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낙기대

tlsdkssk 2016. 7. 19. 17:16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정부인 안동 장씨와 영양 낙기대 굴참나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맞아 경제가 망가진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하인들에게 도토리를 주워 오게 하여 1년에 200여 가마를 확보,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배고픈 사람들 300여 명이 하루 먹을 도토리 죽을 안주인 진성 이씨와 셋째 며느리 정부인 장씨가 쑤어 주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700여 명이 찾아와서 고부(姑婦) 모두 손톱에서 피가 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 글을 통해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은 재령 이문의 높은 도덕성과 주로 목재나 가구재로 사용하는 참나무가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했다는 또 다른 가치도 이해하게 되었다. 정부인 장씨는 남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80~1675)과 함께 1631년(인조 9) 영덕에서 이곳 영양의 두들마을로 분가해서 터를 잡자마자 참나무부터 먼저 심었다.

정부인 장씨(1598~1680)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퇴계학파를 계승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1564~1633)의 딸이자, 그의 수제자인 석계 이시명의 부인이며, 존재 이휘일(李徽逸)과 갈암 이현일(李玄逸) 형제의 어머니이자 밀암(密庵) 이재(李栽`1657~1730)의 할머니다. 당시 조선의 여느 며느리들과 같이 시부모를 봉양하랴, 자식들을 돌보랴, 남편을 뒷바라지하랴, 친정을 보살피랴,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을 그가 그런 와중에도 이웃을 보살피는 한편 자식들을 훌륭한 인물로 키웠으며 음식문화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명저(名著)를 남겼기 때문이다.
저서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한글 요리서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특히 조선 중기 사대부가의 요리 146종을 정리, 무려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재현이 가능할 수 있을 만큼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어법과 철자 등은 국문학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이외에도 시 9편, 서간문 1편을 남겨 문학가로서의 자질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소녀시절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썼다는 작품 ‘소소음’(簫簫吟)이다.

‘창밖에 소록소록 비 내리는 소리/소록소록 그 소리 자연의 소리러라.
내 지금 자연의 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도 또한 자연으로 가는 구나.’
자녀들에게는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일 하나라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부터 먼저 닦을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자애로운 당부를 잊지 아니한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자라 성리학자로서 목민관으로서 사회에 공헌했다.
두들마을을 찾은 우리 일행은 정부인 장씨가 심었다는 참나무를 빨리 보고 싶었다. 또한 나무가 현존하는지도 궁금했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미담과 역사성을 가진 나무라면 천연기념물이거나, 하다못해 경상북도 기념물로는 지정되었을 터인데 검색해 보아도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비가 내렸다. 안내를 받으려고 했으나 해설사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무작정 나무를 찾아 돌아다녔는데 마을 앞 정부인 장씨의 기념비가 서 있는 언덕에 큰 나무들이 무성해 가 보았더니 ‘굴참나무’였다.

여러 종류의 참나무류 중에서 굴참나무의 특징은 껍질이 두껍고 탄력이 있어 고급 포도주의 병마개로 이용된다. 일대에 낙기대(樂飢臺)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굶주림을 즐기는 곳(?)이라고도 하나 비록 굶주리지만 정부인 장씨의 갸륵한 마음씨가 즐겁게 한다는 뜻이 아닐까. 도토리 죽은 떫다. 하지만 경상도지방에서는 ‘꿀밤나무’라고 하는 데 이 말의 어원이 이 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해방 전까지도 죽 끓이는 일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명문 재령 이씨는 인연이 있는 몇 종의 나무가 있다. 이곳 영양의 굴참나무를 비롯해 영덕 충효당의 은행나무는 영해파를 반석 위에 올린 이함(李涵)이 직접 심은 나무이며, 함안 고려동의 자미화(배롱나무)는 고려가 망하자 이오(李午)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은거할 곳을 점지해준 나무다.
굴참나무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효행, 부덕, 문학, 예술, 학문을 겸비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에 비해 덜 알려진 점이다. 조선 후기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의 어머니라는 점이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아니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정웅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