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그냥 감동 받을 때

tlsdkssk 2015. 8. 3. 05:30

거실 한편에 피아노가 있다. 여기저기 칠이 벗겨지고, 한눈에 보기에도 낡았다.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다.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79)는 피아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피아노를 갖는 게 소원이었죠. 40년 전 미국 유학 때 가진 돈을 다 털어 샀어요. 내 애인이지요.”

애초에 그는 피아니스트였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KBS교향악단과 한국 초연한 연주자다. 하지만 ‘음악학’으로 방향을 전환해 서울대에서 1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젠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92년 이 학교의 창립을 주도하고 10년간 총장으로 재직했다. 퇴임 후 2002년에는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바쁘게 살아오면서 어느덧 팔순을 눈앞에 둔 그가 예전에 쓴 책을 25년 만에 다시 출간했다. <음악 선생님을 위하여>(예솔)라는 제목이 ‘참, 이강숙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음악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 예컨대 음악적 감수성은 인간의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음악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등에 대한 단상을 묶은 책이다. 이 명예교수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최근 만났다.

▲ 베토벤이나 고흐의 작품 같은

이미 표현된 것은 그려진 감동

그냥 감동 유발하는 재료 불과

▲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결과물보다 결과를 만드는 과정

- ‘한국의 1호 음악학자’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신데요.

“사실은 옳지 않은 수식입니다. 서양음악 전공자 중에서는 거의 없었지만, 국악 쪽에서는 나 이전에도 음악학자들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내가 한국에서 음악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맞겠지요. 음악학은 현재의 관습적 음악을 뛰어넘어, 음악 전반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음악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있는 것이니까요.”

- 경북 청도 산골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피아노를 접하셨는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어느 날 반 친구인 여봉현이를 집에 바래다주러 가다가죠. 오포산 어귀에서 우리집 반대 방향에 봉현이네 집이 있었는데, 그 집으로 가다보면 조그마한 언덕에 꽤 잘살던 기와집이 한 채 있었어요. 아, 그 집에서 처음 듣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지 뭡니까. 바로 피아노 소리였죠. 그 소리를 듣고 싶어 오포산 언덕에 날마다 올라갔어요.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고. 그때부터 교회나 학교에서 ‘피아노 동냥’을 하며 배우기 시작했죠.”

- 음악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일까요.

“인간에게는 몸과 더불어 마음도 참 중요해요. 한데 마음이 살아나는 순간은 ‘그냥 감동’을 받는 순간이죠. 마음속에는 아직 타지 않은 등잔의 심지들, 감동의 단초들이 굉장히 많아요. 좋은 음악을 듣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심지에 불을 댕기는 것이죠. 그 순간에, ‘아, 나는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냥 감동’은 이 명예교수가 중요하게 내세우는 개념이다. 대비되는 개념으로는 ‘그려진 감동’이 있다. “인간의 삶에서 ‘그냥 감동’하는 순간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려진 감동’만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그려진 감동은 ‘이미 표현된 감동’, 베토벤이나 고흐의 작품들, 혹은 비평가의 글 같은 것들이 표현된 감동에 속하죠. 사실 그것들은 ‘그냥 감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 ‘그냥 감동’을 유발시키기 위한 재료일 뿐입니다.”

-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고,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쾌거를 전하지만 연주자로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참 고민스럽습니다. 내가 더 젊다면, 학교를 만들 때처럼 뛰어난 젊은이들의 활동 기회를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고 싶습니다. 이젠 늙었으니….”

- 평생 음악 교육자로 일해오셨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결과물이 아니라 결과를 만드는 과정을 가르쳐야 합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위대성을 강조하지 말고, 베토벤이 교향곡 5번 2악장에서 한 줄의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습작들을 했는지를 알려줘야 하는 거죠. 그는 고치고 또 고치면서 작곡했어요. 형편없는 선율, 북북 지워버린 것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과정을 가르쳐야 학생은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교사가 외려 학생의 예술성을 죽이는 경우들이 적잖게 있습니다.”

지난 학기부터 다시 강단에 선 그는 “20년 만에 다시 하는 강의, 손주뻘인 1학년 학생들이 참 예쁘다”고 거듭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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