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 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운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 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 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원자력 발전소에서 잠깐 근무하기도 했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글 쓰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아주 짧은 시 한 편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글 쓰는 생활 결심한 시인
가난한 시골 거친 삶 택해
자식 배곯을까 걱정한 어머니
“짜다”며 설렁탕 국물 더 얻어
자식 투가리에 몰래 덜어줘
그 순간 기록한 시인의 글은
가난 각오한 소명의 결실
숭고한 길 가는 이 있기에
국물 짠 이유 비로소 알게 돼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성선설’ 전문
이렇게 짧은 시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시인은 강화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오직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생활을 하면서’라는 말에는, 여느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시를 위한다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게 아니라, 거친 노동도 하고, 이웃과 어울리며 살아가면서 세상을 자분자분 들여다보고 어느 순간 단어들이 뚜벅뚜벅 가슴에서 걸어 나오면 그걸 글자로 옮기는 그런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가난한 삶을 택한 결과 그의 작품에는 늘 생계의 비린내가 풍깁니다. 게다가 홀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못하는지 안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머니에 대한 애상이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시인의 홀어머니는 참 딱한 사정에 처해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가난한 살림을 억척스레 돌보아왔지만, 지금 여럿 있는 자식들 중에 누구 하나 어머니를 모실만한 형편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어머니는 오랜 시간 중이염을 앓았던 터라 소리를 잘 듣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인 만큼 시인이 두 팔을 걷고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나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 나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막 시인의 삶을 시작한 그는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독자인 내 짐작으로는, 생계를 위한 밥벌이를 하지 않겠노라고 작정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를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쪽은 어떨까요? 어쩌면 아들이 제 앞가림을 해서 늘그막에 의지처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온통 아들 걱정뿐입니다. 이런 지경에서 나온 그의 산문이 바로 저 유명한 ‘눈물은 왜 짠가’입니다.
어쩌면 이런 시인 아들을 두고서 ‘얼른 취직해서 어머니 모시고 효도할 일이지 무슨 싸구려 감상인가’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딴은 이런 비난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사명은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시인도 생계를 꾸려야만 합니다. 하지만 생계라는 일상에 자신을 묻어버리지 않고, 비탈진 언덕에서 비스듬하게 매달려 일상을 지켜보는 사람이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관찰이 있기에 우리는 가난하고 귀가 먼 어머니의 자식사랑과, 서툰 속임수와, 보고도 못 본 척 속아 넘어가 주는 식당주인과, 깍두기 한 접시에 담긴 뜻과, 그리고 눈물이 짠 이유까지도 알게 되는 것이겠지요.
모두가 제 살기 바빠서 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달음박질쳐 나가는 요즈음, 누군가는 이 시인처럼 뒤로 물러서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치열한 몸부림에 인심과 인정은 힘없이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그런 인심과 인정을 다독이고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겠지요. 시인이 그와 같은 사람이요, 수행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 가난을 자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번민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의 걸음은 비틀거릴 테고, 그런 만큼 그 입에서 나온 말과 손끝에서 빚어낸 글은 처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쏟아내지 않고 몸 안에서 어르고 달래다 쏟아낸 언어라서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우리는 잊었던 서정을 회복합니다.
아참, 눈물이 왜 짜냐고 중얼거린 시인의 이름은 함민복입니다.
법보신문 2014. 12. 17
이미령 cittalmr@naver.com
나는 바닷가에 살면서 수직과 수평의 조화로운 결정체를 만나기도 했다.
달의 힘이 수평으로 끌어준 물을 태양이 수직의 힘으로 건조시켜 줄 때 탄생하는 소금이 그 결정체다.
수직과 수평의 조화로움으로 탄생한 소금은, 수직 성향의 철이나 시멘트와 달라 물에 쉽게 녹으며,
바로 부드러움이 되고 수평이 된다.
-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중에서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 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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