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범신론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tlsdkssk 2015. 12. 26. 08:59

.

 

 

맹신 강요하던 교회권력에 범신론으로 맞서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범신론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인류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종교는 3대 유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다.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십 수세기에 걸쳐 서로 대결과 갈등만 키워왔다. 배타성이 강한 유일신교는 특유의 역동성으로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등 분야의 지속적 발전을 가져왔다. 반면 이들 간 정통성 다툼은 인류를 숱한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중세기 교권은 세속 군주를 압도하는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 14∼16세기 르네상스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전통 교권은 다소 약화됐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핵심 권력이었다. 그래서 당시 서구사회의 진리인 유일신 교리를 부정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는 신의 존재를 달리 해석하는 논리를 펴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로부터 배척받았다.

부모는 유대교 지키려 네덜란드행

 

스피노자는 1632년 신교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포르투갈 태생 유대인이다. 15세기 말 종교재판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의 아랍인·유대인이 추방됐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은 750년간 지속된 아랍 지배를 종식시키고 이 지역을 기독교 청정지역으로 환원시키려 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개종을 명했다. 극소수 유대인은 생존을 위해 형식적으로만 개종했다. ‘마라노’ 유대인이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 터키, 프랑스 남부, 네덜란드로 갔다. 스피노자의 가계도 이런 배경에서 신앙의 자유를 택해 당시 유대인에게 가장 관대했던 네덜란드로 옮긴 것이다.

총명한 스피노자는 유년시절부터 공부를 좋아했다. 5세 때부터 히브리어, 토라, 탈무드, 유대철학을 공부했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신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카발라는 토라 등 유대교 전통 경전을 심층 분석하고 우주의 신비와 접목시켜 과학연구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카발라엔 비전(秘典)인 ‘조하르’가 있다.

스피노자는 원래 랍비(유대교 성직자)를 지망했다. 언어에도 재주가 있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도 배웠다. 자신의 이름도 포르투갈어 벤토나 히브리어 바뤼흐 대신 라틴어 베네딕투스를 주로 사용했다. 라틴어와 기독교를 연구하던 스피노자는 점차 유대교 교의(敎義)에 회의를 느꼈다. 또 동세대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주체철학 중 존재론을 받아들였다. 다만 그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신의 초인성, 영육의 2원성 등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의 무한우주론을 발전시켜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을 정립했다. 브루노는 신격을 부정해 종교재판 후 화형을 당한 인물이었다.

네덜란드 유대교단은 스피노자가 유대교 교리에 반하는 연구를 계속하자 1656년 그를 신성모독죄로 파문했다. 파문 후 한동안 암살 위협에도 시달렸다. 외톨이가 된 그는 생계수단으로 안경, 현미경, 망원경 등의 렌즈를 깎는 일을 했다. 주변 지인들이 십시일반 도와주긴 했지만 생활은 옹색했다. 고독하고 빈한한 생활 여건 속에서 그는 오로지 철학적 진리 추구에 몰두했다. 1670년 덴하흐(헤이그)에 정착했다. 167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독자적인 연구를 더 원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범신론을 통해 무한한 신적 존재는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했다. 신을 우주와 대자연의 내재적 원인으로 보았다. 인격체의 신이 아닌 자연으로서의 신을 긍정했다. 신의 본성인 자유로운 신앙이 아닌 맹목적 복종을 강요하는 교회체제의 신을 부정했다. 교회가 사랑과 자비의 신이 아닌 속박, 심판, 처벌하는 인간화된 신으로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유일신교의 교리로 보면 신과 자연을 동격에 놓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스피노자는 기독교 신이 행하는 이적을 인정치 않았으며 이를 빙자해 신자를 회유하고 위협하는 기성 종교의 실체도 규명하려 했다. 그는 분명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게 이단이었다.

스피노자는 평생 몇 권의 저술을 남겼다. ‘신학정치론’, ‘지성정화론’, ‘데카르트철학의 제원리’ 그리고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된 윤리학’ 등이다.

안경알 깎으며 연명, 진폐증으로 숨져

평생 독신으로 지낸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안경알을 깎다 들이마신 유리가루가 폐에 쌓여 1677년 진폐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덴하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사후 100여 년 동안 그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혹독했다. 독일 문인 괴테와 레싱만은 스피노자를 사상적으로 앞서간 인물로 평가했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이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이 말은 스피노자의 발언으로 알려졌다. 우주, 세계, 시간은 하나이므로 시작과 종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란 말뜻 해석이 있다.

평생 교단과 학계로부터 배척받은 스피노자의 철학 이론은 후일 많은 선각자에게 전수됐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디드로 그리고 독일 철학자 헤겔 등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독일 관념주의 그리고 세계사의 큰 변혁을 가져온 계몽주의와 사회주의에 투영됐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종교문제 거론은 금기에 속한다. 금기란 아픈 자에 대한 배려로 묶은 사회적 합의다. 그런데 이 금기가 사회의 보호와 침묵 속에서 간혹 배타적 권력으로 발전한다.

자유인 스피노자는 신을 공포적 존재로 부각시켜 신도를 위협과 보상으로 회유해 맹신을 강요한 당대 교회권력에 저항했다. 지금도 하기 어려운 기성 종교권력에 맞서는 커다란 용기를 보인 것이다.

 

 

중앙SUNDAY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1.24∼1677.2.21)

 

네덜란드의 철학자.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유대교단의 학교에서 헤브라이어와 성전(聖典)을 공부하였고, 카바라의 신비사상에도 접하였으나, 졸업 후에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쌓아 점차 이단적인 서구적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수학·자연과학도 공부하였고,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 학설에 의거하여 성전과 조상의 학문을 대담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려 1656년 끝내 파문선고를 받았다.

유대교 광신자 중에는 그의 암살을 기도하는 자까지 출현하였으므로, 그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한가한 시간이 생겨 연구생활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신(神)·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짤막한 논문》 《지성 개선론: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을 집필하였고, 《데카르트 철학 원리:Renati de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1663)를 출판하였다.

63년 폴부르크로 이사하였고, 70년 다시 헤이그로 이사하였다. 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 정교수로 초청하였으나, 사상의 자유와 《에티카(윤리학)》의 완성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해에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이것이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15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주저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75년 완성)를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그 자체가 사후 100년 동안 무용지물로 매장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여가에 렌즈를 갈아서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는 《국가론:Tractatus politicus》(77)을 마지막 저작으로 남기고 폐결핵으로 죽었다.

 

F.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평하여 ‘신에 취한 사람’이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이다”라고 하는 범신론(汎神論)의 사상을 역설하면서도 죽은 후에까지 유물론자·무신론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신이란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신이 아니고, ‘신은 즉 자연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에 있어 만물은 신의 형태를 빌린 것이고, 자연을 초월한 곳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개물(個物:個體)은 신의 내적 필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이 신에서 유래된 인과(因果)의 사슬에 의해 엄밀히 결정되는 필연(必然)의 세계를 말하면서, 인간의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스피노자는 사물에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자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근거로 정치와 도덕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간에게 있어 자율적인 이성의 작용이 자존성(自存性)이며, 도덕의 실제 목적은 이성의 작용으로 생기는 희열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

이성의 최고 작용은 신과의 필연적인 관계에서, ‘영원한 형상 밑에서’ 사물을 직관하는 것으로서 이것에 따르는 자족감이 바로 ‘신의 지적 사랑’이며, 여기에서 도덕의 최고 이상이 추구되었다. 스피노자 자신은 무신론자·유물론자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지만, 그의 철학 특히 자연이라는 범신론이나 연장(延長)의 속성 사고방식 속에는 이러한 해석을 낳을 소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예속에 맞선 자유의 철학

 

사람은 어느 날 영문 모르고 태어나 먹고 자고 마시고, 때로 기뻐하거나 슬퍼하다 소멸을 맞는다. 이런 한 평생이 너무 허망하다고 느껴 자연히 이렇게 묻게 된다. 인생에 어떤 숨겨진 최상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를 창조한 어떤 이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 아닐까?

창조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우리에게 심어놓은 이는 그 목적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세상 만물을 우리를 위해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들과 더불어 삶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목적과 그 목적을 창조한 이에 대한 학문이 생겨난다. 그 학문은 때로는 신학으로, 때로는 형이상학으로 불리며 인류의 역사에 개입했다. 그런데 이때 우리의 진정한 삶은 오히려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바로 지금의 삶은 최상의 목적보다 ‘열등한 형태’,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지면서 ‘부정’되는 것은 아닐까?

스피노자는 바로 이러한 편견을 교정해서 삶 자체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다. 스피노자 연구가 델보스가 말하듯, 삶은 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 삶을 긍정하는 이성의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스피노자의 자유를 향한 철학 네덜란드의 별종

 

스피노자는 1632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인 신생 국가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유대인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신학정치론』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상당한 번영을 이루고 전 세계가 감탄할 정도의 자유의 성과를 누리고 있다. 이 번창하는 도시에 모든 인종과 종파의 사람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분명 사상과 종교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네덜란드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네덜란드는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어떤 의미에선 배반하는 국가가 아니었는가? 대표적인 예가 드 비트 형제의 학살일 것이다. 군주제와 군국주의를 선호하는 칼뱅파에 맞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네덜란드 공화정의 절정을 가져온 재상 요한 드 비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칼뱅파는 쉽게 대중들을 부추겨 요한과 그의 형제 코르넬리스를 학살했다.

"극악무도한 야만(Ultimi barbarorum)!"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국민들 스스로 공화정을 저버리고 예속을 위해 싸운 것이다. 예속이란 주어진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고난 삶을 부정하는 것, 바로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일이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자유와 예속의 체험 모두를 통해 스피노자의 사유를 자극했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당한 파문을 감수한 것,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 초빙을 거절한 것 등은 모두 그의 삶 전체가 예속에 맞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낸 하나의 작품임을 알려준다.

 

예속과 상상력 미신에 의한 통치

 

대중들이 쉽게 빠져드는 예속이 스피노자를 사로잡았던 주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한 사람의 허영을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예라 믿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도 사람들이 넓은 의미에서 미신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 대중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미신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미신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약한 지성과 강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성은 앎을 획득하는 능력인데, 앎이라는 것은 늘 원인에 대한 앎이다. 결과의 인식 자체는 늘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한다. 가령 살해된 시체를 앞에 두고 살인 사건에 대해 인식한다고 해보자. 단지 시체(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앎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원인)를 알아야 우리는 참다운 인식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지성이 약할 경우 상상력이 잘못된 원인을 고안해낸다. 가령 어떤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하자. 벼락의 원인인 기상현상을 지성이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이렇게 미신적 원인을 고안한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고, 신이 그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자연법칙이 상상력을 통해, 징벌을 내리며 복종을 강요하는 공포스러운 신의 도덕법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어떤 타인이 이 신의 명령에 위배될 때 그는 ‘증오’의 대상이 되며, 내가 신의 명령을 위배할 경우 나는 ‘죄의식’의 대상이 된다. 예속적 법의 탄생과 더불어, 삶에 대한 긍정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주어진 삶을 부정하는 두 방식인 증오와 죄의식이 차지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이런 식으로 상상된 원인을 신에게 귀속시키는 일이 여러 종교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신을 통치자, 입법자, 왕, 자비롭고 정의로운 자로 상상하고 거기에 복종하고자 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자기 모습대로 신을 상상하고 복종한다. 그리고 이러한 복종은 정치적 지배력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군주가 오로지 그에게 계시된 신의 명령에 따라서만 명령을 내린다고 믿으면 사람들은 더욱 더 군주의 지배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예속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합리적 질서를 파악하는 것

 

따라서 예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상상적 원인을 근절하고 지성을 통해 적합한 원인을 인식하는 것, 즉 합리적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다. 만물이 그 안에 담겨있는 자연(이를 스피노자는 신으로 이해했다)에서 우리는 어떤 합리적인 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가?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 당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자연 안에는 우리 신체 및 다른 사물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들의 질서가 있다. 또 자연 안에는 우리가 하는 생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사물들의 질서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질서가 있다. 다르게 말하면, 자연에는 사물들의 질서가 담겨있는 ‘연장(延長)’이라는 형식이 있고, 관념들의 질서가 담겨있는 ‘사유’라는 형식이 있다. 그러므로 자연(곧 신)과 그로부터 생산되어 나온 개별자들은 ‘공통적으로’ 연장과 사유라는 형식을 통해서 존재하며, 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신은 한낱 우리의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다(지혜롭고, 덕이 있으며, 권세를 지녔고… 등등). 아울러 연장과 사유라는 이 두 형식 속에 자연과 인간이 들어있을 뿐, 두 형식 가운데 어떤 것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육체(연장)를 단죄하는 고대 이래의 모든 사고방식은 근거를 잃는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영혼이 육체의 정념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등등.

 

자연(신)이 지닌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정서를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 불렀다. 신이 지닌 질서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자는 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 결코 복종할 수는 없다. 복종은 명령하는 이의 의지를 고려하는 일인데, ‘의지’를 지닌 신이란 상상의 소산이지 인식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태양에서 빛이 나오는 것과 같은 필연성을 통해 참된 인식에서 나온다.”

기쁨의 정서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 사랑의 정서에 힘입어 우리는 능동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안의 질서(인과관계)를 인식한 자는 그 인식의 필연성 때문에 자연의 일부인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뿐 그 질서를 거슬러서 예속 상태에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그리스도 긍정과 자유의 철학

 

공포의 정서와 예속의 상태에 익숙한 시대에 스피노자는 이러한 긍정과 자유의 철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때로 그 위험은 스피노자에 대한 살해 기도로 찾아오기도 했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난과 증오로 밀려오기도 했다. 익명으로 펴낸 [신학정치론]은 그에게 큰 위협을 안고 돌아왔으며 주저 [에티카]는 생전에 출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들뢰즈의 표현)라고 불린다. 우리가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억압과 공포와 부정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면서 예속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때마다 철학자들은 스피노자의 책들을 다시 펼쳐 든다.

 

 

서동욱 / 서강대 철학과 교수 , 네이버 서양철학

 

 

 

 

 

 

 

황당한 일이 있다.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원문과 자료가 없어졌다.

몇년전 분명히 원문을 자세히 읽은 적이 난다. 내 특기인 원문을 토막쳐 사전을 찾으며 해독한 기억이 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더 황당한 일.

웹상에 황사영백서의 원문이 전부 사라졌다. 브로그,카페,웹. 전부 찾아도 없다.

몇년전 수많은 원문과 자료가 분명 있었다.

유일하게 카톨릭 계의 브로그나 카페에 올려져있는 결자투성이의 원문만 나돌뿐이다. 

1시간을 찾아도 안보인다. 누군가 심하게 훼손된 원문으로 멋지게 해석을 해봤다.

악착같이 찾아서 지금 카톨릭쪽에서 떠도는 원문과 대조하며 해역하리라.

(진짜 어처구니 없다. 어느 곳에서는 조선시대 정부가 조작을 했단다.그리고 순교자로 떠 받들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삼족을 멸할 죄를 지은 자이다.)

참고로 나는 카톨릭에 엄청 우호적인 사람이다. 친인척의 70%가 카톨릭이다.

 

유난히 스피노자가 잘 생겨보인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