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론다니니의 피에타(1556- 1564)
작 가 : 미켈란젤로 부르나요티
크 기 : 191cm :(대리석)
소재지 : 이태리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미켈란젤로의 말년은 성공한 인간의 모델이었다. 타고난 천부의 재능과 더 나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거기에다 하늘이 내려준 건강으로 당시로서는 드문 89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유럽의 실세였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교황청 사이를 재치 있게 넘나들면서 자신의 기량을 한껏 과시할 수 있는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가 새로운 작품을 제작할 때 마다 세상을 경탄케 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곤 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말년에 유럽 예술계에서 미켈란젤로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젊은 예술가들은 모두 그를 자기들의 이상을 담고 있는 신처럼 숭배했고 교황들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서 잇달아 작품을 의뢰하며 그를 왕자처럼 대우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보통 많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가졌던 여유로움이 없이 항상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주위의 경쟁자를 대범히 보지 못하는 경쟁심과 질투심을 타고 났기에 당시 쌍벽을 겨루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평생 앙숙 관계에 있었으며, 그전에 이미 경쟁 처지에 있던 친구와 언쟁을 벌리다 심하게 얻어맞아 코가 삐뚤어진 상처를 얻은 것처럼 그의 일생은 대단한 재능 속에서도 자신의 분별없는 욕망이 만든 투쟁과 갈등의 편치 않은 삶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그의 불같은 성격은 변함이 없었고 예술가로서 최고의 명예와 안정을 누리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피를 흘렸고 영혼은 고독했으며 생각은 어둡고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가 모든 경쟁자들을 다 물리친 성공의 정상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때야 그는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부질없었던 정열과 야심으로 얼룩진 상처의 과거를 뉘우치면서 신앙에로 눈을 돌리게 된다.
젊은 시절, 피렌체의 회개를 외치다 화형당한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동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일류로서 비약하고픈 욕구는 신앙의 씨가 자라기에 너무도 강해서 그의 신앙은 여느 동시대 사람들처럼 형식적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전까지 그는 종교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었으나 이것은 종교적 주제를 통해 자신의 예술성을 과시하고 인정받는 것이었기에 그의 작품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주제라도 신앙보다 예술적 표현을 더 중요시했으며, 이 단적인 예가 <성화해설 26번>으로 소개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심판은 작가가 61세의 노년기 시작의 작품이나 문화사에서 새로운 획을 긋게 되는데, 성스러운 장소인 성당에 나체상을 그림으로서 예술이 신앙의 표현 수단이 아닌 신앙이 예술적 영감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변질시킬 만큼 그의 신앙은 미약한 것이었으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신앙은 순화되었다.
자신이 지은 다음과 같은 시에 그의 신앙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님 저의 최후의 순간에 제 손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계신 당신의 팔을 향하게 하옵소서.
당신은 무모한 열정에 사로 잡혀 어리석은 젊음을 보낸 저를
두 팔로 안아 들임으로서 죄인의 회개를 그토록 갈망하신
당신에게 기쁨이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당신이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로 내 모든 죄와
허물을 씻으시어 당신 빛의 광채로 변화시켜 주소서.
내 일생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어 늦게나마 진실에 눈뜬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게 하소서.”
이 작품은 작가가 임종을 맞기 3일 전까지 매달렸던 최후의 작품이며 웅대한 여러 작품에 비해 습작처럼 보이나 이 작품에서 작가의 일생을 읽을 수 있다.
‘론다니니’라는 이름은 이 작품이 로마의 궁전에 있던 것이기에 붙여진 것이다. 화가 ,건축가, 조각가로서 작가는 일생 동안 여러 권력자나 실력자들로부터 수많은 작품을 의뢰받아 이것을 다 소화할 수 없는 처지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작품만은 누구의 주문이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제작한 것이기에 작가의 일생과 마지막 염원이 정확히 표현된 작가의 이력서로 볼 수 있다.
그는 작가로서의 시작을 <성화해설 43번>으로 소개되고 있는 피에타로 시작해서 이 작품 제작으로 일생을 마무리 했다. 그는 이 두 작품 외에 1547년경 자신의 무덤 장식용으로 <피렌체의 피에타>를 제작하기도 했으나 서로의 성격이 전혀 다른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손댄 미완성인 이 작품은 그의 인생과 신앙관이 집약되어 표현된 것이기에 그의 전체 작품의 마무리로 볼 수 있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인생 말년에 쓴 작가의 시(詩) 메아 꿀빠(Mea culpa)에서 자신의 허탈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내 인생 여정은 연약한 배를 타고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거쳐
마침내 모든 이가 도착하는 항구에 이르렀습니다.
이 곳은 모든 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잘한 것이든, 잘못한 것이든 자신의 모든 과거의 행업이 드러나면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함을 느끼면서
나는 자신의 과오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나는 예술을 우상이나 전제 군주로 만드는 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부질없는 상상력 때문에 나는 내 인생에 아무 쓸모가 없는
해로운 것에 열광하며 몰두했습니다.
공허하지만 행복했던 사랑에 대한 예전의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이제 두 개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당하게 될 육신의 죽음은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만, 일생을 거쳐 엮어진 나의 행업을 헴바쳐야 하는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죽음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동안 나의 삶에 큰 힘을 주었던 어떤 회화도 조각도
더 이상 내 영혼에 위로와 생기를 줄 수 없습니다.
나의 영혼은 이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인을 껴안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이 한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다. 불안과 허망감으로 이어지는 상처투성이의 그의 인생을 이해해준 페스카라 후작 부인인 빅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 였다. 64세인 작가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47세의 나이였으나, 고귀한 인품과 열렬하면서도 성숙한 신앙, 우아한 자태, 생기 넘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면모를 지닌 여인이었기에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인생을 나누게 된다.
독신자로서 괴팍스럽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외골수 성격 때문에 화려한 명성 속에서도 항상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말년은 그녀와의 순수하면서도 열렬한 우정을 통해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1538년 이후 이들의 우정은 계속되었고 그녀가 중심이 된 모임을 통해 열성적인 신앙인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인생과 작품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녀는 남편을 사별한 후 1541년 비테르보(Vitterbo)의 수녀원에 들어갔으나 그들의 우정은 그녀가 죽기까지 계속되었다. 고매한 인품과 신앙을 지닌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작가의 작품은 예술을 위한 작품이 아닌 신앙의 표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1547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 그는 미친 사람처럼 슬퍼하며 괴로워했다. 그에게 소중한 인생을 열어준 친구를 죽음으로 떠나 보내야 했던 인간적인 슬픔과 상실감을 통해 체득한 신앙의 정수를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서 가장 순수하고 맑은 사랑이 탄생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 작품의 주제인 십자가 아래서 성모자의 만남이야 말로 신앙의 가장 순수하고 완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마지막 정열을 쏟아 이 작품을 제작했다.
성모님은 바위에 올라선 자세로 죽은 아들을 뒤에서 껴안고 있다. 이 자세로 봐서 성모님은 참혹한 죽음을 맞은 아들을 부축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큰 슬픔 앞에 자신을 가눌 수도 없기에 주님께 업혀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43번에서 소개되는 피에타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여기에서 성모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들을 믿음직하게 안고 계신다. 아들을 편안히 눕히기에 족히 벌어진 무릎에 아들을 안은 성모님의 손 역시 아들의 모든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할 만큼 강인하고 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모님은 너무 슬픔에 겨워 더 이상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모습으로 오히려 아들을 의지하고 계신다. 십자가에 처절한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은 의지하는 자세로 왼쪽 어깨위에 올리고 있는 어머니를 응시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죽은 것 같지는 않게 반쯤 눈을 뜬 자세이다. 자기 때문에 너무 상심한 어머니를 위로하고 도와야 한다는 일념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충실한 아들의 모습이다.
이 모자의 극단의 고통, 서로 우열을 분간키 어려운 슬픔과 고통을 통해 모자는, 마치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시던 때 한 몸이 되었듯이 하나의 돌에 두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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