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기사식당

tlsdkssk 2017. 6. 17. 05:35

[토요판]이런, 홀로!?
혼밥의 성지 기사식당

[한겨레]

많은 기사식당은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탁자마다 설치되어 있고, 가스레인지 위에 불판을 올리고 양념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올려 조리해 먹는 메뉴를 주력으로 삼는다. 기사식당의 기본은 혼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토요일 오전 8시. 모시는 고양이 두 분이 따라 나오는지 확인한 뒤 재빠르게 문을 닫고 집을 나선다. 2시간 전쯤 일어나 밀린 집안일을 했더니 적잖이 배가 고프다. 약간 빠른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집 근처 기사식당. 이미 세 사람이 제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 ‘오늘의 메뉴’인 김치찌개를 먹고 있다. 세면대가 보이는 벽 바로 맞은편 자리에 앉아 나지막이 외친다.

“사장님, 여기 돼지불백 하나랑 계란찜 하나요!”

나는 기사식당 애호가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기사식당에 간다. 가장 많이 주문하는 메뉴는 돼지불백이다. 주말에 한 끼 이상은 기사식당 돼지불백을 먹는다. 고추장 양념에 양파와 파 등 야채가 듬뿍 들어가 한데 조리된, 비계가 적당히 있는 돼지 뒷다리살을 상추에 얹은 뒤 싸 먹을 때마다 꿀맛 같은 주말이 왔음을 실감한다. 거기에 뚝배기 가득 담긴 두툼한 질감의 계란찜을 함께 먹으면 든든해진 배에서부터 나오는 만족감이 있다. 지금 사는 곳에서 오래 머무르겠다는 마음을 먹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근처에 업력이 제법 오래된 기사식당이 여러 곳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성비라니

‘혼밥’하는 데 기사식당은 최적의 장소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편의점 도시락도, 재수할 때부터 20년 가까이 사먹는 도시락 전문점도, ㄱ자로 시작하는 네 글자 상호의 분식집 콘셉트의 식당도 기사식당엔 미치지 못한다.

먼저 이른바 ‘가성비’(가격 대 성능의 비율)가 탁월하다. 맛은 기본이다. 기사식당 ‘업계’가 일반 요식업종보다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택시기사들을 주된 고객으로 삼다 보니 10㎞ 넘게 떨어진 곳까지 경쟁이 벌어지는 하나의 시장으로 묶인다. 그러다 보니 박리다매를 기본적인 영업 방침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몇 해 이상 식당이 유지되었다는 것 자체가 훈장이나 마찬가지인 산업이랄까. 그래서 새로 문 여는 곳도 흔치 않다. 대신 업력이 오래된 기사식당은 손님을 끌어모으는 특장점 하나는 있기 마련이다.

즐겨 가는 곳 가운데 하나인 마포구 대흥동 ㅈ식당은 5000원짜리 뚝배기 돼지불백이 시그니처 메뉴다. 뚝배기에 가득 담긴 돼지고기에, 계란말이(때로는 계란프라이)가 기본 반찬으로 나온다. 계란말이는 조류인플루엔자(AI)가 기승을 부려 계란값이 금값이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나왔던, 이 가게의 상징 같은 존재다. 상당한 대식가인 나조차도 여기서 한 끼를 먹으면 배가 상당히 부르고 돼지불백을 남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끔 고민을 할 지경이다. 인근 대학 학생들도 자주 와 기사식당이라 부르기 애매하지만 박리다매, 푸짐한 양, 적당한 맛이라는 기사식당의 삼박자를 잘 갖춘 곳이다.

집 근처 단골집의 경우 지난 주말엔 ‘오늘의 메뉴’로 5000원에 김치찌개와 뼈해장국을 팔았다. 생선구이는 7000원이었는데 큼지막한 삼치가 구워져 나왔다. 내가 즐겨 주문해 먹는 돼지불백은 6500원. 뒷다리살 200g에 양파, 파, 김치가 적당히 많이 들어간다. 계란찜은 국물요리 1인분이 담기는 커다란 뚝배기로 나오는데 5000원이다. 여기에 4가지 반찬에 김치가 무한리필된다. 주말 반찬은 오이소박이, 꽈리고추볶음, 무말랭이, 콩나물이었다. 게다가 열무 동치미 국물이 참 맛있다. 쌈 야채로 상추도 아낌없이 준다. 그러니 돼지불백을 안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며칠 전 갔던 또다른 인근 기사식당은 미나리 우렁이 무침, 얼갈이 무침, 김치를 주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신선한 야채로 만든 반찬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은 기사식당밖에 없다. 혼밥하는 분들은 다들 알 것이다. 고기보다 야채 먹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5000원 안팎 돼지불백·생선구이
AI 창궐해도 계란프라이는 그대로
택시기사가 주고객…내공은 기본
홀로에게 ‘절실’한 야채반찬 푸짐 혼자 먹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때로는 삼겹살 2인분으로 파티도
출퇴근 시간에도 늘 열려있는
혼밥 어려운 시대의 마지막 보루

아침 일찍 문 열고 저녁 늦게 문 닫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을 수 있다. 웬만한 기사식당은 오전 6~7시 정도면 문을 연다. 손님이 많은 출근시간대 이전에 식사를 해결하려는 택시기사들을 맞기 위해서다. 점심식사 손님을 상대로 영업하는 일반적인 식당이 오전 10시30분~11시 정도는 돼야 문을 여는 것과 다르다. 밤늦게 밥을 먹고 싶다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 나처럼 아침을 먹는 게 정말 중요하지만, 혼자 살아서 그러기 어려운 사람에게 기사식당만한 곳이 없다. 얼큰한 김치찌개에 밥 한 공기 뚝딱 먹고 출근하는 날이면 무언가 든든하다.

경우에 따라 24시간 하는 곳도 있다. 저녁식사를 못하고 귀가할 때 종종 들르는 ㅇ식당은 밤낮없이 하루 종일 4000원에 선지해장국과 비빔밥을 판다.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혼자 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니, 기사식당은 혼자서 밥 먹는 게 표준이다. 어딘가에서 차량을 몰며 생업에 종사하다, 잠깐 끼니를 때우러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개 조용히 밥을 먹고, 기껏 해봤자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는 정도다. 오히려 둘 이상 앉아 있는 경우가 특이하다. 그들이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술 같은 걸 먹는 건 더 보기 어렵다. 누구나 혼자 잠깐 와서 밥 먹고 돌아가는 공간. 혼밥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안한 식당 운영 형태다.

혼밥의 최고 난이도라는 고기 구워 먹기도 기사식당에선 쉽다. 아니, 기사식당의 기본은 혼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다. 많은 기사식당은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탁자마다 설치되어 있고, 가스레인지 위에 불판을 올리고 양념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올려 조리해 먹는 메뉴를 주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자면 기사식당에서 돼지불백 다음으로 자주 먹는 게 삼겹살이다. 예의 단골집에서는 1인분 삼겹살을 판다. 생삼겹살은 200g에 1만원, 냉동삼겹살은 7000원(공기밥 제외)이다. 당연히 냉동삼겹살을 먹는다. 주문하면 알루미늄 포일이 얹힌 정사각형 불판이 설치되고, 알맞은 두께로 잘린 삼겹살 한 접시가 나온다. 포를 뜨듯 지나치게 얇지도, 신선한 고기를 강조한다고 지나치게 두껍지도 않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먹던 그런 냉동삼겹살이다.

조금 사치를 부려 2인분을 주문하고, 공깃밥을 하나 곁들여 먹는다. 같이 구운 김치와 마늘장아찌 같은 찬을 올려서 쌈을 싸 먹어야 제맛이다. 한 접시 가득 놓인 삼겹살을 구워 뚝뚝 흘러내리는 동물성 지방을 먹는 맛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혼자 가서 1만5000원을 내고 고기를 잔뜩 먹을 수 있는 곳은 정말 서울 시내에서는 흔치 않다. 그것 하나로 기사식당은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사실 이렇게 기사식당에 대한 예찬론을 길게 펴는 것은 혼자서 맘 편하게, 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흔히 찾을 수 있었던 백반집을 이제는 찾기 어렵다. 그나마 구도심 지역은 사이사이 밥 파는 가게들이 있지만, 낡은 주택들을 헐고 들어선 뉴타운에서 제대로 먹을 만한 밥집을 찾기란 난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팬시한 척하지만 실제 들어간 재료나 가공 상태를 보면 영 미덥지 못한, 그런 가게들은 비쌀 뿐만 아니라 혼자 편하게 밥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을 순 없잖아 요즘은 아예 재래시장이나 소규모 공장이 밀집해 있던 지역의 식당을 일부러 찾아가기까지 한다. 십몇년 전이라면 평범한 동네 식당이었을 가게들이 이제 흔히 찾기 어려운 맛집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퇴근하고 성동구 뚝도시장의 ○○빈대떡을 찾았다. 가운데 빈대떡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만, 빈대떡은 팔지 않는다. 대신 밥과 각종 술안주를 판다. 찌개류는 각 6000원, 안주는 각 1만원이다. 두 사람이 부대찌개 2인분, 계란말이 하나, 해물파전 하나를 시켜 배불리 먹었다. 김치찌개 베이스인 국물에 스팸과 비엔나소시지, 콘비프가 들어간 부대찌개는 별미였다. 밀가루 사용을 최소화하고 대신 파와 오징어가 가득 들어간 반죽 위에 작은 새우를 얹은 해물파전은 사장님의 요리 센스가 남다름을 실감케 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먹고 있는 가자미구이가 먹고 싶어 속으로 군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과연 이 가게는 앞으로 몇 년이나 갈 수 있을까. 이런 곳이 사라지면 공업제품을 연상케 하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고 살아야 하는 건가.” 사람들은 지금이 혼밥의 시대라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혼밥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나마 기사식당이 최후의 보루가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기사식당에 간다. 애국하는 심정이 이런 것일 게다.

'살며 사랑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양할매들의 편지  (0) 2017.06.20
만약에  (0) 2017.06.19
촛불혁명과 정유라  (0) 2017.06.13
고독......  (0) 2017.06.10
[스크랩]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장미 그리고 루 살로메......  (0) 2017.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