 오후 2시께, 퐁니·퐁넛촌에서는 제주 4·3 사건의 시간이 재현되었다. 5월 광주의 시간이 흘렀다. 19살 처녀 응우옌티탄은 옷이 벗겨진 채 논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두 가슴은 난도질당해 피가 흘렀다. 왼쪽 팔도 마찬가지였다. 20년 전 제주에 들어온 토벌대원들처럼, 12년 뒤 광주에 투입될 공수부대원들처럼, 마을에 들어온 해병대원들은 포악했다. 과거의 토벌대원들과, 미래의 공수부대원들과, 오늘의 해병대원들은 생김새가 닮았고 같은 언어를 썼다….”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최대 5만 병력을 베트남 전장에 파견했다. 미국 이외 파병국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스페인, 타이, 필리핀, 대만 전체 병력의 3배에 이르렀던 한국군은 전쟁기간 합해 병력 32만여명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한반도와 베트남은 중국의 오랜 영향 아래 한자문화권이 되었다는 점 이외에도 닮은 점이 많다. 19세기 서세동점과 함께 식민지가 되었고 일제 패망으로 기대했던 민족해방은 각각 38도선과 17도선의 분단으로 돌아왔다. 강대국 사이 냉전의 볼모가 되어 동족끼리 전쟁을 치른 것까지 닮았다. 두 전쟁 모두 미국이 개입했는데, 한국전쟁이 ‘승자 없는 전쟁’으로 분단상태가 지속되었다면 베트남은 통일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호찌민이라는 걸출한 지도자, 베트남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항쟁정신과 이념의 차이를 눅여준 마을공동체 의식 등을 말할 수 있겠는데, 베트남에 있는 밀림이 한반도에 없는 대신 베트남에 없는 혹독한 겨울이 한반도에 있다는 자연조건의 차이가 가장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백년의 급진>으로 한국에 소개된 중국의 원톄쥔은 세계를 식민종주국인 유럽, 식민화된 대륙인 미주와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의 절반, 그리고 원주민 대륙인 아시아의 셋으로 나눈다.(<녹색평론> 2018년 1·2월호) 아시아의 같은 원주민 사이이면서 원한관계가 없는 베트남의 땅을 한국군은 왜 군홧발로 밟았을까? 지금은 70살을 넘겼지만 반세기 전 팔팔했던 젊은이들은 부산항을 떠난 수송선이 동남중국해를 지날 때 시꺼먼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 중 5천여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1만여명은 부상했으며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이가 2만명을 넘는다. ‘추악한 전쟁’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국방장관으로 발탁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 군사개입을 추진, 확대했으며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다. 그는 1995년에 펴낸 회고록 <베트남 전쟁의 비극과 교훈>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잘못했고, 끔찍하게 잘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왜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할 빚을 안고 있다.” 한국에선 아직 이런 발언을 찾기 어렵다.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것조차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자유세계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계속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촛불 시민의 힘으로 감옥에 보낸 오늘도, 베트남 전쟁에 관한 한, 박정희 정신은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 참전 최고의 수혜자는 박정희였다. 1975년 4월30일 베트남이 통일된 날의 3주 전 한국에서는 인혁당 재건위 여덟 분이 처형당했다. 유신체제는 공고했고 긴급조치 위반자는 고문받고 투옥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68년 1월21일 북한은 박정희를 제거할 목적으로 김신조 등 특수부대원들을 내려보냈다. 북베트남의 68년 1월 뗏(구정) 공세에 맞춰 전선을 확장할 목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21 사태’는 오히려 박정희 체제를 더욱 강력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주민등록법 시행, 예비군 창설, 고교와 대학 교련 실시로 국민 통제, 학원 병영화가 착착 실현되었다.

“전쟁은 사랑의 적입니다!” 2000년부터 꽝남성 등 민간인 학살 지역을 중심으로 의료지원활동을 펴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평연)의 송필경 원장(치과의사)은 <왜 호찌민인가>에서 베트남의 국민시인 타인타오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 남자들은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인 17~18세가 되면 입대했는데 생존율이 10%도 채 되지 않아 이성을 만나지도 못한 채 산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에겐 모든 전쟁(중일전쟁, 2차대전, 한국전쟁)이 그의 욕망 실현을 위한 기회였다. 베트남전쟁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로 재건의 기회를 얻었듯이, 베트남전쟁 특수와 뒤이은 중동 건설 경기로 박정희는 “잘 살아 보세!” 구호 속에 물질을 담을 수 있었다. 남북한 경제와 생활수준은 70년대를 지나면서 역전되었고 박정희는 종신 대통령이 될 예정이었다.

남의 불행 덕에 기름진 삶을 누리게 되고 오만해지면 그 불행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면하듯이,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진실과 정의의 거울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응시하려 하지 않는 것은. 정부 차원의 사과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의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발언에 머물러 있다. 1985년 종전 40주년을 맞아 독일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40년 전에 일어난 일에 책임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젊은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고통의 깊이만큼 타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걸까, 작년 9월, 1300회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길원옥 두 할머니는 “…한국 군인들에게 우리와 같은 피해를 당한 베트남 여성들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베평화재단(www.kovietpeace.org)은 청와대 앞에서 한국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1인시위와 함께 ‘만만만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만’일의 전쟁, ‘만’인의 희생, ‘만’인의 연대…. 4월에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관한 ‘시민평화법정’도 열 계획이다. 부디 많은 시민들이 ‘만’인 대열에 참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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