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스크랩] 조지아 오키프

tlsdkssk 2016. 8. 18. 05:09

 조지아 오키프가 나의 시선을 끈 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조지아 오키프의 만남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만남을 연상시키기도 할 정도로 극적이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에서 추앙 받는 사진작가이자 평론가였으며, 오키프는 위스콘신주에 있는 조그만 시골학교의 미술 선생님이었다갤러리 ‘291’이라 불리는 스티글리츠의 갤러리에 오키프의 작품을 한 젊은이가 가져다주게 되고 그는 그녀의 작품에 번쩍 눈을 뜨고 사랑에 빠진 다는 스토리... 헐리우드 영화 같은 스토리이다. 나는 이 헐리우드 영화 같은 이야기에 주목한다. 솔직히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한 번 보자. 그녀의 그림에 특별함이 있는가. 그녀의 그림은 프리다 칼로의 그림처럼 정열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는 프리다 칼로처럼 페미니스트의 추앙을 받으며 여성성의 논란 위에 서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녀가 꽃을 그린 작품을 보고 “자궁”을 상상해 낼 수 있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유쾌한씨는 느끼는 감정일지 모르겠지만, 그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녀의 작품을 만난다면, 나처럼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okeef

 

Light Iris 

 1924, oil on canvas 

 

 

 

 개인적으로는 스티글리츠와 오키프의 만남을 좋아하지 않는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만남을 좋아하지 않듯 말이다. 두 경우 모두 극적이고 너무나 로맨틱하다. 우리의 인생에서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두 경우 모두 남성들은 이미 거장인 상태에서 여성들이 접근한 경우다. 여성들은 그들의 잠재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주 평범한 존재들이다. 이것은 감싸 안는 남성과 기대고자 하는 여성의 관계로 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이러한 관계로 바라본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으며,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왜냐면, (이상하게도 비슷하지만) 오키프와 칼로 모두 페미니스트들의 추앙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거장인 남편 안에서 성장한 두 명의 여성은 페미니스트들의 구미를 당기는 주제였을 것이다. 오키프와 칼로 자신이 어떻게 생각 했던지 상관없이 말이다.

 

 

okeef, storm

 

Storm

1981, oil on canvas 

 

 

 조지아 오키프가 페미니스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일련의 상황들을 잘 이용했음은 분명하다. 그녀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스티글리츠와 만난 이후니까 1910년을 전후해서 이다. 이 시기는 미국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미국의 페미니즘은 19세기 후반 시작하여 20세기 초반 그 틀이 형성된다. 이 시기에 미국 페미니즘은 사상적 견해 차가 있더라도, 그들의 세 확장을 위하여 통합되었던 시기였다. 미국 페미니즘이 성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1, 2차 대전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2차세계 대전의 경우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남성들이 참전하게 되어 공백이 산업전선을 여성들이 채우게 되고 그 역할이 많이 증대되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통하여 여성은 집안일만 한다는 사고에 많은 전환이 가져오게 되며, 많은 산업분야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 분리가 사라지게 된다. 물론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참전했던 남성들이 돌아오게 되면서 상당 부분 문제가 생기지만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페미니즘은 그 세가 커짐에 따라 점차 분열하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여성과 남성을 동일시 볼 것인가(차이가 없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컸다. 두 번째는 여성 단체의 정치 참여 문제였다. 기존의 정당과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만의 정당을 만들 것인가. 세 번째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나눠진 계층에 있다. 이러한 문제들로 여성단체들은 분열하고 그 세력이 많이 약해진다. 대략 이 상황이 6, 70년대의 상황이다.

 

 이런 얘기를 주욱 늘어 놓는 것은 이것이 조지아 오키프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자궁을 또 올린다면 그것은 너무나 전통적이다. 여성의 자궁이 의미하는 것은 다산성이며, 다산성은 곧 어머니를 의미한다. 어머니란? 읽기 나름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궁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문제일까. 여성에게 있어 가장 비밀스러우며 성스러운 부분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기존에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냈다면, 그것은 그녀가 페미니즘의 전사라는 것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이것을 오키프에게서 찾아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이다. 70년대는 미국 페미니즘이 자신들의 세를 회복하기 위해 여타 분야로 치열하게 손을 뻗어 가던 시기이다. 그 손이 미친 것이 조지아 오키프인 것이다.

 

 

okeef

 

Red Canna , 1923

 

 

 

 조지아 오키프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녀의 그림에서 뭔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진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비평이, 논쟁이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개인이 느끼기에 틀리겠지만, 조지아 오키프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만큼 거장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녀는 만들어진 존재다.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이름을 날릴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프리다 칼로와의 차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그림을 보면 분명해진다.

 

 

 

 

 

okeef

 

Cebolla Church, 1945

Oil on canvas, 20 1/16 x 36 1/4 in. (51.1 x 92.0 cm.)

Purchased with funds from the North Carolina Art Society

 (Robert F. Phifer Bequest), in honor of Joseph C. Sloane,

 

출처 : 바벨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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