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명동 성당에 대한 특별기고

tlsdkssk 2014. 12. 24. 11:17

사회적 약자들이 피난처로 의지했던 천막들이 올망졸망 서 있던 곳, 그랬던 데가 고급문화 취향의 쇼핑센터로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자취를 지우고 싶더라도 가톨릭의 성지라면 성지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는가.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노동자들과 빈민들이 마지막 농성장으로 의지했던 천막들이 있던 비탈길이 사라졌다. 그 대신 자동차 길과 층계 길이 들어섰다. 고작 열명이나 모일 수 있을까, 애당초 광장의 의미를 갖지 못했던 들머리였지만 더 좁아졌고 층계에 가려 성당과 들머리는 서로 잘 보이지 않게 분리되었다. 농성할 곳도 시위를 벌일 만한 곳도 없었다. 겨울의 찬바람 속에서 그 비탈길이 기억하고 있을 민주화 운동의 궤적들,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시민들, 노동자들이 민주화를 위해 내뿜었던 뜨거운 호흡들과 박동들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급기야 들머리 옆에 있던 주차장을 지하화하고 확장한 지하 1층 공간에 들어섰을 땐 내 눈을 의심했다. 씁쓸함이 놀라움으로 바뀐 건 쇼핑센터에 들어선 게 아닌가 싶어서였는데 경건함보다는 비싸게 느껴진 곳에서 실제로 쇼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카페와 북파크가 들어섰고, 음악감상실과 은행이 있었다. 일년 내내 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오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도, 드니 성인이 프랑스 최초로 순교했다는 ‘몽마르트르’(순교의 산)에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에서도,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의 돔 대성당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경내의 모습이었다. 문화적 취향을 강조하여 비즈니스 성격을 감추려 한 속내가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겐 주눅이 들 정도로 고급스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내 귀에는 마태복음 21장의 12~13절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거기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돈 바꿔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회적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마지막 피난처로 의지했던 천막들이 올망졸망 서 있던 곳, 그랬던 데가 고급문화 취향의 쇼핑센터로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이 변화는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을 거쳐 박근혜 정권으로 바뀐 걸 반영하는 것일까.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곤 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굳히려는 목적으로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시켜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구속한 사건을 계기로 정의구현사제단을 세상에 나오게 한 모태였다. 그 서슬 퍼렜던 시절, 사제와 신자들 2000여명이 모여 유신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해제, 생존권 보장 등을 담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던 곳이 명동성당이었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폭로, 고발한 곳도 명동성당이었다. 6월 항쟁 당시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에 몸을 피한 청년학생들을 체포하려는 정권의 당국자에게 김수환 추기경이 했던 말은 지금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가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들을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그랬던 명동성당이 바뀌었다. 명동성당을 관광명소로 특화하여 개발하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가까운 명동 재개발 구역에서 강제철거와 폭력사태가 일어났을 때엔 침묵으로 일관했다. 3년 전엔가는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민주 올레’ 순례자들의 방문조차 혼례 성사를 이유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최고책임자인 염수정 추기경의 “정의구현사제단은 1987년만 해도 매우 중요한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지만 오늘날 정치 환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맞서 싸울 독재정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기존 방법론을 고집한다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날 것이다”라는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과연 그런가?

권위주의 군사정권의 엄혹한 시절에서 민주화를 거쳐 폭압적인 정치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그 대신 자본권력의 시대를 맞는가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다시 뒤로 돌아가면서 자본권력은 물론 그들과 결탁한 정치권력이라는 이중의 질곡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87년 6월 항쟁을 ‘6월’ 항쟁이라고 부를 뿐, 그 뒤 7, 8, 9월에 이어진 노동자들의 투쟁을 포괄하여 87년 ‘여름’ 항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못하는) 한계와 만난다. 오늘날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사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자신의 은행 잔고가 된 시절에 맞게 가령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대신 손배 가압류로 바뀌었는데, 이를 두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할 사람은 손배 가압류와 인연이 없거나 그런 현실에 무감한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몸을 괴롭히고 죽였는데 이제는 삶 자체를 죽이고 있다. 마음에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에 살지만 새로운 형태의 독재권력이 더 사악한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조여오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회의 변두리는 어디이고 중심은 어디일까? 중심은 오로지 하나의 점일 뿐이고 가장자리는 변방의 점들이 연대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정의구현사제단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다면 그것은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정의구현사제단에 많은 빚을 져왔는데 앞으로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 같다. 실상 사회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인간의 고통과 불행이 불거지는 곳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가 또한 변방이라는 점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다. 지난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았던 프란치스코 교종의 “조직의 안위에만 치중하는 교회가 돼서는 안 된다.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교회가 좀 더 깨지고 상처 입고 더러워지기를 원한다”는 말씀에도 사회의 변두리는 사제들이 피할 곳이 아니라 찾아가야 할 곳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년 만에 귀국했을 때,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의 무게를 절감한 바 있었다. 국내에 있던 분들은 조금씩 변화하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실감하기 어려웠을 수 있겠지만 “부자 되세요!”에 화들짝 놀랐고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말에는 비감이 엄습했다. 누추한 데 사는 사람에게 이 말을 적용해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이웃에 대한 상상력을 가진 인간의 목소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충격적인 경험이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되씹게 되는데, 아이엠에프 학습 효과까지 결합되어 사회 전체가 온통 돈의 노예가 되려고 할 때였다고 할지라도, 인간 영혼이 더 이상 추락하지 않게 막아야 할 최후의 보루가 두 군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종교와 학문(대학)이 둘 다 물신에 투항한 길에 앞장선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일일까? 대학마다 늘어나는 게 주차장, 카페, 음식점이었는데 명동성당이 그 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역관이었던 김범우의 명례방 터를 구입하여 외젠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공사 감독을 맡아 1898년에 축성되었다는 명동성당, 한국 가톨릭교회의 상징이라고 한다.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교회라 하고, 특히 한국 땅에서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으로 여러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명동성당이 이래선 안 된다. 설령 민주화의 성지라는 자취를 지우고 싶더라도 가톨릭의 성지라면 성지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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