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자유인에의 환상

tlsdkssk 2010. 3. 13. 12:33

자유인에의 환상(幻想)

 

영화 ‘세브린느’가 C일보의 ‘시네마 명장면’에 소개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었지요. “제작자 루이스 부누엘은 ‘세르부르의 우산’보다 더 원숙하다는 평을 받은 ‘세브린느’에서 사람에게 미(美)와 추(醜), 초연(超然)함과 집착(執着)스러움이 공존함을 실제와 환상을 넘나들며 나타내고 있다.” 자유인에 대한 나의 환상도 그런 종류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유인에 관해 좀 더 실감나는 비유가 생각나는군요. 산 속에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고함치는 ‘자유인’의 TV광고 장면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그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을 순간적이나마 했을 겁니다. 우리의 기억에는, 사회생활에 적응하며 독립된 가정 하나를 책임져야 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은 입산(入山)을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수험생에서부터 노후대책을 걱정해야하는 연령층에까지, 훌훌 털고 자유인으로 변신할 수는 없을까 하는 환상…….

나는 자유인이 못됩니다.

직업상으로 보면 세속적인 직업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 자유인일 터이고 직업인으로서는 프리랜서 같은 사람이 자유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수도승처럼 세속적인 직업에서 떨어져 있지도 못하고, 프리랜서처럼 ‘백수 못잖게 느긋한 일상이지만 일에는 무서운 치열성으로 직업에 밀착해 버리는’ 자유로운(Free) 용병(Lancer)이 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어디에든 얽매이지 않으면 생활의 리듬을 찾지 못할 것 같은 나는 조직 속에서 자유인이고 싶은 멋을 환상으로 즐기며 살아갑니다.

나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삶의 태도를 ‘소유냐 존재냐’로 다룰 때 소유는 통속적인 인간의 속성이라 하고 존재는 구도자의 속성이라 합니다. 어느 편이든 극단적인 소유와 극단적인 존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사람이지만 대부분의 생활인은 소유 쪽에 훨씬 가깝습니다.

분재 한 그루를 잃을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사방으로 퍼지는 가지들을 공들여 다듬어서 굵은 외줄기 한 개만 6척이 넘게 키워 놓은 연산홍이었는데, 물주기를 잘못하여 고사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윗가지를 자르고 밑둥치에 겨우 숨만 남은 순들을 몇 달이 걸려 살려 내었더니 새순이 돋았습니다.

‘난초 두 분(盆)을 3년 동안 애지중지 가꾸다가 한 순간의 불찰로 그 생명들을 뜨거운 햇볕에 잃을 뻔 한 일로 하여 집착이 괴로움이라 깨닫고, 친구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는 법정의 글 ‘무소유’와 나의 분재 살리기는 수도자와 생활인의 삶의 태도가 비교되는 한 예라 할 수 있겠지요.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다.’라고 그 글은 끝맺고 있습니다. 무소유를 갈파하여 소유를 성취해가는 자유인의 그 자유는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생활인일 수밖에 없는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 안에 난 몇 분 가구는 것을 포기한 수도자는 난을 기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쭉정이 같은 가지를 살려 새봄에 꽃 한 송이라도 피워 보겠다는 욕심이야말로 진실 된 삶이 아니겠느냐.” 라고.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 했지요. 일정한 재산과 생업이 없으면 항심도 가질 수 없고, 처자식과 친지들에게 사람 구실을 못 한다는 뜻입니다. 직업을 잃은 친구에게 식사 한 번 사주며 위로할 능력이 안 되면 살맛나는 생활인은 아니지요. 선택한 청빈을 미덕으로 믿고 살아가는 수도자들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하지만, 내가 무항산하여 항심을 잃는 것은 두렵기만 합니다.

나는 자유인이 될 가망성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직장을 은퇴하면 싫어도 자유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옛날 기억 두 가지를 떠올리면서 깨닫게 됩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혼자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한낮에 덕유산 기슭에서 등산객 일행 몇 명과 합류하게 되었지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무주 구천동의 긴긴 계곡 물소리가 들려옵니다. 산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정상(해발 1614m)에 올랐을 때는 빙화(氷花)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도록 걸어 내려가 민가에 찾아 든 ‘우리’는 밤새 소주를 기울이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헤어질 시간입니다. 나는 혼자 떨어지기가 싫어 그들과 함께 귀경하고 말았지요. 일주일로 계획한 여행이 3일 만에 끝난 것입니다. 또 한 번의 무작정 여행은 건강을 헤쳐 정상궤도를 잠시 이탈하였을 때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행 첫날은 그런대로 좋더군요. 둘째 날 밤이 되었는데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집 걱정에다 외롭고 쓸쓸함을 이겨 낼 수가 없었지요. 하루를 더 돌아다니다가 귀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들른 해인사를 생각하면 썰렁하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은퇴 후에 세계를 두루 돌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집사람과 함께 단체여행에 끼어서 다닐 것입니다. 나는 자유인이기에는 이미 틀렸습니다. 비자유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노예에게는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노예근성이 생긴다더군요. 자유를 주어도 적응을 못하고 조금씩 허용되는 자유에 고마워한다니 그것을 ‘훈련된 자유’라 부를 수 있겠지요.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들도 자유인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봉사활동은 하고 싶은데 그 단체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못하겠다는 것이나, 키우던 강아지의 임종을 보고는 두 번 다시 집에 개를 키우지 않기로 한 것도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활인입니다. 출세형도 이재(理財)형도 아니지만, 일에 대한 성취감과 충만감에서 활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생활인입니다. 적당한 사치를 사랑하려 하고, 늘 어떤 소망을 가져야 살맛이 나는 것은 자유인의 기질이 아님을 잘 압니다. 우리 집에 외제 냉장고를 들여 놓는 것은 세계 6대 전자제품 생산국의 위상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용납하지 않지만, 프랑스 산(産) 포도주 샤토마고(Chateau Margaux)를 곁들인 멋진 식사를 나는 사랑합니다. 헤밍웨이가 글을 쓰면서 늘 곁에 두고 마셨던 샤토마고는 그가 새로 태어난 손녀의 이름을 마고라고 지어서 더 유명해졌다더군요. 내게 조금은 과분하지만 얼마나 멋진 사치인지요. 나는 1년에 한두 번씩만 그런 사치를 즐기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유인일 수 없는 내가 자유인을 동경하는 것은 꿈이나 소망은 아니며, 환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나는 마음을 닦는 시간을 수필 한 편씩 쓰는 시간에서나마 가지면서, 또한 존재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시간도 잠깐씩은 갖도록 노력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마음의 여유로움에서 찾으며, 자유인의 고뇌와 번뇌와 슬픔을 생각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데에서 나 자신도 조금이나마 자유인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 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 속에 빈 공간을 가지려 애쓰는 자세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자유인은 그를 둘러싼 외적(外的) 관계에서의 자유로움과 함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함을 압니다. 자유인에의 환상, 그것은 나의 영원한 환상입니다.

1998년 2월 ( 200x18)

 

어른이 읽는 동화 (정호승 지음) ‘연인‘의 줄거리를 옮겨 놓는다.

‘자유인에의 환상’에 대한 답인 것 같다.

 

운주사 대웅전의 두 마리 풍경(風磬)중 한 마리가 ‘자유인’에의 갈망으로 비어(飛魚)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쇠줄에 매달려 있다가 제비 둥지에서 새끼 한 마리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순간 몸을 날려서 쇠줄로부터 떨어져나간 것이다. 시인을 만나고, 유치원생 아이의 죽음을 보고, 점치는 새도 되어보고, 비둘기와 사랑도 나눠보고, 배반도 당해보며 ‘인생 공부‘ 많이 하고 돌아온다. 와불(臥佛)이 가르친다. “풍경으로서의 삶이 네 삶의 본질이다. 삶은 시간이다.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살지 않으면 삶이 아니다.”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요?”

“결국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새들에게 날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아온 풍경은 그냥 달려 있는 풍경을 다시 사랑하며 그 옆에 매달린다.

2006년 11월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무조건 용서해주어야 그는 나에게서 자유로워지고, 나도 그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에게 원한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나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진정한 자유인은 무조건 용서하는 사람이다.

- ‘루카복음 7장 36절 - 50절’을 해설하신 신부님 말씀

2007년 6월

오늘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

“언젠가 우리에게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온다. 그때 가서 아까워 아까워 망설인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한때 맡아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러니 시시로 큰마음 먹고 놓아버리는 연습을 미리부터 익혀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텅 빈 충만’을 안고 일흔 여덟에 열반에 드셨다.

2010년 3월 11일

   ** 옛날에 올린 것 같은데, 법정스님이 "그래야 지혜로운 자연인이 될 수 있다" 고 하신 말씀이 '자유인에의 환상'의 결구가 될듯하여 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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