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나는 나쁜 시인/문정희

tlsdkssk 2014. 6. 17. 14:33

나는 나쁜 시인 / 문정희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민중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던데


고백컨대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어.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곤도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에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나비시인 / 문정희

 

  도산공원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당신을 기다리는 사이

  불현듯 흰나비 한 마리 차안으로 들어왔다

  스스로 신화를 쓰는 존재?

  허공에다 알을 낳으려는 시인처럼

  그는 어린 날개로 허공을 밀며

  혼신을 다해 무언가를 표현하려 했다

  언어의 탑을 쌓았다가

  가벼이 무너뜨릴 줄도 알았다

  신이 보낸 우표?

  멀고 신비한 주소로부터

  떠나간 이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그는

  가만히 보니

  저승의 언어를 알아듣는 긴 수염도 가졌다

  당신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나비를 따라 두 번쯤

  천년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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