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침상 다른 이불 덮고 누웠네 이이
문을 닫아 걸면 仁이 아니고 閉門兮傷仁(폐문혜상인)
잠자리를 같이 하면 義가 아니라 同寢兮害義(동침혜해의)
병풍도 치워놓고 같은 방에서 撤去兮屛障(철거혜병장)
다른 침상 다른 이불 덮고 누웠네 異牀兮異被(이상혜이피)
1583년 9월 28일, 중세지성의 상징적 존재인 율곡 이이(李珥:1536-1584)는 황해도의 어느 강마을에서 혼자 하룻밤을 묵고 있었다. 달도 이미 져서 캄캄한 밤에, 누가 똑똑 노크를 했다. 문을 열었더니, 유지(柳枝)라는 아가씨가 방긋 웃으면서 들어섰다. 봄바람에 이리저리 너울대는 버들가지 같은 청순가련형의 아가씨였다. 텅 빈 숲 속에서 호랑이가 어흥~ 어흥~ 울어대는 밤에 자신을 찾아온 아가씨를 냉정하게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율곡이 평생 동안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들어온 인(仁)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아가씨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금과옥조인 의(義)의 도리에 어긋날 터였다. 그러므로 율곡은 같은 방 속의 다른 침상에서 다른 이불 덮은 채 하룻밤을 보낸 뒤, 유지를 고이 돌려보냈다. 위에서 인용한 것은 바로 그런 사연을 담은 율곡의 친필 ‘유지사(柳枝詞)’의 일부다. 그런데 유지라는 아가씨는 대체 누굴까?
유지는 황해도 황주의 선비집안 출신 기생이었다. 1574년 10월 율곡이 서른아홉 나이에 황해감사로 부임했을 때 시중을 들었는데, 그 때 유지는 열여섯 살 안팎의 어린 소녀였다. 미모가 각별하게 빼어난 데다, 남다른 품격과 유교적 교양까지 갖추고 있었다. 율곡은 그녀를 어여쁘게 여겼고, 유지는 율곡을 몹시도 흠모했다. 1582년 율곡이 나랏일로 관서(關西)지방을 왕래할 때도 유지가 언제나 안방에 있었다. 1583년 가을, 율곡이 황주에 사는 누나에게 문안을 갔을 때도 유지와 만나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셨고, 돌아올 때는 멀리까지 따라와서 전송해주었다. 율곡을 보내고 돌아갔던 유지가 난데없이 다시 유턴을 하여 호랑이가 어흥~ 어흥~ 울어대는 밤에 율곡이 머무는 강마을 숙소로 뛰어들었다. 그날 밤 율곡은 유지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놀라울 정도로 진솔하게 담은 ‘유지사’를 써서 유지에게 주었다.
장장 10년 동안 참 애틋한 사랑을 나누면서, 유지는 율곡을 절실하게 원했다. 그녀는 율곡이 그 다음 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삼년상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율곡의 여자’로 평생을 살았다. 율곡도 유지를 애타도록 사랑했지만, 끝내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율곡의 표현대로 그들의 관계는 ‘정(情)에서 시작하여 예의에서 끝난’ 관계였다. 하지만 진정으로 율곡을 원했던 유지에게는 선을 넘지 않는 율곡의 태도가 훨씬 더 야속하고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 세상 있다는 말 정말이라면/ 신선세계에서 만나 사랑 나누리.” ‘유지사’의 마지막 대목이다. 과연 그들에게 다음 세상이 있었을까? 그들은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났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예의를 넘어서는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누었을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참말로 답답한 여름이다, 아아!
글: 이종문(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에서
'詩가 흐르는 상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기다림 ...곽재구 (0) | 2017.08.25 |
---|---|
[스크랩] 물꽃 / 복효근 (0) | 2017.08.23 |
[스크랩] 눈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니 / 이해인 (0) | 2017.08.18 |
감성사전/이외수 (0) | 2017.08.05 |
[스크랩] 이병률 끌림 중에서 (0) | 2017.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