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펌--색,계(영화 평)

tlsdkssk 2007. 11. 8. 21:17

이안감독의 영화‘색계’


1.

그들은 애초에,

사랑을 거래하지 않았다.


욕망을 거래했다.

여자는 남자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

남자는 자신의 비열함과 이중성을 배설하고자 하는 욕망.


막부인이라 칭하며, 친일파 정보부대장 ‘양조위’에게 접근한 항일민족주의자 ‘탕웨이’.


그들이 만난 접점에서의 전투적인 성적 긴장감은 무의식을 까발리는 그들의 심리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폭력적이고 파행적인 몸부림은 잔인한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그들의 불안한 내면 심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섹스가 적나라해도 섹스가 안 보인다. 시대와 뒤엉킨 그들의 몸은 자신들에게 놓인 적대의 경계를 허물고 그들만의 폐쇄된 에로스에 갇힌다. 그리고 그들은 경계 밖으로 내던져진다. 둘에게만 열어젖혀있는 자유로운 공간에서도 관객은 정서적 이완을 경험하기보다는 계속된 긴장상태를 읽어낸다. 뒤틀린 엑스터시를 구경해야 한다. 그들은 결코 경계 바깥에 놓여 질 수 없는 현실적이고도 적대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생성한 에로스의 점(點)과 그들이 존재하는 현실의 점을 이어놓은 라인은 거리가 멀고 팽팽하다.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내뿜는, 뇌관을 건드리는 아슬아슬한 심리적 줄다리기를 그들만의 정사(情事)가 갖는 완결구조 속에서 온전하게 체험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이 애절하지 않다. 그들의 정사가 애절하다. 현실이 절절하다. 그래서 사랑이 절절한 것처럼 보인다. 시대는 그들의 끈을 단호히 자르고, 죽음의 벼랑으로 밀어낸다.



2. 

이 영화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상업적으로 잘 포장된 애정영화라는 점과 감독이 여성적인 시선으로 이 영화를 다뤘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모든 구도와 앵글이 둘에게로 향해 있다. 둘의 정서(情緖)에 핵심이 모아져 있다.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도 주변 인물들의 관계도 둘의 애정의 농도를 짙게 해주는데 기여하고 있다. 애정영화다. 역사가 영화라는 도마 위에서 잘 다져져 배어들어가는 맛이 적다. 둘을 위해 긴급히 급조된 것 같은 시대적 장치 때문인지 영화가 끝난 후 여운이 길게 남지 않는다. 탕웨이라는 여배우가 주는 팜므파탈의 매력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들도, 백화점에 진열되어있는 예쁜 인테리어 같다. 만약 이 영화에 거칠고도 장중한 역사의식을 짙게 깔았다면 이 영화가 갖는 애정영화의 위치가 흔들렸을 것이다. 감독은 분명히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선명한 구도를 택했다. 대량의 관객이 바로 손에 넣어 손쉽게 먹을 수 있게끔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채워놓았다. 이 영화를 용서할 수 있는 건, 감독이 애정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데 있다. 삶과 영화에 대한 오랜 경륜을 갖고 있는 감독은 어떤 재료를 주물러도 다채롭고 파격적인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같다. 몸과 심리변화의 상관관계를, 정사라는 메카니즘 속에서 거북스럽지 않고 노련하게 구사해냈다. 어느 누구의 가학도 피학도 생각할 겨를 없이, 마초적인 성질의 재료를, 육화(肉化)시키지 않고, 세심하고 여성적인 시선으로, 심리를 배열하고 응축한 그의 재주가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