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사도라

tlsdkssk 2012. 4. 1. 17:06

자유연애를 구가하고, 자기 육체에 대해 부끄럼이 없었으며, 언제나 자신감과 정열로 넘쳤났고, 그 정도가 지나쳐 깊이가 없고 어리석은 여인으로까지 비쳐졌던 이사도라 던컨은 현대무용의 맨발의 무용수였다고 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녀의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사도라 던컨은 1877년 5월 26일 달콤한 탐욕의 자본주의가 화려하게 타오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별이 빛날 때’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낸 일이었다. 이사도라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덩컨 은행이 파산했고, 고객 중 다수였던 노동자와 하녀들은 시위를 벌이며 그녀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덩컨 은행의 파산은 수많은 남녀 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대단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금주령을 모범적으로 지킨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위법자로 만든 일’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저 실패한 은행가로 묘사하기엔 아쉬울 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산 그의 내면은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였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의 거부할 수 없는 연인으로서 매력을 지녔다.

 

그녀는 이런 아버지를 성가신 짐인 동시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를 썼고 어머니는 음악 선생이었는데, 아버지는 노처녀와 사랑에 빠져 어머니와 이혼을 하므로 해서, 그녀의 어머니는 4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힘겨운 살림을 꾸려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의 어린시절은 불우했으며, 그녀의 반항적인 기질은 그와 같은 성장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지적되어 있었다. 그녀는 무용가 기질이 있었고,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자라났다.

그녀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이미 십대부터 이미 동네 어린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춤으로 돈벌이를 해보려는 노력은 싸구려 뮤직홀에서 춤추는 일로 이어졌고, 그러다가 흥행사의 눈에 띄어 단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뉴욕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지만, 정식 발레가 아니라 음악이나 시에 맞추어 즉흥적 춤을 추는 역할이었다.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셀리의 미모사, 꽃의 개화, 벌들의 비행, 오렌지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자유분방하고 찬란한 금빛….’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찬양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결사 반대했다.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일자리를 구하러 갈 때 그녀는 이런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내가 태어난 이 다정다감한 땅을 떠나 어린 순례자가 되었고 기차는 동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거대한 로키 산맥을 지나고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는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만만치 않은 무관심과 몰이해,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는 21세에 유럽행을 결심한다.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이 가축운송선을 타고 런던에 도착한 그녀와 형제들은 달밤에 춤을 추다가 정상의 여배우 캠벨의 눈에 띄어 런던 사교계에 소개되었으며  이후로 런던 사교계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미국을 떠나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 그녀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리스 도자기 전시관에 매료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까지 춤을 추며 길을 가는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고, 그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나무의 요정과도 같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사지를 드러내는 얇은 의상을 걸친 채 맨발로 자유롭게 걷고 달리고 뛰고 구르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서를 표현했다. 그녀는 런던, 파리, 베를린, 가는 곳에서 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03년에는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에 가서 고대적인 풍광 가운데 자신을 풀어놓고 일 년 내내 마음껏 춤추며 지냈으며, 1904년에는 독일의 그루네발트에 학교를 세우고 빈민층 소녀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꿈과 포부를 이룬 시절이었다.

그녀의 춤에 대한 생각도 무르익어 있었다. 파도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유연한 동작으로 내적 감정을 표출해냈다고 한다.  그녀는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을 보고 그 흐르는 듯한 인체의 곡선을 영원한 아름다움의 이상이라고 생각하였고, 독일에서는 니체의 사상에 깨우침을 받아 <춤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여 종교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고도의 예술>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무용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무용수는 오랜 연구와 기도와 영감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영혼의 빛나는 표현임을 터득한다. 무용수의 몸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추면서 보다 심원한 세계로부터 오는 무엇인가를 표현해야 한다. 이런 무용수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무용수이다. 자연을 본받되 모방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동작으로 말하되 모든 자아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녀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라고 했다.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비운의 여인이었다.

전통이나 관습에 그녀의 반항적인 태도는 사생활에서도 일관되었다. 그녀의 부모의 불행한 결혼을 보고서 이미 열두 살 때 독신을 고집했지만, 사랑 앞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은 당대의 천재적인 남자들과의 뜨겁고도 짧은, 기이할 정도로 평생을 가는 질긴 사랑으로 점철되었는데, 중년을 넘기면서부터는 그녀가 1000명의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1906년 푸른 눈의 아름다운 남자 런던의 무대 디자이너인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1910년에는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Paris Singer)와의 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그리고 1913년에는 그 두 아이가 유모와 함께 자동차에 탄 채 세느강에서 익사하는 비운을 겪는다. 

그녀는 불행을 딛고 파리에 다시 학교를 열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어고,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미국에서 세 번째 아이를 사산했고,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남아메리카,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계속했으나, 예전만 못했다.


그녀는 1920년 모스크바 무용학교 설립을 위촉 받아 러시아에 갔다가 17세나 연하인 천재 시인 <에세닌>을 만나 결혼하였으나, 당시 반공산주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미국에서 두 사람은 '볼셰비키'로 낙인 찍혀 다시금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럽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에세닌>은 혼자 러시아로 돌아가 1925년 자살하게 된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었다. 죽은 아이를 낳기도 한다.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좌절도 겪었고, 결혼생활도 불행했다. 


예세닌과 함께 떠난 미국 순회 공연은 술과 연습 부족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선 그녀의 종말을 더욱 재촉했다. 게다가 공연 도중에 나체에 가깝게 흘러내린 의상 때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 등으로 미국 언론에 묘사되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반박했다. “왜 내 몸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며 청교도주의의 속박과 편협한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숨기는 것이 외설적인 것입니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잘 있거라!, 벗이여’란 시를 남기고 서른 살의 나이에 손목을 그어버린 예세닌의 자살 이후 그녀는 니스로 거처를 옮기고 좌우명을 ‘무한하게’로 바꿨다.


이 말은 한때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나 이제는 술 한 병 살 수 없는 가난뱅이 전직 무용수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만은 혐오한다는 그녀 식의 선언이었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말년은 불행했다. 그리고 그 화려하고도 파란 많은 생애는 극적인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남 프랑스의 휴양지 리비에라 해안의 니스에서 그녀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이 스포츠카를 가지고 와서 그녀와의 드라이브를 권했다. 다소 차가운 날씨였기에 그녀는 스카프를 둘렀다. 가장자리에 달린 술 장식의 길이만 45센티나 되는 길고 붉은 비단 스카프였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 술이 바퀴에 말려들어갔고, 그녀는 스카프로 인해 목이 졸려 즉사하므로 그녀의 인생은 마감되었다. 

 

그녀의 영혼은 한마디로 자유로웠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몸짓으로 표현해내는 현대무용의 조타수가 되었다는 평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