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스크랩] 문정희 시인의 좋은 시 모음

tlsdkssk 2008. 10. 3. 05:22

감옥문을 열며


그가 다녀온 감옥은 어떤 곳일까

내가 알기로는

감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인데

그는 그곳을 다녀온 죄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면 재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젊잖게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를 보면 가끔 감옥은 그리운 곳이 될 때가 있다

그는 거기서 살아 있었고

밖에 있는 우리들이 그물에 갇혀

죽은 듯이 입 다물고 있었으니까


우리들이 잘 길든

고기떼들이 되어 있는 동안

그는 키가 훌쩍 커지고

눈빛 맑은 수말이 되어 있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감옥을 지니고 있다는데

오늘은 내 감옥 문부터 활짝 열어 버릴까 보다

위험한 나를 놓아 줄까 보다



가을밤에 시인들은


가을밤에 시인들은

깊은 잠을 자도 좋다


머리맡에 

하얀 원고지를

기도처럼 펼쳐 놓고

깊이 잠들면


밤새 

누군가 조용히 찾아와

낙엽 같은

시구 하나

떨구어 놓고 가리니



가시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갈대숲을 지나며


처녀 시절이여, 안녕


나에겐 증거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염자리 의젓한 신랑의 팔을 끼고 서 있는

한 장의 결혼사진도 있지만


이상도 하지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네

유부녀는 더구나 아니였네


방목해서 키운 튼튼한 아이들

넉넉한 평수에 편리한 부엌의 안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처녀였다네


집안에서 잠시 아내이다가

현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시 처녀가 되었지


사람들은 모르지

세상엔 결혼한 여자가 없다는 것을

모든 여자가 독신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지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넓이와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찍은 여자를

결혼한 여자라 묶어 버릴 뿐이지



갈대의 노래


바람밭이로다


죽은 여자의 흰 머리칼

흐느끼는 소리


은비늘 쏟아지는 거울을 들고

어디선가

한 무리의 추운 신발들이 가고 있는데


미친 바람을 끌어올리며

시리운 노래가 나를 흔드네


이렇게 눈물 나도록 간절한 것은

생각할 수 있다는

아픈 은혜로움에서가 아니라


햇빛이 화살로 꽂혀오는

등허리의 무력과

권태에서가 아니라


그대 이마에 다룽이는

주름살의 서러운

인기척에서가 아니라


비둘기 구구 우는 소리 같은

내 가슴의

공규(空閨)때문에서가 아니라


바람밭이로다

 

 

 


햇살 뽑아 올리는 산그늘에 앉아

여자들은 날개 달린

개 한 마리씩을 키운다


불의 끝을 헤매는

바람을 쓰고

아무데나 쉬어가는 저 하늘 아래


밤이면 수천이 개떼들이

물구나무 서서

달아나는 사랑을 짖어댄다


문알 잠가 버릴까 보다

가장 완전한 도둑으로

깨어진 식기를 핥는

철없는 유희


번뜩이는 눈에서

누우런 봄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


이슬 속으로 들어가다

햇살이 이마를 깨듯

드디어 산그늘의

칼 쓰러지는 소리


이 세상은

그러나 날지 못하는

네가 살다 가기 편한 곳이다



고독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 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길을 떠나며


너희들 멀어져라

등 돌려라

고뇌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허허로운 불모의 땅으로

홀로 가리라


유리 조각 날카로운 모래의 나라

십 년 전인가 십오 년 전인가

단 한 번 비가 쏟아졌다는

그 꽝꽝한 땅에 가서

배가 고플 때마다 목이 탈 때마다

모래를 파먹으며

천 년 수심을 찾아가리라


눈뜰 수도 없을 만큼 캄캄한

절벽을 맨손으로 두드려

대지의 숨결소리를 들어 보리라


사막을 뚫고 나오는

푸른 별 하나를 만날 때까지

그 별이 내 가슴에 숨결로

살아오를 때까지


너희들 가까이 오지 마라

행여 내게 한 잔 물을 주지 마라


철저히 홀로가 아니면

이곳엔 쥐똥나무 한 그루 살지 못하리니



남한강을 바라보며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밤마다 부뚜막에 찬물 떠놓고 빌던

그 조왕신이 살고 있나 보다


사발마다 가득히

한 세월의 피와

한 세월의 기도를

그 빛나는 말들로 채워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그 물들이 모여


그대 안에

번쩍이는 비늘을 단

용과도 같은

거대한 것으로 살아 숨쉬고 있나 보다


그래서 그대 안에

우리의 조급한 욕심과

시커먼 거짓과

저 서구의 쇳물이 서릴 때는

어린 물고기들이 흰 배로

까무러치고

심청이의 옷자락과도 같은

수초들이 썩어내려

나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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