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에 몇 번 갔었지만 그 유명한 미라보다리에 가보지 못해서
어느 날 아침에 미라보다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숙소 바로 앞이 전철역이라
10번 전철을 타고 불과 몇 정거장가서 미라보다리 역에 내렸습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프랑스 빠리의 세느강에는 30개 이상의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들 중에는 알렉산드르 3세교처럼 화려한 다리도 있지만
대부분 오래되어 낡아서 초라하기도 하지요.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미라보다리일 것같습니다.
왜냐면 기욤 아폴리네르가 사랑하던 연인 마리 로랑생과 헤어지고 난 후에 쓴 시
"미라보 다리"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라고 시작되는 시, 아시지요?
전철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아, 아폴리네르가 노래한 미라보 다리...
다리는 녹색... 그것도 조금 독특한 암녹색 철재로 되어있는데
군데 군데 녹이 많이 슬어있더군요.
하기사 1895년에 시작하여 1897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100년의 세월이 지났네요.
위 사진의 가운데 배 모습은 빠리 시의 공식 마크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가장 길고 아름다운 다리였다고...
그런데 막상 그 다리 위에 서니 사진을 담을 수가 없어서
다리 아래로 가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아직 아침이라 별로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멀리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고...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그렇게 세느강변을 걸어다녔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뭔가에 쫓기듯 다니게 되는데
여행 중에 모처럼 한가한 마음으로 강변을 걸었습니다.
몽마르뜨 뮤지엄에서 본 기욤 아폴리네르의 사진 (2016년 7월)
시인이며 미술 평론가로 알려진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폴란드 출신의 어머니와 이태리 장교인 아버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남프랑스에서 살다가
19세에 빠리로 와서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므로 시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무명의 화가 피카소를 알게 되었고 몽마르뜨에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동 작업실인 '세탁선, Bateau Lavoir''을 드나들며 그들과 교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여류화가이며 시인이었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993-1956)은
빠리의 유력한 인사의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숨겨진 여자로 살았던 어머니 멜라니-폴린 로랑생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공부하여 화가의 길을 걷게 되고
1905년에 '세탁선'에서 피카소 등 화가와 시인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운명처럼 마리는 1907년 그녀의 첫 개인전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다고 하지요.
Marie Laurencin, Apollinaire und seine Freunde/ Apollinaire and his friends, 1909. 빠리의 퐁피두센터 소장
2014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Schirn Kunsthalle 미술관에서 열린"1900년 몽마르트"라는 전시회에서 찍은
마리 로랑생의 작품입니다. 가운데 남자가 아폴리네르이고 오른쪽 블루 드레스입은 여자가 마리 로랑생, 그리고 친구들..
27세의 젊은 시인과 24세의 발랄하고 상큼한 여류 화가의 사랑,
아름다운 만남이었을 것같아요.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하게 되면 시인이 된다고 하는데
시인이 사랑을 하게 되었으니...
더구나 두 사람은 모두 사생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기욤은 많은 작품들을 마리 로랑생을 위해서 썼다고 합니다.
이들의 사랑을 알게 된 화가 앙리 루소는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몽마르뜨 뮤지엄에서 본 마리 로랑생의 사진 (2016년 7월)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어요.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라고 하던가요?
그들의 사랑도 불과 5년을 넘기지 못했지요.
기욤과 마리... 서로의 개성이 강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애시당초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었을까요?
그즈음 그들에게 불어닥친 사건이 있었다고 해요.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의 미소'가 도난 당하자
당국은 일주일 동안 박물관 문을 닫고 평소에 루브르 박물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던
피카소와 기욤 아폴리네르를 의심하여 여러가지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물론 2년 후 범인이 나타나게 되므로 피카소와 기욤의 혐의는 풀렸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마리는 기욤에게 결별선언을 했다고 하네요.
기욤은 마리의 결별 선언을 듣고 놀란 가슴을 안고 미라보 다리를 건너서
마리를 만나 마지막 이별을 한 후 피카소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썼다는 시,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무네
(중략)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무네"
*****
미라보 다리 (2016년 7월)
기욤 아폴리네르는 마리 로랑생과 헤어진 후 다른 여인들을 만나
그녀들을 위한 시를 쓰기도 하다가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보병 소위로 입대하였는데 (1914년) 머리에 파편을 맞고 2년 뒤에 제대하여
여러차례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다가
끝내 1918년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고 해요.
마리 로랑생의 자화상, 1905년, Musee de Grenoble
(프랑크푸르트의 Schirn Kunsthalle 미술관에서, 2014년)
마리도 기욤과 헤어지고 곧 바로 독일인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자 마리는 프랑스에서 살지 못하고 스페인에서 살기도 하지만
결국은 이혼을 하는 등 그녀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네요.
그녀는 기욤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그와의 사랑을 일생 잊지 못했는지
그녀는 인생에서 죽음보다 더 불쌍하고 슬픈 일은
잊혀진다는 것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네요.
"죽은 여자 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
잊혀진다는 건
가장 슬픈 일"
마리 로랑생의 시 "잊혀진 여자" 마지막 구절이네요.
미라보 다리,
기욤이 이 다리를 건너 마리 로랑생한테 가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돌아온 것이 1911년 어느 날이었을테니 그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후 1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나버렸고 다리는 이토록 녹슬고
기욤도, 마리 로랑생도 모두 가버렸는데
그러나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어쩌면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거예요.
그 가운데서 사랑하며 슬퍼하며 미워하며 그리워하며...
누군가 말하더군요.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꼭 해보라고...
그런가요? 정말 그럴까요?
그래요.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사랑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랑이, 어느 사랑이 영원하던가요?
어차피 인생이 유한하니까 사랑도 유한할 수 밖에 없겠지요.
행복에 겨워 솜사탕같은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같던 달콤한 사랑도
죽음도 두렵지 않던 열정적인 사랑도,
죽을 것같이 고통스러웠던 사랑도,
아무리 아름다웠던 사랑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지고...
기억의 한 모퉁이나 차지하고 있을까~~요?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미라보 다리'라는 시는
앞으로 세대를 지나면서도 마리 로랑생과의 짧은 사랑과 함께
후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테이니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 는 말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래 사진은 마리 로랑생 작품인데
2014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Schirn Kunsthalle 미술관에서 열린
"1900년 몽마르트"라는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Marie Laurencin, Portraits (Marie Laurencin, Cecilia de Madrazo and the dog Coco)
마리 로랑생,
그녀는 꿎꿎하게 자신 만의 길을 걸었던 여성인 것같습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리 로랑생은 섬세하며 여성적이고 소박하고 유연한 색채배합으로
환상적이며 감성적인 그림을 그리며 파리 화단에서 여류화가로, 시인으로
입지를 굳히며 다채로운 활동을 하다가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는 등 어지러운 시대에도 역시 여성이 오래 살았네요.
남은 자... 부부이건, 연인이건, 헤어지고 난 후
그 중 한 사람이 이생을 떠나게 되면
모든 고통은 남은 자의 몫이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같아요.
기욤 아폴리네르를 보내고도 38년이나 더 살았지만
기욤이 노래한 아래의 싯귀만으로도 행복했을 것같아요.
"너는 나의 마리...
센 강변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바람 불면 귓가로 스쳐 가는데
나는 너의 아폴리네르...
이 미라보다리 아래 마르지 않는 그 강물은 흐르는데
오늘도 내일도 흘러만 갈텐데
사랑하고 사랑하였던 나의 마리"
슈만의 아내였던 클라라도 46세의 슈만을 보내고도 40년이나 더 살았지요.
슈만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설명할 필요가 없기에 그 사랑의 힘으로 클라라는
그 오랜 세월을 슈만의 작품을 출간하는 등 많은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었을 것같아요.
물론 곁에는 항상 그녀를 지켜보는 브람스가 있기도 했지만요. ㅎ
또 언듯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로댕을 사랑했던 까미유 끌로델이 있지요.
끌로델은 위의 로랑생이나 클라라 슈만보다는 안타까운 말년을 보냈지요.
이미 자신을 배반하고 떠나버린 로댕이 생을 마감하고 나서도 26년이나 더 살았는데
끌로델은 로댕이 죽을 때 이미 정신병원에 있었고 그곳에서 30여년이나 지내다 삶을 마감했거든요.
까미유는 정신병원에서
한 때나마 절실히 사랑했던 로댕을 얼마나 기억하면서 살았을까요???
황혼에 바라 본 세느강 (2016년 7월)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가 아프면 길 가의 카페에서 차 한잔을 마시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간단하게 요기를 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도시, 빠리의 시내를
해가 저물도록 돌아다녔던
2016년 7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흐르는 노래는 기욤의 시를 노래한 레오 페레가 부르는 "미라보 다리"라는 샹송입니다.
요즈음은 빠리에서도 젊은 이들이 샹송을 별로 부르지 않는 다고 해요.
그러므로 샹송을 기억하는 세대는 우리 세대라고...ㅋ
이어지는 곡은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제 2번입니다.
왠지 이곡이 듣고 싶어지네요.
랩소디(rhapsody)는 우리나라 말로는 광시곡(狂詩曲)이라고 하던가요?
브람스와 리스트의 랩소디가 유명하지요.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Franz Liszt, 1811-1866)는
헝가리의 민속 음악을 기초로 피아노곡으로 19곡의 헝가리 랩소디를 작곡했는데
(나중에 제 2, 6, 9, 12, 14, 15번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함)
그 중에 제2번 C#단조는 가장 널리 연주되는 장대하고 화려한 곡입니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니 집시들과 함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충동을 일으킵니다.
집시들처럼 장엄하게 격정적으로 시작해서 빠르고 즐겁게 사랑의 열정을 토하다가
그 사랑의 열정이 사라지고 나면 허무하고 슬픈 추억들만 남듯이
잔잔하면서 서글픈 선율이 이어지고 다시 격정으로 치닷고...
마치 사랑으로 몸부림치는 것같이 들려지는 음악입니다.
마리 로랑생은 빠리의 유명인사들이 많이 묻힌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
기욤의 무덤 근처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다음에 빠리에 가면 그들의 묘를 찾아가 봐야 하겠습니다.
Cello의 취향이 참 별나서
유럽에 가면 묘지를 잘 찾아다니거든요. ㅎ
*****
오랫만에 글 올립니다.
동시에 저의 다움블로그도 그동안 비공개였는데
조금씩 수정하면서 공개하였습니다.
예전 포스팅 찾으시기가 훨씬 편리하실거예요.
http://blog.daum.net/khaejunglee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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