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친전』
김 추기경은 사랑하는 법을 설명하지 않았다. 변신을 거듭하며 사랑의 예측불허를 몸소 보여주었다. 다음의 일화는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김 추기경은 바쁜 일정 중에서도 시간 날 때마다 행려자보호시설, 나환우촌, 달동네, 교도소 등을 찾아 미사를 봉헌하고 그곳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특히 ‘예수의 작은 자매회’라는 수녀원을 자주 찾았는데, 그곳 수녀들은 파견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겨울에도 맨발로 생활하며 한 끼 식사도 매우 간소하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이 그 수녀원에만 가면, 이상하게도 평소 하지도 않던 반찬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추기경을 보좌하던 한 측근이 이를 궁금히 여겨 어쭈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그렇게라도 투정하지 않으면 그 수녀님들은 1년 내내 고기 한 번 먹지 않을 것 아닌가.”
참으로 깊은 배려에서 나온 투정 아닌 투정이었던 것입니다.
“애송시 한편 읊어주시죠.”
기자의 질문에, 문학 소년처럼 보들레르 시를 줄줄 욀 줄 알던 김 추기경이 마지막을 예감하고 읊었던 시는 의외였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시작되는 이 책은 글을 읽는 당신이 바로 김 추기경 사랑편지의 ‘그대’다. 이 책 『친전』은 추기경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겨있다. 친전을 마주하면 여전히 넉넉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름살 낀, 나아가 살짝 흔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를 타고 그의 애절함이 들려온다. 가만히 들어보면 귀하디귀한 100년의 지혜, 아니 1,000년의 지혜가 참 행복의 길,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묘책을 일러준다.
이 책은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남긴 편지와 각종 메시지를 발췌해 엮은 도서다.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김수환 추기경의 생생한 육성을 담아 엮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입니다.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것. 머리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에까지 도달하게 하여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모두 잘 못합니다.”(236쪽)
꿈이 흔들리는 젊은이들, 생존의 불안과 회의를 겪고 있는 이들, 시대의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꿈장이들, 좌절을 겪고 있는 이들과 교감해 사랑이 넘치는 육성 응원을 전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차 신부는 김 추기경 선종 이후 관련 책을 내달라는 요청을 수없이 받았지만, 고사해왔다. 이 책은 손병두 이사장의 오랜 요청과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의 추천 등에 힘입어 김 추기경이 생전에 남긴 메시지들에, 각각의 배경 에피소드와 의미 등을 덧붙여 세상에 공개됐다.
책은 총 5부로 나눠 △희망 없는 곳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그대여 △청춘이 민족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내 기쁨을 그대와 나누고 싶습니다 등으로 꾸며졌다.
김 추기경은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과 ‘서시’를 좋아하지만, 감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 서시를 읊어 볼 생각을 못했다는 내용에서 독자들은 추기경의 살아생전 겸손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친전이란 편지를 받는 사람이 직접 펴 보라는 뜻으로, 편지 겉봉의 받는 사람 이름 옆이나 아래에 쓰는 말을 의미한다.
“카리스마”의 시대가 지나고 “부드러움”이 대세가 되었던 지도자상에 가장 어울리는 분 역시 김수환 추기경이셨다. 1998년 76세로 교구장직에서 은퇴하시면서 그의 여정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음을 우리 역시 익히 잘 알고 있다. 추기경님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분의 말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시금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촌철살인의 말씀 속 유머 때문이었다. 그분의 여유는 말씀 중에도 웃음을 만들곤 했다. 가령, 누군가
“혹시 추기경님 아니세요?”라고 물으면
“나도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라고 답하셨다고 한다.
2008년 사경을 헤매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에도
“짠, 내가 다시 살아났어요!”하셨다니...
이 책을 엮은 차동엽 신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래저래 망연자실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김 추기경은 약속처럼 편지로 날아왔다. 그의 육성을 ‘친전’으로 엮어 전하게 됨을 나는 기쁘게 여긴다.
오늘 우리는 큰 어른의 부재를 매우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그 빈자리가 퍽 썰렁하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권위 있는 참 가르침이 절실하건만, 함량 미달의 훈수들만 난무하고 있다.
이 ‘친전’이, 큰 어른의 품과 깊이로, 길을 헤매는 21세기 우리 모두에게 등불이 되어 주리라 기대한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갈 길을 일러 주고, 사랑의 터치로 위로와 치유를 주는 김 추기경의 ‘친전’ 메시지는 수신인을 찾는다.“
김 추기경께서 선종하기 1년 전부터, 혜화동 숙소에서 또는 병상에서 나라 걱정을 하며 구두로 전한 희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국민은 부지런하지만 정직하지 못하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이래 가지고는 일등 국민이 못된다. 정직하지 못하면 서로 신뢰가 무너지고, 건강한 공동체가 못된다.
둘째, 우리 국민은 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 누구든 법을 잘 지키는 법치주의가 제대로 될 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정의가 제대로 설 수가 있다.
셋째, 우리 국민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이기주의가 너무 강하다. 내 탓보다는 남의 탓만 한다.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른다. 탈북자, 다문화가정, 장애인, 노숙자 등에 대한 나눔이 부족하다.
김 추기경은 이 세 가지가 개인적으로는 행복의 길이며, 국가적으로는 ‘1등 민족’이 되는 길이라고 꿰뚫어 보았다. 이로써 우리는 김 추기경의 유지를 확인한 셈이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고 노래했던 까닭이 드러났다고나 할까. 친전은 그래서 더욱 우리 가슴을 울린다. 이 책을 내게 보내주신 미래사목연구소에 감사 드린다.
엮은이 차동엽. 천주교 사제. 서례명 노르베르또. 198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84년 해군 OCS 72기로 군 복무를 마친 후, 서울가톨릭대학교,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미국 보스턴대학교(교환 장학생) 등에서 수학하였고,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본당 주임신부, 천주교 인천교구 고촌본당 주임신부, 천주교 인천교구 하성본당 주임신부,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교구 기획관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대표작 『무지개 원리』(2007)를 비롯하여 『맥으로 읽는 성경』 시리즈, 『통하는 기도』, 『뿌리 깊은 희망』 『행복선언』, 『잊혀진 질문』 등이 있다. 왕성한 저술활동 외에 연 600회를 넘는 기업 및 방송 강의로 국민 사기진작에 기여하고 있으며, 수십 회에 걸친 TV와 라디오 방송 특강을 통해 '인생해설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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