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최인호 대담

tlsdkssk 2007. 9. 15. 13:51

2007년 9월 15일 (토) 10:59   조선일보

최인호 60대 남자 연애소설 쓰자 집사람이…



▲ '별들의 고향'은 26살에 썼어요 '무지하게 화제 되는 걸 한번 써버릴 거야'라고 했지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 60대 남자의 연애소설 한번 쓰려니 작품에 대해 말 안하는 집사람이 "뭘 그런 걸 다 써요" 라고 하데요

“내가 왜 그걸 대답해?” 안락 가죽의자에 앉은 소설가 최인호(62)는 몽당연필처럼 짧아진 쿠바산(産)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는 상체를 뒤로 젖혔고,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 흰 스포츠 양말을 신은 두 발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에게 “나이가 들어도 늘 연애에 대한 욕망은 있는 것이지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연애 감정이야 죽을 때까지 있지. 괴테도 칠십이 넘어서도 주책없이 십대 소녀한테 연애 편지를 썼잖아. 최형은 안 그래? 그런데 내게 왜 이런 걸 물어요?”

서울 한남동의 집필실에서 그를 만난 것은, 그의 소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추석 때 영화로 개봉된다는 이유도 있었고, 청년(靑年) 같은 그가 등단한 지 햇수로 40년(1967년 ‘견습환자’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이 됐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날 신문의 1면 톱으로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과 ‘젊은 여인’ 신정아씨와의 관계가 대서특필됐다. 나는 당초 준비해간 질문을 바꾸었다.


―올 초 한 인터뷰에서 ‘주인공은 내 또래의 60대 남성, 어느 날 한 젊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아내에게 엉엉 울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을 고백한다. 아내는 고민 끝에 남편의 연애를 허락한다…’는 진짜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구상 중이라고 말한 적 있었지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꿀벌처럼, 작가의 머리는 늘 소재를 찾아서 다니죠. 지난 3년 동안 사람도 거의 안 만나고 매일 같이 책 보면서 신문에 소설 두 개를 연재했어요. 끝나고 나니까 돌아버리겠더라고. 둘 다 너무 어렵고 까다로운 소설이어서, 이제는 연애소설을 좀 써야지 했던 거지. 그런데 연애소설을 쓰면 이상한 게, 꼭 주인공은 항상 내 나이가 되거든. ‘별들의 고향’(1971년)을 조선일보에 연재할 때도 그 주인공이 당시 내 나이였어. 그래서 앞으로 쓸 연애소설의 주인공도 내 나이 60대가 되겠지.”


―그러면 변양균 실장과 신정아씨의 관계는 어떻게 봅니까?

“흥미롭고 온 나라가 뒤집혔는데. 글쎄 그거를 어떻게 봐야 하나….”

그는 몸을 뒤로 더 젖혀 나와의 물리적 거리(距離)를 멀리 했다. 그렇게 해서 질문을 피하려는 듯.

―60대 남자의 연애소설을 쓰려는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와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지 않을까요?

“원래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지요. 두 사람은 충분히 애틋할 수도 있지.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다만 거짓말하고 공적인 권력을 남용하고 개입하는 것은 잘못됐겠지. 그런데 내가 연애 박사인가, 이런 걸 묻게.”

―‘목숨 거는 사랑’ 운운 하는데, 실제로 그런 사랑이 존재할까요?

“소설가들이 완전히 범죄자지. 목숨을 걸 만한 사랑은 소설이나 영화의 주제이겠지. 글쎄, 속임수 같은 것이 있잖아. 옛날 한 선사(禪師)도 그랬지. ‘속지 마라, 속지 마라’고.”

그는 이같은 화제를 아예 차단하기 위해, “아까 말한 연애소설은 말로만 그렇지, 안 쓸 거요. 집사람이 내 작품에 대해 좀처럼 말하지 않는데, 그 연애소설에 대해서만 ‘뭘 그런 걸 다 써요’라고 했거든”이라며 빙긋 웃었다.

―여성 팬들도 많은데, 혹 연애감정이 작가의 창작 의욕을 불지피지 않나요?

“작가의 열정에는 어떤 여성적인 힘, 로맨스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세속으로부터 저 자신을 끊어버리고 있어요.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라고 할까, 히딩크가 ‘축구를 즐겨라’라고 했다는데, 요즘 들어와서 제가 그걸 많이 느끼는 거 같아요. 글을 쓰는 창작 행위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끊어 버리려고 노력을 해요.”

―그렇게 즐길 수 있는 것은, 글이 선생에게 경제적 여유와 명성을 가져다 줬기 때문일까요?

“물론 유명해지고 물질이 따라오는 것은 있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내가 ‘유림(儒林)’이라는 소설을 쓸 때, 참고문헌 한 권으로 시작했거든요. 여기 책상에 있는 책들이 전부 다 그런 쪽 책들인데, 나도 모르게 한 권씩 한 권씩 생기더라고. 고등학교 때 이렇게 공부 했으면 아마 서울대에 1등으로 들어갔을 거야. 이런 작업이 물론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즐겁더라고요. 참 역설적인데.”

―그렇게 글을 쓰는 목적은 뭐죠?

“그거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먹고 사는 문제인가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아마 내 자신에 대한 어떤 만족, 자기만족 때문이 아닐까요”

―선생 작품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왜 일반 독자들이 그렇게 매료될까요?

“독자들이 매료됐다고 하기에는 글쎄…. 분명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작품에 내가 매혹되지 않으면, 그걸 쓰면서 내가 보람이 없으면 쓸 수가 없어요. 가령 ‘유림’은 20년 전부터 갖고 있던 소재였어요. 소설도 다 때(時)가 있는지 20년 뒤에야 썼어요. 처음 쓸 때 내가 제일 고민한 것은 과연 이 시대에 이것이 왜 필요한가. 내 스스로 어떤 결정적인 동기를 갖는 것, 내 마음을 불러 일으킨 것이 제일 어려워요. 내가 매혹되지 않으면 쓸 수 없어요. 독자들은 금방 그걸 알아요. 5만부쯤 나갈 걸로 여겼는데, 저도 놀란 것은 80만부나 나갔어요.”

―독자의 열렬한 성원도 있어야 하지만, 동업자끼리의 평판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없다는 게 나한테 참 좋았어요. 기자도 그렇고, 작가도 마찬가지인데, 그 시대의 어떤 연결고리에 묶여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헤밍웨이도 그랬거든. ‘작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문단(文壇)’이라고. 문단에서부터 방송, 신문, 잡지 등 이런 것들이 작가를 결과적으로 구속하고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毒)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가나 평론가 등이 선생 작품에 대해서는 ‘문학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약간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나, 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런 것들을 인정하기가 싫어. 나에 대해 노코멘트 하는 것을 내가 더 바란다고. 좋게 평해주는 것조차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문단 행사나 문인들 술자리에는 안 나타나죠?

“거의 안 나가죠. 그런 데 어울리면 작가에게 안 좋아. 그런 말 있잖아요, 중국집 주방장과 작가는 가능하면 나타나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상당히 외롭겠습니다.

“내 친구들도 그래요. ‘그렇게 안 나타나면 너 외롭다’고. 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혼자인데. 외로운 것인데. 친구라는 존재도 뭐 그런 것 같아, 만나서 서로 명함 건네고 안다는 게 진실한 것인가? 그게 정말 필요한가? 우리 와이프와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지인(知人)인데, 정말 우리가 가까운가? 예를 들어 봅시다. 심봉사가 심청이를 그렇게 보고 싶어했다는데, 정말 그랬다면 공양미 ‘삼백석’이 없더라도 눈을 떠야지. 우리가 서로 안다는 것은 대부분 공양미 ‘삼백석’때문이 아닌가요?”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는 별로 감동이 없는 것 같군요.

“내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결과적으로 남을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화제가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직감했는지 “난 그렇게 괴팍하지는 않아요. 독불장군도 아니고. 친구도 많아요”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시가에 다시 불을 댕겼다.

―작품을 빼고는 남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별로 없는 거 같은데.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을 겁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나는 작가가 남을 위한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해요. 뭐 민중을 위한다던가. 작가가 작품 아닌 것으로 무엇을 위해 한다든가 하는 것은 난센스요. 작가는 극도의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일 수밖에 없고, 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부여 받은 시간 중에는 남을 위해 쓸 수밖에 없는 시간도 포함돼 있는 게 아닐까요? 가령 상심한 친구를 위해 술잔을 나누고, 상가(喪家)에 들러야 할 때도 있고….

“내가 잘난 척 해서 미안하지만, 나도 친구가 많고 아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꼭 출근부에 도장 찍듯이 서로 얼굴을 보여야 하나. 우리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도장 찍는 거랑 다르지 않지. 오히려 내가 혼자 앉아 그 양반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고 그러면 됐지. 상가(喪家)라고 했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상여를 쫓아가면서 엉엉 우니까 조주(趙州)라는 선승이 ‘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일 때도 저렇게 해줬나’라고 했다고.”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작품이 영화로 개봉되는데, 실제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그렇게 절실했나요?

“나도 혼자서 그런 질문을 할 때가 많아요. 만약 지금 우리 어머니가 살아온다면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정말 어머니를 내가 사랑했나? 리얼리스틱한 어머니가 떠오르더라고. 키가 난쟁이 같고, 물건 값 깎는다고 싸우던 어머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릴 때 같이 목욕탕을 갔던 장면이오. 어머니가 애를 9명을 낳아서 3명 죽이고 6명 살았는데, 배가 완전히 너덜너덜했어. 그 생각이 먼저 나더라고. 어머니 냄새까지 나더라고. 와이프에게 ‘우리 어머니 참 고생했다, 참 불쌍했다’라고 그랬어요. 작가라는 것이 남을 위한다, 우리가 슬프다 하면서, 내게 가장 가까운 어머니를 절실하게 사랑을 했는가. 이런 문제로 내가 고민을 하는 것도 에고이스트이기 때문이겠지.”

―동년배 작가들 중에는 1970~80년대 몸을 던져 체제에 저항했지요. 그런 이들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습니까.

“내가 콤플렉스가 있었다면 70년대 시절의 김지하씨밖에 없어요. 당시 거의 모든 작가의 마음 속에는 김지하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나는 김지하와 친했거든요. 하지만 난 스스로를 ‘비(非)체제’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어요. 이미 ‘그들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이제는 그들이 행동에 의해 문학에서의 프리미엄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요. 누구라고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어요. 굉장히 용기 있는 일은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문학에 프리미엄이 되는 것은 난센스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그것은 권력의 논리지.”

―‘그 누구’라는 작가가 당시 선생을 만나고 나서 “약은 서울내기”라고 평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약았다? 누가 더 약은 것인가. 최형은 어떻게 보시오?”

―작가로서는 드물게 골프를 일찍 시작했지요?

그는 얼굴을 살짝 붉혔고, 말을 더듬었고, 추가질문마다 짧게 응수했다.

“한 10년간 영화에 전념을 했죠. 골프는 80년대 후반인가…. 그때 너무 운동이 없고 약간의 신경성도 있고 그러니까 운동을 하자 해서 했지.”

그런 뒤 “요즘에는 골프를 안치고 날마다 청계산에 오른다”고 강조했다.

―술은 안 마시나요?

“젊었을 때 뭐 엄청나게 마셨죠. 골목길에서 목을 꺾고 토하기도 하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맛이 없어지더라고. 그래서 술을 별로 안 마셔요. 물론 술자리에는 가요. 안 마셔도 똑같이 취한 상태가 될 수 있어.”

―1967년 ‘견습환자’로 등단을 했으니, 햇수로 40년이나 됐군요.

“사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된 거죠(당시 그는 ‘벽구멍으로’라는 단편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입선을 했으나 활자화되기 직전 한국일보 사무실에 불이나 그 원고가 타버렸다). 나는 참 럭키한 게 초등학교 때부터 꿈이 작가였어. 그 꿈이 변하지 않고, 내가 쓸 수 있는 소설을 써 왔다는 것이 행복해요. 독자들에게 외면당하지 않고.

그런데 내가 지금 바라는 것,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문학 청년 시절에 가졌던, 남한테 청탁 받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는 거라고. 지금까지는 청탁과 주문에 의한 글들이거든요. 그게 아닌 내 스스로. 내적 충동에 의해서 글을 더 쓰고 싶어요. 정말 그쪽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적 충동에 의한 글이란 어떤 글입니까?

“초창기 단편 중에 ‘술꾼’이라는 거 있잖아. 1966년이니까 내가 스물한 살 때죠. 누나네 집 에서 누나를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쓸까’ 혼자 중얼거리며 누나 노트를 펴서 그걸 썼어요. 두 시간 만에 작품을 썼어요. 또 ‘문학과 지성사’에서 ‘내일 넘겨줄 작품 있소?’라고 묻길래, ‘예’라고 답변했는데 집에 와보니까 완성된 작품이 없어요. 그래서 ‘타인의 방(房)’이라는 작품을 그날 밤새 썼어요.

‘별들의 고향’이라는 작품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걸 26살에 썼어요. 그게 내 팔자가 되어버렸는데. 당시 ‘무지하게 화제 되는 것을 한번 써버릴 거야’라고 했지. 그걸로 내 뒷 인생이 낙인 찍혔지. 그러나 얼마나 공들여 쓴 것이냐 하면 노트에 썼다가 다시 원고지에 옮겨 썼어요. 내 이야기는 뭐냐면, 정말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 시절에는 내가 나만을 위한 글을 썼다는 거지.”

―돌아가고 싶은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젊은 세월에 대한 그리움 같군요.

“그런 거는 없어요. 난 지금 나이가 더 좋아. 이제는 조금 뭔가를 알잖아. 젊었을 때는 욕망의 가닥이 많잖아. 시장 전봇대의 전선줄처럼 막 엉켜있잖아. 그게 잘못되면 누전이 되지. 그런데 이제는 전선이 단순해졌고, 대신 전압은 좀 세지잖아. 그렇잖아, 최형은 아직도 욕망의 가닥이 많나. 아니지?

무위이화(無爲而化: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뤄짐)와 적막(寂寞)으로 있다가, 쓰고 싶으면 쓰는 것, 정말 그게 꿈이야. 평생 작가로서 살아왔는데, 그 쪽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아.”

―젊은 시절을 빼면 상복(賞福)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요.

“그렇게 많이 받지는 않았지. 상이라는 것은 원래 질투의 대상이 안 되는 사람들한테 주는 거 아니야? 만만한 똘마니한테 주는 법이지. 나야 항상 그들의 속을 썩이는 질투 대상인데, 나한테 상 주겠어요. 심사위원 같은 걸 맡으라고 하면, 내가 심사를 받는 게 낫지, 안 한다고 그래요.

내 최고의 목표는 글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작가가 글을 못 쓰면 뭐해. 그리고 지금 자기 글이 어떤가를 제일 잘 아는 것은 자기입니다. 남도 아니야. 작가가 작품이외의 것으로 평가 받기는 쉬워요. 적당히 포장해서. 하지만 ‘많은 사람을 잠깐 속이기는 쉬운데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그게 진리예요.”

―요즘도 줄기차게 만년필로 씁니까? 악필(惡筆)도 여전하시고.

“나는 그것도 행복해. 컴퓨터로 안 쓰는 유일한 작가였는데, 김훈이도 꼈다고 그러더라고. 요즘 신문에 연재하면 내 글씨를 못 알아봐서(조선일보의 경우 납활자 신문 시절 그의 글자를 해독하는 전당 문선공이 있었음), 난리치고 욕을 많이 먹지. 그래서 여직원에게 읽어줘서 타이핑을 쳐 보내줘. 컴퓨터 안 하는 거 정말 행복해. 사람들이 그걸 왜 모르지?”

―컴퓨터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면야 행복하지요. 저 같은 사람은 그거 안 하면 빌어먹습니다.

“어, 그러면 곤란하겠네.”

그는 낄낄거렸고, 몽땅 시가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작별하려는데 그는 학창시절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와는 상관없이 혼자 다짐하겠는 것인지, 내게 이를 사방에 전파해달라는 것인지.

“내가 살아온 어떤 경험으로부터, 모든 이에게 알려진 나로부터, 남한테 조금이라도 알려진 내 이미지로부터, 최형이 지금껏 알아온 최인호로부터, 그것들로부터 내가 완전히 단절됐으면 좋겠어요. 지금부터 내 인생은 그렇게 갈 것이고 그렇게 되길 간절히 원한다고.”


속시원한 뉴스풀이"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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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인호를 인터뷰했다. /전기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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