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란아, 내 고양이였던/황인숙

tlsdkssk 2008. 6. 19. 07:30

                         

 

                                                란아, 내 고양이였던

 

                                                                             황  인  숙

 

 

 

 

 

 

   나는 네가 어디서 오는지 몰랐지

   항상 홀연히

   너는 나타났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 시간

   그 무엇도 누구의 것이 아닌 시간

   샛집 옥상 위를 서성이면

   내 마음 속에서인 듯

   달 언저리에서인 듯

   반 투막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네가 나타났지

 

   너는 오직 나를 위해서인 듯 밥을 먹었지

   네 발은 사기그릇에서 방울 소리를 냈지

   그리고 너는 물을 조금 핥았지

   오직 너를 위해서인 듯

   너는 모래 상자를 사용했지

   너를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

   너는 작은 토막 울음소리를 내며

   순식간 몸을 감췄지

   숨바곡질을 하며 졸음은 솓아지고

   잠은 오지 않았지

 

   그건 동트기 전이었지

   우연히 나는 보았지

   두 집 지붕 너머 긴 담장 위로

   고단한 밤처럼 네가 걷는 것을

   그 담장에는 접근 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지

   너는 잠깐 멈춰

   내 쪽을 흘깃 보았지

   잠깐 비칠거리는 듯도 보였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오, 그러나 기하학을 구현하는 내 고야이의 몸이여

   마저 사뿐히 직선을 긋고

   담장이 꺾이는  곳에서

   너는 순식간 소실됐지

   그 순간 사방에서 매미들이 울어댔지

   그 순간 날이 훤해졌지

   그 순간 눈물이 솟구쳤지

   너는 넘어가버렸지

   나를 초대할 수 없는 곳

   머나먼 거기서 너는 오는 거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나는 너무도 고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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