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힘/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 시집「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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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질 것들이 썩지 않고, 사라질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성욕 왕성한 아메바들이 와글거리는 세상, 무시무시한 미라 세상이다. 산성비를 맞으면 처마의 함석은 당연히 더 빠른 속도로 부식되어야 하고, 구멍이 뚫리고 바스라져야한다. '스테인레스'의 천박함이라니, 또 불멸이란 얼마나 날선 오만인가.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며,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부패는 신의 섭리이자 대자연의 순환법칙이며, 생사의 묘행이 그것에 다 농축되었다.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조용히 낡아감인데, 시간을 걸어 잠귀는 ‘방부제’란 얼마나 끔찍한가. 시간이 존재의 피부 속으로 침투할 때, 모든 존재는 제 윤곽을 허무는 게 마땅하다. 시간은 결코 그 속도를 늦춰주는 법이 없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럼에도 제대로 썩지도 녹슬지도 못한 채 방부제를 섭생하며 조바심으로 허공 속을 발버둥 쳐댄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인데, 우리들은 내 안의 부패에 대한 공포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형상의 낡아짐을 더 두려워한다.
‘아지노모도’의 들쩍지근한 맛내기에 이미 길들여졌고, 물기를 쥐어짜내려고 절대 먹지 말라는 ‘실리카겔(방습제)’과도 오랜 동거를 해왔다. 부정은 부정을 감시하지 않고, 부패는 부패를 반성하지 않는 세상에서 영원불멸하지 않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이 썩을 놈, 이 썩을 놈의 세상’은 욕도 아닌 것이다. 잘 못되어가고 있고 부패해 있음을 빤히 아는데도 애써 외면하고 아닌 것 모양으로 비닐 한 장 슬쩍 덮고서 넘어가려한다면 그 낭패와 피로는 누가 감당하고 견뎌야하나.
면허증과 함께 배추이파리 한 장 끼워 주고받는 ‘미풍양속’이 사라졌다 해서 부패지수가 낮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가 누굴 손가락질 하나. 사지신체 멀쩡하고 밤낮없이 놀고먹는 베짱이에게 복지수혜는 뭐고 기초수급은 뭔가. 범퍼에 살짝 키스한 것 갖고 목덜미 움켜쥐며 자빠지는 너의 허리우드액션은 다 무엇이냐. 부패를 부패라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보다 더한 부패는 없다. 다만 ‘낡음’과 '부패'를 실용과 효용의 소멸로만 보지 않고, 또 다른 가치로의 이행으로 볼 때 기꺼이 시간 앞에 무릎을 꿇어도 좋으리라. 그 인식이 통할 때 위아래로 만연한 부패의 복마전은 종식되리라.
권순진
The Way We Were - Barbra Streis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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