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조정래...

tlsdkssk 2016. 7. 31. 21:20
반신반의했건만 역시 조정래(73)였다. 결과는 또 베스트셀러. '태백산백' '아리랑' '한강'까지 대하소설 3부작이 1550만부나 판매된 작가. 3년 전 '정글만리' 판매량도 190만부였다. 노(老)작가의 신작 '풀꽃도 꽃이다'는 지난달 12일 출간된 후 17일간 26만부 팔려나갔다. 두 권짜리인 이 소설책은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판매량 1위에 오르는 등 대다수 서점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 소설의 부흥을 다시 견인 중인 그를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과열 교육의 성지(聖地)라 부를 만한 강남땅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두 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구어체로 싣는다.

―풀꽃이란 비유가 신선한데요.

▷한반도 등뼈가 태백산맥 아니오. 그 허리가 잘린 분단을 제목 '태백산맥'은 상징했지. '정글만리'는 인간세계라는 정글이 만리장성처럼 끝이 없다는 걸 비유하고자 했고. 장미꽃만 꽃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풀꽃도 꽃이지. 존중받지 않을 인간은 세상에 하나도 없어.

―이번 책 반응도 '역시 조정래'입니다.

▷동시대의 고민과 고통을 투시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그게 내 역할이오. 이 시대 교육의 고민은 누구나 하고, 누구나 알지. 현실을 고민하던 독자들은 이걸 깨달을 뿐이에요.

―과열교육의 '죽음의 열차'를 막기는커녕 이 열차에 자식 못 태워 힘겨워하는 부모들이 더 많습니다.

▷내가 보는 잘못된 교육의 원인은 세 가지야. 첫째, 교육정책이 틀렸고, 둘째, 부모들이 탐욕을 부렸고, 셋째, 대졸과 고졸 임금 격차가 너무 커. 내 소설이 이걸 좀 바꿨으면 해요.

―소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은 변함없으신지.

▷보시오. 인류사가 그래 왔잖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없었으면 프랑스 혁명 정신이 널리 퍼질 수 있었겠어? 소설은 세상을 늘 변화시켜 왔어. 난 그 믿음이 확고합니다.

―쓰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걸 묻긴 해. 그런데 비결? 그런 게 어딨어. 다만 지금 필요하고, 또 유익하기 때문이겠죠. 문학은 인간의 발명품이야. 더 크게 보면 종교, 정치, 언어는 인간의 3대 발명품이었고, 언어 중에 제일 큰 영향력은 문학에서 오지. 유익하지 않은 발명품을 인간은 버려왔어요.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유익함이란 뭔가요.

▷문학사가들이 그랬잖아. 문학은 그 시대의 고민, 문제, 갈등, 그리고 모든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첫 소설책을 낼 때 '작가의 말'에 썼어요. 시대가 처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동시대의 고통이고 고민이니까 그들이 읽는 거야, 내 책을.

―주인공 이름이 강교민입니다. 책에서 어떤 단어들의 줄임말이라고 퀴즈를 내셨던데. 오늘 보따리 푸시지요.

▷주변에 몇 명이 맞혔어요. 강교민의 이름은 '강력한 교육 민주화'의 줄임말이지. 나 언론에 처음 말하는 건데, 괜찮지? (웃음)

―사실 밀리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축복은 아니었죠.

▷난 현실의 고뇌를 반영하지 않으면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기원은 내가 볼 때 1932년 만주사변이거든? 일본이 중국을 먹으면서 조선인 혹자는 생각했지. 독립은 영원히 끝났다고. 영국의 인도 지배가 200년이 된 시절이니, 말 다했잖아. 그들은 순수문학을 했고, 허위의식에 절었어. 그들 문학에 식민지란 고민은 없었어. 나는 언제나 현실적 고민을 문장으로 쌓아올렸을 뿐입니다.

―예전에 '황홀한 글감옥'에 갇혀 산다고 하셨습니다. 글쓰기가 고통은 아니신지.

▷고통이니 감옥이지. 죄수의 감옥은 몸을 옥죕니다. 근데 여기는 황홀해. 작가의 글감옥은 황홀하다고. 문학은 글자로, 미술은 색(色)으로, 음악은 음(音)으로 황홀해져요. 석가모니만 예수만 깨달음의 정진을 얻고, 득도의 열반을 거두는 게 아녜요. 예술가들은 고통을 느끼면서 황홀해지지. 나는, 고통은 황홀에 비례한다는 믿음으로 살았어.

―황홀함이 고통을 상쇄한다.

▷5000만 인구 중에 내 글 안 본 사람 있나. (웃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찬사. 소설의 막장을 덮을 때 아쉬웠다는 칭송. 더 황홀함이 어디 있소?

―재능과 노력이란 두 유전자를 동시에 갖추기란 어려운 일 같습니다.

▷인간은 사고의 동물이고, 그 사고로 문명과 문화를 만듭니다. 그런데 재능만 갖고는 사고가 안 돼요. 평생 글 쓰는 재주뿐이던 나는 재능이 40%, 노력이 60%인 것 같아요. 열정을 유지하는 게 능력이었던 게지.

―육필원고가 늘 술술 써지는 건 아니겠지요.

▷글이 안 될수록 더 달라붙어야지. 난 안 풀리는 대목을 해결해야만 돌아앉아요. 원고지를 피하거나 여행을 떠나면 더 멀어지는 법이야. 자기와의 싸움이고, 자기 투시랄까. 극복하고 투쟁하면서 나는 깨달음이 와요. '나는 나를 지배한다'는 깨달음. 나는 물러선 적이 없습니다.

―명장(名匠)이란 호칭을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들을수록 익숙하지가 않아. 고맙긴 해도. 나는 내게 오는 고통을 이겨낼 뿐이에요.

―최근 한 공무원 발언에 '기생충'이라 꾸짖으셨는데.

▷공무원은 세금을 먹고 사니 국민의 종복이거든. 머슴이나 종이라고. 그게 너무 봉건적 용어라면 '봉사'라고 합시다. 보수를 받으니 헌신은 아닐 테고. 봉사자가 국민이 준 권력을 휘두르는 건 아니라고 봐. '뭘 도와드릴까요'가 아니라 '그건 규정상 안 됩니다'가 공무원인 사회는 희망이 없죠.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가 다음 소설 주제라고요.

▷민주주의에서 누구나 궁금하잖아요. 국가의 주인이 국민 맞아? 늘 권력자들의 것이었고. 이건 주객전도예요. 불행한 사회지. 감시하지 않는 국민도 자각해야 하고. 그걸 담아보려 해요.

―작가 나이로 46년.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뭡니까.

▷내 수식어 중에 난 이 세 단어가 제일 마음에 들어. 고액, 성실, 납세자. (웃음) 그런데 낸 세금보다 더 많은 국민 세금으로 내가 쓴 작품의 문학관을 두 곳이나 만들어 주셨어. 보성의 태백산맥문학관과 김제의 아리랑문학관. 그걸 얻었다는 건 작가로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잃은 것은요.

▷없어요, 단 하나도.

―'태백산맥'으로 겪은 고통은 선생께 무엇입니까.

▷11년간의 고초. 그건 분단시대를 사는 작가로서 통과해야 할 과정이었지. 이제 좌익하던 사람들을 흡혈귀, 악마로 묘사하던 시대는 갔고 최소한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만큼은 안 하잖아. '태백산맥'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꿨어요. 그게 문학의 힘이야.

―인간 조정래를 소설가 조정래가 묘사한다면.

▷인간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지정학적 숙명에 의해서 영원히 약소민족일 수밖에 없는 민족을 끔찍하게 사랑한 사람. 아, 기자양반. 거기 '존중하고' 뒤에 쉼표 꼭 찍어줘요. 쉼표 하나라도 허투루 쓰면 안 돼!

■ 소설가 조정래는…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 출생 △1959년 서울 보성고 입학 △1962년 동국대 국문과 입학 △1967년 시인 김초혜와 결혼 △1970년 현대문학 등단 △1975년 '소설문예' 발행인 △1977년 민예사 대표 △1985년 '한국문학' 주간 △1997년~현재 동국대 국문과 석좌교수 △1981년 현대문학상 △1982년 대한민국문학상 △1984년 소설문학작품상 △1988~1991년 '태백산맥'으로 성옥문학상·동국문학상·단재문학상 △1998년 노신문학상 △2003년 만해대상 △2006년 현대불교문학상(소설 부문) △2015년 이승휴문화상 문학상

그의 대답은 "껄껄"
태백산맥·한강·아리랑…육필 원고 수만여장
'오른손이 주인을 꽤 원망하겠습니다' 물음에

자꾸만 그의 오른손에 눈이 갔다. '태백산맥'(원고지 1만6500매), '아리랑'(2만매), '한강'(1만5000매)이 저 손에서 나왔고 '정글만리'(3615매)와 '풀꽃도 꽃이다'(2122매)에 이르러서도 조정래 소설가는 육필(肉筆)을 꺾지 않았다.

'오른손에 인격이 있다면 주인을 꽤 원망할 것'이라고 농담하자 그는 껄껄 웃었다. 조 작가는 "소설 '아리랑'을 쓰던 때 넷째 손가락을 꼬집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마비가 왔고, 팔 전체를 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탈장 증세가 오기도 했다. 하루 평균 2회, 집필 기간엔 7~8회에 달하는 '국민체조'는 그의 건강비법이다. 조 작가는 "국민체조를 하면서 땀 뻘뻘 흘리고 있으면 초혜(김초혜 시인)가 '어휴, 저 징그러운 사람'이라고 한다. 징그러울 정도로 무섭게 쓰기 때문"이라고 웃었다. "김 시인이 인생의 어떤 동지 같겠다"고 묻자 그는 의외의 고백을 털어놨다. "초혜가 10년 전쯤 교통사고가 난 뒤로 아침은 내가 차린다"는 조 작가는 "우리 부부는 옥수수나 감자를 찌고, 달걀을 삶고, 과일을 두세 가지 놓고 아침을 단출하게 먹어서 내가 못할 게 없다"며 "이번 소설을 쓰면서 하루 안 빼고 내가 아침을 차렸다"고 귀띔했다. "죽을 때 난 후회가 없겠지만 아내에게는 '최선을 다해 잘했지'라는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쑥쓰러워 했다. 캠퍼스를 걷던 청년 조정래로 돌아가 '70대의 조정래'를 상상해보고, 지금 2016년 조정래와 얼마나 다른지를 물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는 "똑같다"고 답했다. 동국대 졸업생 대표로 쓴 글에서 "문학을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하겠다"고 다짐했다는 청년 조정래는 "나는 엄격하고 치열하게 살기를 희망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다.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내친김에 새삼 '묘비명'을 생각했는지도 물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 기여해야 한다'고 묘비명을 남기고 싶다는 조정래 소설가는 "사실 이미 태백산맥문학관에 써 있는 말"이라며 "그때 이미 '저건 내 묘비명'이라고 생각하며 썼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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